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그린북 리뷰
감독 피터 패럴리
출연 비고 모텐슨, 마허샬라 알리
개봉2019. 01. 09.
미국 남부에 대한 이야기, 우리의 감수성에 대한 이야기.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 감수성
우리가 사랑하는 '후라이드 치킨'은 사실 흑인의 음식이었다. 미국 남북이 갈라져 있던 시절 흑인 노예들은 닭고기를 튀겨 먹기 시작했고, 그것은 흑인들의 소울푸드로 자리매김했다. 그렇게 유색 인종인 우리들의 소울푸드가 되었다.
이 영화에서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은 그 상징성을 노출시키기 위해 등장한다.
셜리 박사는 뉴욕에서 성공한 흑인 피아니스트이다. 하지만, 위험할수도 있는 남부로의 여행을 강행한다. 그리고 백인인 발레롱가를 데려간다. 그 또한 백인이지만, 미국에서는 그리 좋은 대접을 받지 못 하는 이탈리아 사람일 뿐이다.
공연을 위한 긴 여행을 떠나던 중, KFC를 만나고 발레롱가는 치킨을 사지만 최초에 셜리 박사는 거부한다. 계속된 강요에 그는 결국 프라이드 치킨을 먹게 되고 그렇게 우리는 인종 간 융화를 경험하게 된다. 백인이지만 사랑받지 못한 그, 성공한 흑인이지만 타지에서 사랑을 강요해야 하는 그. 동일하게 즐겼으면 하는 평범한 문화.
인종 간 감수성이란 그런 것이다.
우리는 후라이드 치킨을 먹으며 그것에 어떤 슬픔이 담겨 있을지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반대편 누군가는 그것에 숨겨져 있는 역사적 슬픔을 느끼고 있을 수 있다.
우리가 일제 강점기에 슬퍼하며 역사적 슬픔을 느끼는 것과 KFC의 슬픔을 느끼는 것을 동일시 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은 무엇일까.
피해에 대한 감수성이란 당연히 그것을 받은 이에게 크게 작용할 수밖에 없다. 우리들이 느끼는 차별은 일상에 가장 가까운 것에서 일어날 수 있다. 영화 속 그들이 그랬듯, 흑인이 흥겨운 음악을 연주할 땐 위스키가 피아노 위에 있어야 할 것 같으며, 치킨을 즐겨야 할 것 같으며, 3피스 양복은 어울리지 않아야 할 것 같은 것들 말이다.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을 먹으며 슬퍼해야 할 사람이 있으리라 생각해야 하는 것, 그것이 피해 받은 이에 대한 감수성이란 말이다.
표현과 타인의 고통
감수성을 이제 조금은 구체적 표현으로 엮어 보고 싶다.
영화에서 내가 극적으로 생각한 포인트는, 발레롱가가 '깜둥이' 란 표현에 대해 초반엔 넘기다가 후반부 크리스마스 이브 파티에서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말한 것이다.
우리의 감수성은 상대방의 감성적 슬픔에 의하여 학습되어 진다. 가령 우리 사회에서 흑인을 '투탕카멘'이라 불렀던 기억이 있다. 그것을 당연하게 여겼던 시기에는 우리가 슬픔이라 여기지 못했을 지언정, 지금은 절대로 입 밖에 자유로이 내뱉어선 안되는 말이라 생각할 것이다. 흑인들에게 그것이 상처가 될 말이란 것이 점점 더 학습되었기 때문이다.
영화는 그러한 슬픔과 고통에 대해서 점점 더 구체적으로 말해준다. 그들이 어떻게 술집에서 술을 먹을 수 있게 되었는지, 그들이 어떻게 레스토랑에 자유롭게 거닐게 되었는지, 그들이 어떻게 우리와 같은 호텔에서 자게 되었는지 말이다.
그들의 일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대단한 슬픔과 고통의 산물이다.
우리의 일상과 지금의 그들의 일상이 같다는 것에 맘편히 동조해야 될 것이 아니며, 그 속에 숨은 그들의 슬픔에 감수성을 지니지 않으면 더더욱 아니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지녀야 할 감수성이란, 그들은 그들의 일상이 우리의 지금과 같음에 '감사함'을 느끼고 있다는 것에 느껴야 할 공감이다. 누군가는 오랫동안 기다려왔을 동질감이다.
발레롱가가 2달 간의 여행을 통해 발전시켜 온 그의 철없는 감수성을, 2시간 남짓에 느껴볼 수 있음을 우리는 '감사해야 할'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