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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봉인희 Sep 28. 2024

케이크와 샤인머스캣

도망이라는 시작

도망은 세상의 끝이 아니다. 인생의 낭떠러지가 아니다.

도망은 최후의 수단이라고들 한다. 어떤 이에게 도망은 최후가 아니라 최선의 수단일 수 있다. 지구온난화로 봄이 오는 걸음이 늦춰진 시대, 겨울도 봄도 아닌 애매한 2023년 2월의 마지막 날 퇴사했다. 아침에서 점심까지는 버틸만한데 점심에서 저녁 사이는 만만치 않다고 매일 체감하던 때였다. 정해진 시간에 삼시 세끼를 먹는 규칙이 직장 생활의 생산성 효율화을 위해 정착된 문화일 수 있다는 말에 깊이 공감하고 있던 중이기도 했다. 도망이라는 이름의 시작이었다. 회사라는 비좁은 집을 뛰쳐나오자 하늘로 솟거나 땅으로 꺼지거나 앞으로 계속 걸어 나가는 선택지가 주어진 랜덤게임 같은 인생이 시작되었다. 비행기를 타고 하늘로 솟아 엄마와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고 이불에 눌린 채 빈둥거리며 땅으로 숨기도 했다. 자유로움을 만끽한 시간들이 일하는 나를 충분히 격려해 주었으므로 일도 성실하게 했다. 경험해본 바에 의하면 도망친 사람은 겁쟁이가 아니다. 용기 있는 결단을 내린 멋쟁이에 가깝다. 나라는 멋쟁이는 회사로부터 도망친 지 일 년 반이 넘었다. 올해는 공유 사무실에서 독립 사무실로 이사를 해서 무거운 월세를 짊어진 멋쟁이가 되었다. 과일을 안 좋아하던 내가 오늘 유독 케이크보다 샤인머스캣을 달게 느끼는 것처럼 예측할 수 없는 변덕을 실컷 부려대는 삶이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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