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을 저주라 느끼는 사람들
※영화를 봐야 아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내면의 열등감과 피해의식, 자조를 마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 영화를 본 것은 참 신기한 우연입니다.
영화는 수위가 굉장히 높고 선정적이지만 관람을 마친 후 감독인 라스 폰 트리에의 자조/자전적인 영화라 느꼈기에 영화의 자극적인 연출에 크게 동요하지 않고 관람할 수 있었습니다.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필모에서 늘 염세적이고 우울하기만 했던 감독은 어쩌면 그 우울과 염세 자체에 회의감을 느꼈는지 모르겠습니다.
스스로를 기술자, 건축가라 말하지만 제 몸 누일 작은 집 한 채를 평생 완성하지 못하고, 조잡한 자기만의 역겨운 예술에 빠져있으나 그 마저 천운과 무수한 우연이 겹쳤기에 간신히 연명할 수 있었던 주인공 살인마 잭에서 스스로를 투영한 감독의 모습이 느껴졌습니다. 사람의 재능은 제각각이라지만 사랑받는 재능과 별로 사랑받지 못하는 재능이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사랑받고 싶다". 창작자라면 가지고 있을 당연한 성취를 이루기 위해 자신의 무능과 재능 사이에서 갈등하며 달려온 사람에게 이 사실은 참 무심한 벽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하지만 이 벽의 높이는 어쩌면 스스로 쌓아 올리는 것일지 모르겠습니다. 비교를 통해 말이죠. 비교한다는 것은 자신과 타인을 함께 인식해 저울질하는 행위이고, 비교의 주체인 자아는 결국 타인을 통해 인지되는 개념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남과 비교해 자신을 깎아내리는 행위를 멈추는 건 퍽 어려운 일인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 영화의 맹점이 바로 이 지점인 것 같습니다. "아직 해결법을 찾지 못한", "빛나지 못하는", "안갯속을 걷는 기분을", "자기 연민에 빠짐과 동시에 오히려 그런 연민을 경계하는", 이런 애매한 개념들에 갇혀버린 감정들을 자조하는 극이었다는 것이 영화를 관람한 후 든 생각했습니다.
한 번이라도 창작과 관련된 일을 한 경험이 있다면 이 기분을 아주 잘 알고 있을 겁니다. 내게 부족한 것은 재능인지, 노력인지. 재능은 아무에게나 있는 것이 아니니 당연히 노력이겠거니 미루어 짐작하곤 더욱 자신을 채찍질하기도, 포기하기도 합니다.
이 영화에서 감독이 보여주는 이야기는 위와 같은 내적 갈등을 겪고 그런 자신을 체념 혹은 수용하게 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재능의 유무를 사이코패스와 일반인이 지닌 감정의 유무로 비교하고, 천국의 문턱 앞에서 지옥의 가장 밑바닥으로 추락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면 감독의 좌절과 상실, 무력감은 컸던 것 같습니다.
영화 내적으로 주인공은 정말로 연쇄 살인범입니다. 게다가 꽤나 악질적인 인물이죠. 영화 속에서 주인공은 여러 차례 범행에 성공하는데 이는 대부분 우연과 (주인공 입장에서의) 행운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트리에 감독이 자신이 감독한 영화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굉장히 날 선 방식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한편 감독 스스로 재능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앞서 말한 사랑받는 재능과 사랑받지 못하는 재능 중 후자 쪽에 속하는 재능이 있다고 여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 감독의 전작품들을 보면 일리 있는 추론이라 생각됩니다. 반골, 비주류의 길을 걷는/걷게 된/ 걸을 수밖에 없는 재능을 타고난 사람의 한탄 같다는 것이 저의 감상입니다.
영화 내적인 점을 보자면, 트리에 감독이 늘 하던 방식의 결과물이었습니다. 혐오스럽고 기괴하고 반인륜적이고 범죄적인 이 영화의 비주얼은 솔직히 누군가에게 추천하고 싶지 않은 내용들로 가득했지만, 우울해 보이는 감독이 만든 이 괴상한 영화는, 다른 좋은 영화들에서는 받기 힘들고 설명하기도 어려운 묘-한 감정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이 특징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리뷰를 마치고 검수하다 보니 "재능"이라는 말이 많이 나오면서도 그 사용 방식이 명확지 않은 것 같아 덧붙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재능이란 "누구나 하나쯤 가지고 태어나는 것"입니다.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재능으로는 입시 공부를 잘하는 재능, 운동을 잘하는 재능, 계산을 잘하는 재능, 언어 능력이 뛰어난 재능 등이 있습니다. 학교라는 공통된 집단을 거치는 오늘날 쉽게 접할 수 있는 재능들이죠.
하지만 쉽게 밝혀지지 않는, 발견하기 어려운 재능도 있을 것입니다. 일상적인 상황에서는 발현되기 힘든 재능들 말이죠.
사람은 본능적으로 대다수의 긍정적임과 아름다움에 이끌리지만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재능은 소수의 부정적인 개념과 사실을 조명할 수 있는 능력. 그리고 그것을 영화라는 매체로 옮겨 담을 수 있는 상상력과 능력이 아닐까 합니다. 위 리뷰는 그 재능으로 인해 조금은 덜 대중적인 영화를 만든 트리에 감독이 스스로의 재능을 자조하며 만들어진 영화가 아닐까? 하는 추측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앞선 추신에서 밝힌 재능의 정의는 개성이란 말로 쉽게 표현이 가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맥락상 좀 더 특별히 선사받은 타고난 능력이라는 느낌을 주고자 재능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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