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 연결 포트는 RGB가 아니라 HDMI(high definition multimedia interface) 맞지요?”
이렇게 너무 당연하고, 아무렇지 않게 말을 해왔다.
도대체 RGB는 무슨 뜻일까? 최근에 알았다. 말이 돼?
놀랍게도(적어도 내게는) Red, Greeen, Blue의 줄임말이다. 빛의 3원색 되시겠다.
중학교 미술 시간에 빛의 3원색을 배운 기억이 있는데, 3원색이라 함은 빛의 기본이 되는 1차 색을 의미한다.
그림에서 보다시피,
빨강 빛과 녹색빛을 합하면 노란빛이 되고, 녹색 빛과 파랑 빛을 합하면 청록 빛이 되고, 빨강과 파랑 빛을 합하면 자홍 빛이 된다. 여기 노랑, 청록, 자홍을 2차 색이라고 한다. 놀라운 것은 이 빛의 2차 색들이 색의 3원색이라는 것이다.
중학교 선생님이 이렇게 작동된다라는 것을 알려주면 좋았을 텐데… 몽둥이 들고 무조건 외우라고만 했었다.. 그 시절이 새삼스럽다.
빛의 3원색은 RGB이지만, 색의 3원색은 빛의 2차색인 노랑, 청록, 자홍이다. 영어로 Yellow, Cyan, Magenta!
왜 빛의 3원색과 색의 3원색이 다른 걸까?
그 이유는 나뭇잎에서 찾아볼 수 있다.
중학교 때 생물시간에 배운 것을 소환!
나뭇잎이 녹색인 것은 다른 색깔의 빛은 다 흡수해 버리고, 녹색만 반사하기 때문이다.
빛은 태양이나 전구 같은 발광체에서 직접 나오는 것이지만, 물체는 반사되어 오는 빛이다. 그래서 빛의 3원색은 1차색이고, 색의 3원색은 빛의 2차색인 것이다. 아! 명쾌하다.
이제 놀라운 점을 설명할 차례이다.
빛의 3원색을 모두 합하면 하얀색이지만, 색의 3원색을 모두 합하면 검은색이 된다. 이렇게!
진짜 신기하지 않은가?
나만 신기한가?
설명한 김에, 하나만 더 설명해 보자.
보색이라는 개념이 있다. 반대편에 있는 색이라 생각하면 쉽다. 아니나 다를까 그림에서도 서로 맞은 편에 있다.
빛의 3원색을 보자!
녹색 빛의 보색은 자홍색 빛이고, 파랑 빛의 보색은 노랑 빛이고, 빨강 빛의 보색은 청록 빛이다. 이 보색들을 서로 합하면 하얀색이 된다. 빛은 반대되는 색깔과 합해지면 하얀색이 된다. 밝아지는 것이다. 빛이 밝은 이유인 건가?
바로 이 점을 놓치지 않고, 그림에 적용한 이들이 있었으니…..
마네, 모네, 드가, 르누아르로 이어지는 인상파 화가들이 바로 그들이다.
인상파 화가들이 등장하기 전에는 성화 중심, 정확한 원근법 중심, 어둡고 무겁고 근엄한 느낌을 주는 그림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고 한다. 인상파 화가들은 빛의 3원색과 색의 3원색의 차이점을 이용해 기존의 그림들에 정면으로 대항한 것이다. 물감(색)은 섞으면 검은 색으로 수렴하기에, 팔레트에 물감을 섞는 방법을 포기하고, 대신, 캔버스에 색들을 나란히 배치시켰다고 한다. 팔레트에 물감을 섞지 않다니... 현명하다.
알고 보니까 신기하다.
특히 빛의 3원색에서 보이는 보색들을 나란히 배치시켜 흰색으로 보이게 한 것이다. 쉽게 말해, 섞지 않고, 빛을 돋보이게! 더 쉽게 말하면, 색으로 승부한 것이 아니라, 빛으로 승부! 바로 이것이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이 보여주는 특유의 밝음, 경쾌함의 이유이다. 모네의 그림 ‘수련’을 보자.
레드, 그린, 블루가 보이지 않는가?
빛의 3원색과 그것을 합했을 때 하얀색이 된다는 것, 팔레트에 물감을 섞지 않고, 캔버스 위에 보색을 대비시켜 밝음을, 환함을 나타내려 한 것이 이제야 보인다. 알고 봐서 그런가?
그림이 훨씬 더 친근하게 느껴진다.
“이제 알겠어?”라고 내게 말을 걸어오는 듯하다.
지베르니에서 틈만 나면 정원에 만들어 놓은 연못에 나가 빛을 탐구하던 모네의 흥분과 초조함이 느껴지는 듯하다.
8월쯤이려나?
너무 뜨겁지 않은 오후 다섯시쯤일까?
제법 바람이 선선하고, 그 바람이 구름을 스치고, 그 구름이 연못에 미소 짓고, 이를 배경으로 연못 위에 살랑이는 쨍한 수련들….
아!
모네는 얼마나 좋았을까?
얼마나 짜릿했을까?
얼마나 두근거렸던 것일까?
얼마나 평온했던 것일까?
아니다. 평생 빛을 탐구하기에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는 자신을 보며 ‘뭔가를 얻으려면 뭔가를 희생해야 한다’는 사실에
얼마나 서글펐을까?
결국 ‘더 귀한 것을 얻는 것이기에, 잃어버린 다는 것은 슬픈 일이 아니다’라는 사실에 얼마나 안도했을까?
더구나 ‘수련’은 자신의 부인과 맏아들이 죽고 난 후에, 그리기 시작한 작품이 아니던가!
‘사는 것은 고통이다’라는 그의 절절함이, ‘이제 더 이상 미련을 가질 것도 없고, 세상사 다 부질없다’는 그의 내려놓음이 연못 위의 빨간 수련에서 출렁인다.
비로소 작품에서 작가의 마음과 영혼이 읽혀지고, 느껴진다.
극강의 슬픔을 거부하다가, 받아들이다가, 승화하던 노화가의 애절함이라니...
곧, 파리행 비행기표를 끊어야겠다.
샤를 드 골 공항에 내려, 에펠탑이 보이는 시내에서 1800년대에 화가들이 모여 이야기 나누던 어느 카페를 찾아 크로와상에 따듯한 커피 한잔을 마시고, 생 라자 기차역에서 지베르니에 가는 기차를 타야겠다. Vernon Giverny 기차역에 내려 다시 버스를 타고, 모네 생가로! 버스에서 잔잔히 몰려올 흥분과, 가슴 깊은 곳에서 느껴질 묵직함을 충분히 느껴야겠다.
그 정원의 연못에 모네가 바라보았을 바로 그 파란 하늘이 있기를 희망한다.
그 정원의 연못에 모네에게 손 흔들던 녹색의 나무들이 있기를 희망한다.
그 정원의 연못에 모네를 진정시켜주던 빨간 수련이 있기를 희망한다.
그 정원의 연못에 그 빛에 반사되던 하얀 구름이 있기를 희망한다.
그 정원의 연못에 하얀 구름을 인도하던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산들바람이 있기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