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근두근.
밤 열 시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처음 새벽배송 주문을 시도했다. 과일 몇가지를 주문해놓고 빈둥빈둥 브런치를 쏘다니는데 새벽 세시쯤 과일이 도착했다는 문자를 받았다.
노크도 없이 다녀간 기사님 덕분에 아침 일찍부터 과일을 맛볼 수 있었지만, 포도는 시들시들했고 멜론은 두 겹이나 포장이 되어 있어 쓰레기가 잔뜩 나왔다. 엄마는 "포도가 제철이 아니니 맛이 없지"라고 했지만, 포도는 미국산이었다. 미국 어딘가는 지금 포도가 제철이려나. 아무튼 그 포도가 엄마의 기대를 충족시켜줄리는 만무했다. 엄마는 제철에 나오는 새콤달콤하고 탱글탱글한 포도의 맛을 기억하고 있으니까.
산타처럼 다녀간 기사님.
미국 어딘가에서 배타고 건너와
내가 주문할 때까지 어디에 있었을지 모를 포도.
잔뜩 쌓인 쓰레기.
새벽배송의 뒷맛은 달콤하지 않았다. 내가 지불한 포도와 멜론 값을 쪼개고 쪼개면 미국 농부에게 얼마, 땅 주인에게 얼마, 덤프트럭 기사에게 얼마, 수출입 종사자에게 얼마, 가락시장 유통업자에게 얼마, 도매상인에게 얼마, 창고 관리자에게 얼마, 기사님에게 얼마씩 돌아가겠지.
이런 생각을 하면 클릭 한 번으로 장을 볼 수 있는 세상을 그냥 받아들이기 힘들다. 마음 속 어딘가엔 씁쓸함이 남는다.
배달음식과 먹방으로 소비자는 늘 풍요롭지만 농부의 삶엔 그 풍요가 전달되지 않는다. 겹겹의 유통과정을 거쳐 식탁에 오른 포도에는 자연의 풋내보단 비닐 냄새, 스티로폼 냄새가 묻어 난다. 푸드 마일리지는 말할 것도 없겠지. 앵두와 살구를 먹어본 적 없다는 친구들이 점점 많아진다. 코로나19로 농산물 수출입 규제가 일어나자 제2의 식량위기라는 말이 나왔다. 기후위기가 먹거리의 대변환을 일으킬거라는 목소리가 나온다.
친환경 라이프스타일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사실은 참 다행이다. 같은 맥락에서 나는 식탁에 주목했다. 한국인은 밥십이니까??!! 의식주 한 가운데 있는 食이야말로 '지속가능성'을 추구해야 할 무대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아무튼 이 잡지는 그렇게 시작했다.
농산물이 어느 지역에서 왔는지 따지고, 이왕이면 직거래를 하려고 애쓰고, 번거롭지만 가공식품보다 1차 농산물을 사고, 매번 실패해도 옥상텃밭을 포기하지 않고, 음식물 쓰레기를 줄이려고 하는 그 행동들이 내 집안에서만 이뤄진다면 무슨 소용일까.
토종씨앗을 모으고 지속가능한 농업을 실천하는 단체, 토종씨드림의 변현단 대표를 만나고.
양평 농부들과 연대하며 그들의 농산물로 요리를 하는, 프란로칼 엄현정 셰프를 만나고.
농부와 관계맺는 삶을 이야기하며 1차 농산물 소비 프로젝트를 추진한, 유기농펑크를 만나고.
농부와 직거래하며 대화할 수 있는 플랫폼, 마르쉐의 이보은 이사를 만나고.
직거래로 농장을 운영하는 홍천의 작은 농부를 만나고.
농업농민정책연구소 부소장에게 로컬푸드의 방향성에 대해 물었다.
소비자의 입장에서 농부, 자연과 관계맺는 삶을 실천하는 사람들의 에세이도 넣었다.
이 책은 사고(?)로 시작한 책이지만
기획을 하고 인터뷰를 다니는 동안
나는 꽤 진심이 되었고
아무래도 이 책을 조금 오래 만들어 봐야겠다.
이 주제 아래에서
소비자가 실천가능한 메시지를 모아 확산하고
정형화된 시장에서 만날 수 없는 우리 농산물을 소개하고
지속가능한 밥상을 위한 라이프스타일을 들여다볼 예정이다.
지난주 금요일 텀블벅 펀딩을 오픈하고
잠 못 드는 하루하루가 시작되었다.
운좋게 에디터 픽으로 선정되어서 기쁜 것도 잠시..
하루에도 몇번씩 페이지를 들락거리며 초조한 마음으로 살고 있다.
내 깜냥이 남은 날을 견뎌줄지 모르겠다.
펀딩하는 사람들 이렇게 피말리듯 살았단 말이야?
부디 이 책이 세상에 나올 수 있길 바랄 뿐이다.
나무아미타불, 아멘, 오 알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