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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rry Mar 14. 2020

(5) 정수와 함께 한 화요일

신년회 최대 수혜자

베를린에서 다름슈타트로 돌아오는 기차는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만석으로 사람도 많은 데다 기차 통로까지 빼곡한 짐들 때문에 나에게 허락된 공간은 고작 0.5 평방미터 정도밖에 되지 않았고, 꼼짝없이 자리에 앉은 채 해가 져가는 모습을 보며 천천히 흐르는 시간을 느끼는 것은 심리적으로 힘들었다.


 하지만 가장 힘들었던 것은 내 옆자리에 앉은 청년의 구취였다. 그는 깨어있을 때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어 통화를 멈추지 않았고, 잘 때는 천장을 응시하며, 입을 벌리고 호흡한다. 감각이 무뎌질 만도 하지만 나의 예민한 후각세포들은 더욱 예민해졌으면 예민해졌지, 4시간 동안 단 한순간도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우리보다 한 정거장 앞서 내린 그는, 내리기 직전, 고문으로 피폐해진 나에게 해맑게 인사를 건넸다. 그는 정말 피도 눈물도 없는 고문관이었다.


 당연하게만 여겼던 산뜻한 공기를 되찾자고 나서야 다시 또렷이 생각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사실 당장 침대로 뛰어들어 쉬고 싶은 마음이지만 아직 할 일이 남았다. 김정수는 내일 떠나기에 오늘이 신년회에서 경품으로 탄 마라탕 쿠폰과 영화표를 사용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기 때문이다.


 캐리어를 끌고 곧장 마라탕 가게로 향했다. 중국에서 온 정수는 마라탕에 큰 감흥이 없었고, 오히려 마장 소스를 찾으며 주인장의 허를 찔렀다. 그 이후로 소스 종지와 각종 소스를 제조할 수 있는 공간이 생긴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다음은 영화관이다.  3D로 상영하는 영화는 아쿠아맨밖에 없었는데, 독일인들은 쓸데없이 부지런히 독일어 더빙을 마쳐놓았다. 방금 프라이팬에 설탕을 녹여 코팅한 듯한 팝콘과 콜라를 사서 안으로 들어갔다. 선명하게 들리는 엄마, 아빠 소리에 인물들의 가족관계는 파악할 수 있었지만, 나머지는 우리에게 그림책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2주라는 시간이 이렇게 빨리 흘러가버린 것이 야속하기만 하다. 마지막까지 브레첼, 베를리너, 커리부어스트를 먹이며 마지막까지 독일을 느끼게 한다.

 공항에서 게이트를 묻는 우리에게 직원은 뛰어가지 않으면 비행기를 놓칠 거라는 조언을 해줬고, 그랬기에 담백하게 헤어질 수 있었다. 보안 수색을 하러 가는 그의 뒷모습을 마지막으로 쓸쓸히 집으로 돌아간다. 오늘은 유난히 추운 날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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