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전 손택의 타인의 고통을 읽었다.
타인의 고통
저자: 수전 손택
출판: 이후
발매: 2004.01.07.
솔직히 조금은 지루했다.
책의 전체를 파고드는 문체가 너무 한결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이러한 것을 발표했다.” “허나 이것이 이를 대변할 수는 없다, 이해할 이는 아무도 없다.”
하나의 선례(보통은 잔혹한 사진)를 보여준 후 결국은 완벽하게 이것이 어떤 상황을 표현해 줄 수는 없다는 것이 요지인 듯 했다. 강력하게 자신의 주장을 보여주는 모습을 찾기 힘들었다.
중간에 자주 보이는 부연 설명(특히, 괄호 처리)도 매끄러운 독서를 방해했다.
그렇게 힘겹게 힘겹게 마지막 장에 맞닿았을 때, 마지막 문장이 어느 정도는 나의 불만을 해소시켜 주는 듯 했다. 글쓴이가 책에서 최초로 보여준 강력한 주장이 아니었나 싶다.
“우리는 이해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다…(중략)…그리고 그들이 옳다.”
결국 우리가 어떤 타인의 고통이 깃든 사진을 볼 때, 우리는 절대로 그들을 100퍼센트 이해할 수 없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우리가 보는 것은 이미 게이트키핑을 거친 결과물이다.
또한, 보는 우리는 이미 너무 많은 이미지를 소비해 버렸다. 그러한 이미지에 둔감해져 버렸다.
이렇게 순수하지 못한 두 제공자와 수용자가 만났는데, 어떻게 그 사진 속 대상자들의 마음을 순수하게 이해하고 상상할 수 있냐는 것이다.
저널리즘에 대한 신랄한 비판으로 여겨졌다.
조금은 외람된 표현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마치 “아는 척 하지 마라.” 라는 것으로 느껴졌다.
어떤 이가 아무리 뛰어난 공감 능력을 지녔다고 한들 절대 공감할 수 없음을 인지하라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나는 이런 전체적인 메시지를 최근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거리감’ 이라는 개념과 연관 지어서 생각했다.
최근 유시민 작가의 ‘어떻게 살 것인가’ 를 읽던 중 보았던 말이다.
행복해지기 위해선 적당한 ‘거리감’ 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어떤 것에 너무나 큰 소속감을 느낄 때 그것이 마지막에는 불행을 줄 수 있다는 내용이다.
마치 이러한 자세를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면서 가지라는 것으로 느꼈다.
그러한 자세는 비록 우리에게 행복을 주지는 못 할지언정 사진 속 이들의 진심을 매도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멀찌감치서 그들의 고통을 바라볼 때, 우리는 우리의 무능력함을 알 수 있다.
그렇게 해야만 당사자들이 억울하지 않을 수 있다.
우리가 마치 그들을 이해하는 것 마냥 생각한다면, 당사자들이 오히려 더 불행해지지 않을까.
그 사진 한 장이 우리에게 다가오면서 있었던 수많은 과정에서 당사자들의 마음은 누락되지 않았을까.
“어떤 곳을 지옥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사람들을 그 지옥에서 어떻게 빼내올 수 있는지 …(중략)… 대답되는 것은 아니다.”
본문 중에 가장 인상 깊었던 말이다.
성숙한 이라면 타인의 고통을 보여주는 이미지를 볼 때 무릇 자신의 무능함을 알아야 한다.
매번 그들에게 환멸을 느끼는 것이 정도는 아니다.
오히려 반이성적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다.
그저 고통이 얼마나 많은지 자각을 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아는 척 하지 말자.
우리가 바라보는 것은 수정된 것이며, 우리는 사진 한 장에서 모든 것을 알아낼 수 있는 완벽한 동물이 아니다.
타인의 고통을 소극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오히려 윤리적일 수 있다.
새로운 공감을 배운 듯한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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