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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배 Oct 19. 2020

연애를 이 소설로 배우는 것도 괜찮아요.

노르웨이의 숲 리뷰



노르웨이의 숲

저자: 무라카미 하루키

출판: 민음사

발매: 2017.08.07.



이 책을 스무 살쯤 내가 제대로 된 연애를 시작하기 전에 읽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 편의 연애 지침서 같았다.


철없이 연애를 하고 있는 이에게, 혹은 사랑이라는 감정을 잘 분간하지 못하는 이에게 모두 도움이 될 것 같은 책이다.


내 삶에 다 한 명씩 있는 사람들이었다.

내 주변엔 나가사와는 너무 흔해서 지금 즉시 꼽아서 전화할 수 있을 정도이다.

(친구들이 연애사에 있어서 만큼은 정말 올바르지 않다.)

내 친구의 전 여자친구는 하쓰미 같았다.

우리는 매번 저 쓰레기랑 왜 계속 만나냐고 되물었다.

하다못해 특공대 같이 극도의 순수함을 지닌 이도 주변에 한 명쯤 있지 않은가.


이 책은 가벼운 연애의 무게감은 타인에게 무겁고, 무거운 연애의 무게감은 오히려 타인에게는 가벼울 수도 있다고 말하는 듯 했다.


나가사와의 기적의 논리, 발정 난 시스템이 초래한 하쓰미의 비극은 전자를 말했다.

나오코의 죽음으로부터 레이코와 함께 죽음의 이유를 알아가는 과정은 후자를 말하는 듯 했다.

실제로 와타나베의 무거운 책임감, 사랑은 큰 관여를 하지 못 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시사점은 젊은 연애에서 흔히 범하는 사랑과 책임감에 대한 오해이다.

정확하게는 어떤 말이 좋을까.


그렇다. 사랑해서 사랑하는 것과 사랑하는게 옳아서 사랑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전자가 미도리에 대한 사랑이었다면, 후자는 나오코에 대한 사랑이다.

와타나베가 서두에서 말했듯 나오코에 대한 사랑은 실제로는 사랑이 아니었다.

젊은 시절에 흔히 범하는 자신의 감정에 대한 오해이다.



어떻게 보면 사회적인 맥락이라 할 수 있겠다.

이 정도 관계를 이 정도 지속했으면 사랑하는게 맞으니까.

청춘의 사랑은 그런 규범에 굴복해 억지로 사랑을 하고는 한다.



이러한 도덕적 사랑은 절정에 다다라서 때론 비극적 결말을 낳고는 한다.

와타나베의 내적 갈등이 그랬다.

자신이 품었던 미도리에 대한 감정을 죽음의 이유와 연관 지어버렸다.



그렇다면 와타나베가 일찍이 자신의 감정이 사랑이 아니었음을 알아야 했을까? 그것도 아니다.

레이코의 말처럼 일찍부터 고백했으면 나오코는 더 큰 슬픔 속에서 생을 마감할 당위성을 부여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와타나베의 감정 처리 방식은 옳았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지만 책임감이 있었고 신중했다.

아니 어렸을 때는 그것이 사랑이 아닌 줄 몰라서 그랬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 처리 과정은 대단히 어른스러웠다.

그 이후로는 와타나베가 사랑이란 감정을 명확히 구분했을 것이다.



요지를 정리하면, 일단 발정 난 시스템은 지양하라는 점.


자신의 사랑이 사랑이 아님을 깨닫았을 때, 그 해결은 대단히 신중하라는 점이다.


와타나베가 미도리와 즉각적인 관계를 가졌다면, 급격하게 다시 회복 국면을 맞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감정의 완전한 정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와타나베는 모두에게 말했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 ‘복잡해’. 이 복잡한 사랑에 대한 고찰을 했고, 몇 십년이 지난 후 명확한 감정을 알게 되었다.



내가 하는 사랑은 나도 명확하게 모른다.

그 사랑이 상대방에게 가지는 무게감 또한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 신중하고 또 신중해야 한다. 배려하고 또 배려해야 한다.



와타나베의 스무 살의 사랑은 여느 어른의 사랑보다도 성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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