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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쪼하 Jul 19. 2023

안드로이드는 암호화폐를 꿈꾸는가

쪼하의 독서 이야기 - 인문학 책에서 암호화폐를 발견하다

"선이는 모든 장기에 가격을 책정했다(그리고 그 가격은 날마다 변동했다). 예를 들어 안구를 백이라 하고, 다리를 사십이라 하면 둘의 교환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래서 선이는 안구를 내놓은 이에게 육십의 저축이 남아 있다고 기록된 장부를 보여주었다. 만약에 안구를 내놓은 휴머노이드에게 다른 필요, 예를 들어 수술비 같은 것이 발생할 때, 그는 그 돈을 인출해 사용할 수 있었다. 따라서 만약에 선이가 죽거나 심하게 다칠 경우, 모두 손실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 <작별인사> 본문 중, 김영하

챗GPT로 인해 인공지능(AI)에 대한 관심이 최고조에 달한 요즘 시기에 지인이 추천한 책은 데이터 분석 입문서도 AI 개념 설명서도 아닌 한 권의 소설이었다. 그는 그 책을 읽으면 '왜 AI가 인간을 대체할 수 없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라 했다. AI는 절대 인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김영하 작가야 원래부터 좋아하기도 했고(대학 시절 <아랑은 왜>, <살인자의 기억법>, <오빠가 돌아왔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등을 감명 깊게 읽었다.) AI 기술 자체보다는 AI가 인간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가 더 궁금했기에 당장 <작별인사>를 주문했다. 


그런데 정작 소설의 전개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 부분이 눈길을 끌었다. 주인공 중 하나인 '선이'가 안드로이드 수용소 안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를 소개하는 장면이었다. 내가 보기에 선이의 생존 전략에는 바로 인류 경제 시스템의 과거, 현재, 미래와 연결되는 지점이 존재했다.


우선 인류 경제에 화폐가 생기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자. 우리는 경제나 역사 시간에 "인류의 경제 시스템은 물물교환에서 시작됐다"라고 교육받는다. 그리고 흔히들 부채와 신용 등의 개념은 근대에나 등장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부채, 첫 5000년의 역사>를 저술한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이 주장을 강하게 부정한다. 오히려 부채야말로 가장 먼저 등장한 개념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부채, 첫 5000년의 역사>에 따르면, 고대 인류에게 물물 교환은 믿을 수 없는 이방인들과 거래에서나 쓰였다. 그들에게 물물 교환은 거래이자 이방인과의 교류에서 긴장감을 해소하는 장치였다. 


그렇다면 왜 물물 교환이 한 번 보고는 다시 볼 일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일어났을까? 답은 간단하다. 모든 물건의 가치가 동등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그 가치를 정확하게 측정할 수단(이것이 나중에 '화폐'라는 개념으로 등장한다)도 없었다. 그들 사이에는 가치의 간극을 메울 신용뿐 아니라 그 내역을 기록할 장부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만약 서로 물건을 교환한 후 뒤늦게 자신이 받은 물건의 가치가 상대방에게 건넨 물건보다 낮다고 해도 불만을 제기할 수 없을 남에게만 허용되는 거래 방식이었던 셈이다. 춤과 음악, 맛있는 음식들이 그런 비합리적인 일을 가능하게 했다. 이방인과의 물물 교환은 꼭 잔치와 함께 진행됐다.


정작 이웃 간의 거래에선 부채(또는 외상)가 빈번하게 발생했다. <부채, 첫 5000년의 역사>는 다음과 같이 고대 인류의 거래 행위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헨리가 조수아에게 다가가 "멋진 구두로군!"이라고 말한다. (중략) 조수아가 이튿날 헨리를 찾아 여분의 구두를 선물하면서 순전히 이웃사촌의 정이라고 고집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조수아는 '외상'을 준 셈이다. 헨리는 조수아에게 구두 한 켤레를 빚졌다. 그렇다면 헨리는 어떤 식으로 조수아에게 빚을 갚을까? 헨리는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에 조수아에게 감자를 전하면서 선물이라고 말한다. 아니면 1년 뒤 조수아가 잔치를 계획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헨리의 농장에서 "멋진 돼지로군"이라고 말한다. - <부채, 첫 5000년의 역사>, 데이비드 그레이버

소규모 공동체에서는 위와 같이 이웃 간의 훈훈한 부채를 토대로 한 경제 시스템이 잘 작동할 것이다. 그러나 그 공동체가 도시가 되고 국가가 된다면 누가 어떤 물건을 얼마나 외상을 받았는지 적어둘 필요가 있다. 또한, 장부에 기입된 내용이 제대로 맞아떨어지는지 확인하기 위해 물건들의 가치를 측정할 수단도 필요해진다. 그렇게 장부와 화폐의 개념이 외상 이후에 등장한다. <작별인사>의 선이처럼 화폐를 유통하고 장부를 관리할 주체도 있어야 한다. 


오랜 역사 동안 대표적인 화폐는 금, 은과 같은 귀금속이며 장부를 관리하는 주체는 금융 재벌들이었다. 심지어 왕이 있던 시기에도 로스차일드 가문 등 몇몇 금융 재벌들이 금융 시스템을 쥐락펴락했다. <화폐전쟁>에 따르면, 금융 재벌들은 19세기말 금, 은보다 법정화폐가 지배적인 화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후 법정화폐 발행권을 독점하는 연방준비은행법을 밀어붙였다. 금을 빌려주고 그 대출 이자를 받는 것보단 화폐 공급을 무한대로 늘렸을 때의 수익이 더 크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1913년 미국 '연방준비은행법'이 제정됐다. 연방준비은행이 '선이'가 된 것이다. 따라서 만약에 연방준비은행이 죽거나 심하게 다칠 경우, 모두 손실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1930년대 연방준비은행이 발행한 화폐의 양은 이미 금은 기반 화폐를 앞질렀고 이후 1971년 금본위제(통화의 표준단위가 일정량의 금 가치에 연계된 화폐 제도)가 폐지되면서 연방준비은행의 폭주가 시작됐다. 이후 2000년대 들어서자 연방준비은행만이 '선이'가 되어야만 하는 전제에 대한 의문들이 제기됐고 민간인이 발행할 수 있는 전자화폐를 모색하는 시도들이 나타났다.  


'선이' 혼자서 모든 장부를 거래할 때 심각한 문제가 있다. <작별인사> 속 '선이'는 그 이름만큼이나 선하지만 다른 '선이'는 악랄할 수 있다. 위에서 안구를 내놓은 안드로이드가 저축액 60 중 20을 다른 수술비로 지불한다고 치자. 정직한 '선이'라면 해당 안드로이드에게 40의 잔액이 남아있다고 기입한다. 그런데 뒷주머니를 찬 '선이'라면 20의 지불이 중복돼서 발생한 것처럼 조작해 실제로는 지불할 필요가 없는 20을 가져가고 안드로이드의 잔액은 20으로만 적을 수 있다. (최악의 경우 수용소를 폭파하려는 안드로이드에게 '선이'가 살해될 수도 있다.) 


이중지불 등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사라진 몇몇 전자화폐들과 달리 '선이'의 역할을 여러 사람에게 분산하자는 분산원장 개념을 도입한 비트코인은 새로운 화폐로 주목받았다. 비트코인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은 장부가 그렇게 중요한 개념인지 잘 모른다. 비트코인을 네트워크라는 광산을 잘 캐면 나오는 '디지털 금'으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서다. '안전자산'이라는 최근의 내러티브, 비트코인을 검색하면 나오는 금색 동전 이미지, '채굴'이라는 용어가 주는 어감 등이 오해를 낳고 있다. 


나 역시도 암호화폐를 제대로 공부하기 전에는 채굴이나 거래를 하면 비트코인(또는 그 조각 단위인 '사토시')이 직접 내 지갑으로 들어오는 줄 알았다. 마치 어린 시절 심부름을 하면 지폐가 손에 들어오는 것과 비슷하게 생각했다. 그렇기에 지분증명(PoS)이라는 합의 알고리즘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작업증명(PoW)처럼 암호화폐를 캐는 과정이 없는데 PoS 네트워크의 블록(일종의 암호화폐 거래 묶음) 생성자들은 이미 암호화폐를 보유하고 있고 보유한 비중에 따라 블록을 생성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다니?


국내 블록체인 업체의 대표님과의 스터디를 통해 그 질문을 해소했다. PoS 네트워크에서는 애초에 암호화폐공개(ICO, 일종의 프로젝트 론칭을 위한 모금 행위라고 보면 된다)에 투자한 사람들에게 암호화폐를 얼마씩 배분하겠다는 장부를 작성한다. 그렇게 장부 명단에 이름을 올린 사람들(정확히는 노드)이 블록 생성자로 활동한다. 이후 블록 생성으로 인한 보상 제공, 블록 생성에 실패했을 때의 벌칙(슬래싱; 자산 삭감) 등이 장부 상에서 이뤄진다. 


예를 들어, 내가 Z 코인 ICO에 참여해서 Z 코인을 100개 받았고 블록 생성자로 참여한다고 치자. 이 코인은 블록 생성에 성공하면 5만큼의 보상을 준다. 블록 생성에 실패하면 20만큼 차감된다. 활동을 시작하기 전의 장부에는 100개가 적혀 있다. 내가 열심히 10개의 블록을 만들면(+50) 내 장부에는 Z 코인 150개가 적힌다. 그런데 세 번이나 제대로 블록을 만들지 못했다(-60). 장부의 잔액이 90개로 수정된다. Z 코인을 갖고 싶어 하는 쪼만이에게 선물로 Z 코인 50개를 줬다(-50). 쪼만이의 장부에 50개가 기입되고 내 장부에는 40개만 남는다. 


한 마디로, 암호화폐 채굴(또는 PoS 네트워크의 검증)이나 거래 등은 <작별인사> 속 안드로이드들의 경제 시스템과 유사하다. 차이점은 '선이'가 단 한 명이 아니며, 글로벌 각지에 흩어져 있다는 것이다. 


현존 경제 시스템에서 비트코인 등 암호화폐를 실제 화폐로 받아들이려는 시도는 많지 않다. 그렇기에 비트코인의 대안 화폐 내러티브는 힘을 잃고 '디지털 금', '안전자산' 내러티브가 각광받고 있다. 하지만 인류가 안드로이드에 의해 멸망하면서 연방중앙은행의 현존 경제 시스템도 같이 붕괴한다면 어떻게 될까? 인류보다 네트워크 사용법에 더 친숙한 안드로이드들이라면 암호화폐를 더욱 발전시켜 지금과는 차원이 다른 경제 시스템을 구축하는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현존 인류가 법정화폐를 꿈꾼다면, 안드로이드는 암호화폐를 꿈꿀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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