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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STAIN EATS Dec 06. 2019

우리의 민주주의를 염려하는 바입니다

파커 J. 파머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

탄생처럼 내 선택을 묻지 않고 주어진 것이 있다. 국적이라든가 가족, 성별 그리고 민주주의 같은 것. 여기에 민주주의를 포함시키는 건 물론 곧 수정할 내 얕은 생각일 뿐이고 지금도 홍콩에서는 내 또래들이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하고 있으며, 우리 부모님 세대에게도 민주주의는 공으로 얻은 게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민주주의는 누군가에겐 고귀한 피와 희생을 맞바꿔 쟁취한 것이지만 누구에게는 유산처럼 물려받은 것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전자든 후자든 민주주의를 딛고 사는 이상 그것을 보듬고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민주주의는 유기체인지 마치 오라면 가버리는 고양이 같아서 지금 내 손 안에 있다고 마냥 있을 것이라 안심할 것이 못된다. 때문에 우리는 사는 게 바빠도 가끔 민주주의의 안부를 물어야 한다. 민주주의를 염려하는 것은 마음 아픈 일이다. 군부 독재에서도 살아남았고 촛불로도 지켜냈으니 이제 괜찮으려니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게 만들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를 염려하는 행위는 우리에게 사적 영역에서 고개를 들어 주변을 돌아보라 손짓하는 행위이다. 그 손짓은 세월호의 상처를 잊지 마라 말해주기도 하고 의회에 갇힌 정치인들의 불통에 분노하라 부추기기도 하며, 수많은 미디어가 쏟아내는 과잉정보 속에서도 변별력을 잃지 말라 꼬집기도 한다.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의 저자 파커 J. 파머는 독자로 하여금 이렇게 민주주의를 염려하는 마음을 이끌어내는 것이 목표였나 보다.


파커 파머는 직업으로 말하자면 미국의 교육 지도자이자 사회운동가이고, 그저 사람으로 말하자면 이상과 폭력이 공존했던 혼돈의 1960년대부터 911테러로 처참히 열리는 21세기까지의 미국 현대사를 목격한 역사의 증인이다. (물론 후자는 그 시대 미국을 살아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자격이다.) 21세기 패권국이자 자유민주주의로 대표되는 미국의 국민으로서 그가 목격한 민주주의는 상흔의 집합이며 상처받은 사람들의 터전이었을 테다. 이런 역사를 걸으며 그가 찾은 민주주의를 갱신하기 위한 방법은 파편화되고 상처받은 사람들의 마음을 모으는 것이었다.


저자는 책의 전반에서 ‘민주적인 마음의 습관’을 길러야 한다고 거듭 강조하며 구체적인 방향을 제시한다. ‘마음’이라니 다소 감성적이고 현실과는 거리가 멀게 느껴진다. 그러나 저자는 정치의 분열이나 민주주의의 상처를 보듬는 데 마음, 특히 비통한 마음이 필수적이라 말한다. 


비통한 마음이라는 것이 무엇이기에. 


이는 우리 모두의 마음이다. 뜻과 다른 정치 상황에 절망한 사람의 마음이기도 하며 삶에 지쳐 공공의 영역을 내친 사람들의 마음이기도 하다. 그는 조각난 마음을 모아 상실된 공동체를 일으키고 분열을 보듬으며 민주주의를 직조해 가야 한다고 말한다. 이 과정 자체와 과정에 필요한 모든 것이 바로 민주적인 마음의 습관이다. 그는 민주주의 생태계를 이해하는 것을 시작으로 민주주의를 직조하는 데 필요한 마음과 환경은 무엇인지 촘촘히 짜맞춰간다. 시대에 관한 근원적 고민과 현실, 뉴미디어 시대(현재와 미래)를 모두 포괄하는 넓고 깊은 사유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애틋한 사랑과 염려를 느낄 수 있다.


그는 민주적인 마음의 습관을 기르기 위해 크게 두 가지를 강조한다. 첫째는 대중매체에 끊임없이 저항해야 한다는 것, 둘째는 서로 다른 의견을 내며 불협화음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런 태도가 모여 공적 영역을 수호하는 힘을 기르고 민주주의를 보듬을 수 있다는 것이다. 교실, 일터, 종교 공동체, 마을 등 우리가 몸담고 있는 모든 공적 영역을 활성화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는데, 이는 빤한 얘기 같지만 우리가 상실하고 있는 부분이 무엇인지 날카롭게 지적하는 바다.


우리가 정치에 무력해지고 그로써 민주주의가 위협받는 순간은 폭정이나 독재만이 아니다. 사적영역 수호를 위한 개인주의, 이기주의의 몸짓이 커질수록 공적 영역의 중요성과 역할은 쇠퇴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사적영역 수호를 위해 담을 쌓아 올리는 것은 궁극적으로 공적 영역에서 나를 내모는 결과를 낳는다. 사적인 층위와 정치적인 층위 사이에 위치한 이 공적인 층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속해있으며 역할과 의무를 지는 영역이다. 이 세 영역이 조화롭게 상호작용할 때 비로소 민주주의는 온전해질 수 있다. 공적 영역을 유지하는 데엔 낯선 이들과의 공존이 필수적이다. 서로 다른 의견이 어우러지는 우주. 저자는 이런 영역에서야 말로 우리가 ‘창조적인 형태의 인간 결사를 위협하고 훼손하는 뿌리 깊은 두려움을 넘어설 수 있다’고 말한다.


전체주의 잔해에서 '악'과 '정치적 인간'에 대해 고찰하였던 한나 아렌트

안팎의 삶에 관심을 두고 타자의 입장을 이해하고 공존하고 있음을 인식하는 것에서 비로소 정치 활동은 시작하고 민주주의는 생기를 얻는다. 이런 방법들은 한나 아렌트가 『인간의 조건』에서 정치적 인간, 즉 공적 영역에서의 시민에 대해 사유한 것과 방향을 같이 한다. 자유민주주의 미국의 정치학자와 전체주의를 거쳐 온 독일 철학자가 정치와 민주주의 수호의 필요조건을 동일하게 도출해낸 것은 가히 아름답고 희망적인 일이다. 역사에 지은 과오를 반복하지 않도록 길잡이가 되어주는 것만 같다.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은 정치와 민주주의에 대한 고찰임과 동시에 현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을 위한 치유와 처방이다. 우리로 하여금 내면의 상처를 자각하게 만들고 잊고 있던 공적 자리를 찾아가게끔 유도한다. 저자의 펜 끝은 이론이나 이상, 학술에 갇히지 않았기에 더 따뜻하고 현실적이다. 


민주주의에 발을 딛고 사는 사람들이라면 반드시 가져야 할 마음가짐, 즉 민주적 마음의 습관이 무엇일지 우리가 스스로 하나씩 되짚어가도록 유도하고 이 씨앗을 마음에 품도록 안내한다. 그 위대하고 거룩하게만 느껴졌던 민주주의 속에서 작게만 느껴졌던 개인이, 단순한 객체라거나 시민1, 시민2에 지나는 것이 아님을 일깨워주며 우리를 위로하는 책이다. 잊고 있었던 우리의 역할을 곱씹어보며 책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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