정확히는 당분간 참을 예정
시월애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전지현과 이정재!
(와! 캐스팅 속된 말로 '쩐다!')
서로 다른 두 시간대에 살던 남녀가 편지를 통해 교감하고, 쌓아가고, 사랑하고....
거기에 기가 막힌 대사가 있다.
“사람에겐 숨길 수 없는 3가지가 있다. 기침과 가난과 사랑이다.”
사람에 따라, 생각에 따라, 상황에 따라 더 있을 수 있겠다.
전에 대학교 동아리 방에 놓인 책에서는 '재채기'도 있었던 것 같다.
오늘 숨길 수 없는 새로운 것을 발견했다.
바로, 구멍 난 양말!
컴퓨터 방은 북향이라 아직 겨울이 확실히 물러가지 않은 듯하여,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던 추위가 어깨를 쫙 펴고 고개를 까닥이며 오는 듯하여 양말을 꺼내 신었는데,,,,,
고양이가 낯선 사람 경계하듯이,
새싹이 봄은 잘 오고 있는지 확인이라도 하듯이
수줍게 살짝 고개를 내민 엄지발가락!
생각해보니, 몇몇 물가는 더 싸진 것도 같다.
오리털 패딩이라던가, 양말이라던가,,,
물론 정가로 사려면, 오리털 패딩은 몇십만 원을 훌쩍 넘겠지만, 쇼핑앱을 이용하면 80%~90% 세일하는 것을 살 수 있지 않은가?
양말은 또 어떤가?
플랫폼들이 등장하면서, 양말을 제조하는 회사들이 온라인 상에서 마음껏 장터를 펼친다. 옛날처럼 굳이 5일장(1일 & 6일, 2일 & 7일, 3일 & 8일 등등)을 가지 않더라도, 이제는 클릭 몇 번에 새 양말을 살 수 있고, 요새는 또 다음날 배송도 해준다. 뭐 이런 세상이 다 있는지...
5일장에서 엄마가 사다 주신 양말을 신다 보면 금세 구멍이 나곤 했다. 그때엔 재질도 많이 안 좋았으리라 싶다. 그리고, 양말을 구멍 내는 결정적 원인인 발톱! 그 시절엔 그렇게 자주 깎지는 않았던 것 같다. 여하간 구멍 난 양말은 버려지는 게 아니라, 다시 꿰매어져야만 했다. 바쁜 엄마는 그런 것에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었기에, 큰 형은 큰형이었기에, 작은 형은 싸움하는 거의 깡패 같은 형이었기에, 막내는 너무 어렸기에, 결국 바느질은 나의 몫이었다.
처음엔 바늘귀에 실을 넣는 것이 신기해서 좋았다. 실 끝에 침을 발라 뾰족하게 만들고 나서, 살살 조심히 바늘귀에 넣는 일은 작업이 아니라, 차라리 작품이었다. 그 통쾌함, 뿌듯함.
그러나, 나도 어렸기에 바느질은 호락호락하거나,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툭하면 손가락을 찔려서, '왜 나만 바느질해야 하느냐?'며 속상해하곤 했다. 그러나 어쩌랴! 둘러봐도 당최 답이 없는 것을....
피할 수 없는 운명이어서, 체념 아닌 체념을 하며 다시 마음을 부여잡을 밖에!
그렇게 나도 모르게, 이를 꽉 깨물고, 고개 한 번 숙이며, '나중에 꼭 부자가 돼야지!' 다짐할 밖에!
자주 하면 실력이 는다.
확실하다.
처음엔 일자 모양의 바느질에서, 십자 모양의 바느질까지,
마무리도 한 번만 하다가, 두 번, 세 번...
어디에서 시작해서, 어디에서 끝내야 하는지...
얼마만큼을 접어야 모양이 흐트러지지 않는지...
내 것만 하는 것이 아니라, 큰 형 것도, 작은 형 것도, 막내 것도, 술만 마시는 아빠 것도, 그리고, 그리고, 밤낮없이 아들 넷 먹여 살리느라 고생하는 엄마 것 까지도...
큰 형, 작은 형 양말을 꿰맬 때에는 '왜 내가 형들 것 까지도 해야 해?' 하는 억울함이,
막내 양말을 꿰맬 때에는 '그래도 내가 형이니까 해 줘야지!' 하는 애잔함이,
아빠 양말을 꿰맬 때에는 '돈을 못 벌면 술이라도 마시자 말던가?' 하는 원망이,
엄마 양말을 꿰맬 때에는....
나중에 커서 잘해 드려야겠다는 굳은 결심, 고된 인생을 절대 포기하지 않는 희생정신에 대한 존경심이.... 그래서 엄마 양말은 더 꼼꼼하고, 더 세심하게 작업했던 것 같다.
그리고, 티 나지도 않았겠지만, 더 예쁘게 하려고, 신경 썼다. 엄마는 알려나?
엄마 보고 싶다.
내 엄마여서가 아니라, 존경하는 사람으로서의 엄마!
그 사람이 보고 싶다.
사람에게는 감출 수 없는 세 가지가 있다고 했다.
감기, 가난, 그리고 사랑!
구멍 난 양말도 있다 생각했는데, 그건 가난의 범주에 넣어도 될 것 같다.
먹을 게 많지 않아 잘 못 먹기도 하고(치킨을 대학 들어가서 처음 먹어보았다), 새벽에 우유배달하느라, 감기도 자주 걸렸던 것 같다. 그러니 감기도 가난의 범주에 넣어도 될 것 같다.
가난하기에 서로 의지하고 기댈 수밖에 없었던 엄마와 자식들!
그러니 사랑도 가난에 넣어도 될 것 같다.
그러면...
사람에게 숨길 수 없는 것은 한 가지인가? 가난?
부자여도 감기에 걸릴 수 있고, 사랑할 수 있으니, 그건 아닌 것 같고...
모르겠다.
그냥 '구멍 난 양말'은 절대 숨길 수 없는 것은 확실하다.
친구 집에 놀러 가는데, '양말에 구멍 났는데 어쩌지?' 하며 가는 내내, 불안해했던,
신발을 벗으면 들키지 않게, 구멍 난 쪽을 당겨서 발가락 밑으로 욱여넣던, 그렇게 내내 엄지발가락에 힘을 주며 구멍 난 양말을 들키지 않으려 애썼던 소년은 이제, 흰머리가 나고, 서랍을 열면 양말이 30켤레쯤은 있는 중년이 되어 있었다.
구멍 난 양말에 부끄러워하지 않는, 오히려 옛날을 회상하며 인간성을 고양시키는 제법 괜찮은 어른이 되어 있었다.
바느질 통을 찾아야겠다.
회색 실을 찾고, 적당한 길이로 잘라 낸 다음,
실 끝을 입에 넣어, 입술을 오므려 끝을 뾰족하게 만들어야겠다.
바늘을 왼손에 잡고, 45살 이후에 찾아온 노안 덕에 미간을 찌푸려 초점을 맞춘 다음, 바늘귀에 실을 넣어야겠다.
실의 두 끝을 모아 매듭을 지어야겠다.
그렇게 바느질을 시작해야겠다.
내 삶도 그래야겠다.
작은 일들에, 힘든 일들에, 불편한 일들에 양 끝을 잡아 매듭을 짓고,
그렇게 내 인생의 바느질을 시작해야겠다.
치유하는 삶을 위해!
수정하는 삶을 위해!
고쳐지는 삶을 위해!
무엇보다,
버려지지 않는 삶을 위해!
아주 가끔씩 찾아오는, 오늘 저녁에도 '안녕!'하고 찾아온 공황발작에 지지 않는 삶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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