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은 오로지 연민으로 버틴다.
쪼하의 인생 이야기
국문학도로서의 업적(?) 중 하나는 박경리의 장편소설 <토지>를 끝까지 읽은 일이다. <토지>는 20권으로 엮어진 장편소설로서, 웬만한 국내 장편소설 가운데 방대한 분량을 자랑한다.
2009년 대학교 입학을 앞두고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틈틈이 읽었고 한 번의 실패 끝에 마침내 마지막 권의 책장을 덮을 수 있었다. 처음에는 지루했지만 한 권 한 권 나이 들어가는 최서희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그녀와 함께 한 생애를 살아온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작가 박경리는 <토지>를 한 단어로 요약하자면 '연민'이라고 했다. 인간의 삶에 대한 연민이 펜을 들게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토지>의 인물들은 누구나 입체적이다. 마냥 선한 사람도, 마냥 악한 사람도 존재하지 않는다. 소설에는 힘겹게 살아가는 이들에 대한 작가의 연민이 배어있을 뿐이다. 육아를 하는 요즘, 박경리 작가의 그 한 마디가 내 뇌리를 맴돈다.
연애결혼을 했다지만, 연애 기간이 엄청 긴 편도 아니었고 결혼하자마자 임신을 했기에 결혼 후 즐거운 시간보다는 고통스러운 시간이 더 길었다. 서로를 그저 사랑스럽게만 바라보던 시간은 찰나에 불과했다. 물론 다른 누군가에겐 임신이 간절한 바람임을 알고 있으며, 알아서 잘 찾아와준 아이가 참 고마웠지만 임신과 출산으로 인한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런 나를 옆에서 지켜본 남편 역시 나와 비슷한 심정이었으리라. 남편이라고 옆에서 아내가 아파하는데 마냥 즐거웠을 리가.
출산하고 나서 남편과 연애하던 시절의 감정으로는 돌아갈 수 없음에 종종 마음이 무너지곤 한다. 사랑과 열정이 동력이던 시절은 다시 오지 않을 터다. 그렇다면 우리는 남은 세월을 무엇으로 버텨야만 할까.
'반반결혼'을 철저히 지키다 못해 냄비를 딱 절반만 닦는 장면을 담은, 풍자 영상까지 등장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둘이 같이 먹은 냄비니까 각자 절반씩 맡아야 공평하다는 얘기다. 굳이 그럴 바에는 다 닦아내는 게 속 시원하지 않을까 싶으면서도, 오죽하면 저럴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제는 이혼 위자료도 절반씩 분담해야 한다는 의견들도 나온다더라.
아예 못할 법한 일도 아니다. 누군가 요리를 하고, 다른 이가 설거지를 하면 어느 한쪽이 손해보지 않을 수 있다. 둘 다 맞벌이를 하니까 집안일도 공평하게 나누자는 주장은 일견 합리적인 듯하다. 문제는 육아다. 아이의 컨디션에 따라 육아의 난이도가 굉장히 달라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저녁부터 새벽까지는 아내가, 새벽부터 아침까지는 남편이 각각 4시간씩 돌본다고 치자. 시간상으로는 공평하다. 그런데 아이가 배앓이를 하느라 저녁부터 새벽까지 자지 않고 내내 보챈다. 남편이 바통을 이어받자마자 지친 아이는 푹 잠들어 버린다. 분명 같은 시간을 투입했는데 한쪽은 녹초가 되고 다른 쪽은 살만해진다. 만약 그 상태가 일주일 넘게 이어진다면 아내는 번아웃이 오게 된다. 그럴 때 남편이 "나도 4시간을 육아했으니 공평하다"라고 주장한다면, 그 결혼은 유지되지 못한다.
이럴 때 힘을 발하는 게 연민이다. 남편이 아이의 배앓이 또는 잠투정으로 녹초가 되어버린 아내를 안쓰럽게 여긴다면, 본인에게 할당된 시간보다 추가로 아이를 봐주게 된다. 반대로 남편이 며칠 동안 야근으로 지쳐있다면 이를 딱하게 여긴 아내가 좀 더 오래 아이를 볼 수도 있다. 잠깐은 손해 보는 듯하지만 그 연민이 결혼을 지탱하는 힘이 된다.
나와 남편, 둘 다 육아로 치이고 있기에 둘 사이에 사랑이란 감정이 피어날 틈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또한, 직장에서 승승장구하는 남편과 달리, 집에서 아이를 돌보며 남편이나 기다리는 내 신세가 처량했다. 나는 집안일과 육아를 하느라 바쁜데 업무 관련 공부를 하는 남편이 부럽기도, 질투 나기도 했다. 그러다가도 뒤처지지 않기 위해 틈틈이 공부를 해야 한다던 남편의 말이 가장의 무게처럼 내 가슴에 무겁게 와닿아서 짠해지기도 했다. 남편은 내가 고관절 통증으로 다리를 저는 모습에 "상이군인 같다"며 가여워했다. 이런 마음 역시도 사랑인 걸까.
"사랑은 가장 순수하고 밀도 짙은 연민이에요."
-박경리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