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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륫힌료르 Nov 25. 2019

92년생 동생의 눈에 비친 '82년생 김지영' 언니

영화 '82년생 김지영'을 보고(2)

"생각이 많아지게 하는 영화네."
영화가 끝난 뒤 남자친구가 내뱉은 첫 마디다. 원작에 비해 톤을 낮추고 담담하게 풀어낸 탓일까. 그는 내가 '82년생 김지영' 이야기를 처음 꺼냈을 때처럼 알러지 반응을 일으키지도, 반감을 보이지도 않았다. 단지 "생각할 것이 많아져서 마음이 무겁다"고 했다. 그건 나 또한 같았다.

우리는 영화를 보고나서 그 내용과 배우의 연기력과 감독의 기획력 등에 대해 신명나게 떠드는 편이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82년생 김지영'을 보고나서는 두어 마디 주고받고 말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 안에서는 열차가 굴러가면서 내는 '쿠국쿠국-' 소리만 울려퍼질 뿐이었다.


영화관에서 우리 집이 더 가까웠던 탓에 먼저 집에 도착해 씻고 누워있는데, 그제서야 지하철에서 내린 남자친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혼자 지하철에 남겨진 동안 영화에 대해 생각한 것 같았다.

"결혼생활이 쉽진 않겠다. 맞지?"

훗날 내 배우자가 될지도 모르는 사람이 '결혼생활이 쉽지 않을 것 같다'고 했다. 기분이 좀 이상해지려는 찰나, 그가 덧붙였다.

"근데 그 영화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는 알겠어."

순간 깨달았다. 내가 그동안 이 짧은 한 마디를 듣고 싶어서 이 사람을 달달 볶아왔구나. 귀에 들어간 물이 계속 안 빠지다가 어느 순간 스르륵- 빠져나올 때 느끼는 따뜻한 쾌감, 그것과 비슷한 어떤 감정이 느껴졌다. 그래서일까, 그제서야 대화의 물꼬가 트였다. 그리고 우리는 한참 동안 김지영과 김지영 어머니 '미숙'과 김지영 남편 '대현(공유)'에 대해 이야기했다.




[1] '82년생 김지영'의 삶에 대하여


'82년생 김지영'은 92년생인 내게는 김지영 언니이고, 89년생인 그에게는 김지영 누나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다. 그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듯하다. 세상은 서서히 변하고 있지만 10년 만에 강산이 변할 정도는 아니다.

나는 김지영 언니의 삶을 바라보면서 크게 두 가지 감정을 느꼈다. '앞으로 내가 겪게 될지도 모를 일에 대한 공감 섞인 두려움', 그리고 '지금까지의 내 삶이 김지영 언니의 그것보다는 나은 것 같다는 안도감'. 전자는 미혼여성인 내가 결혼 후의 삶을 상상하며 느낄 수 있는 자연스런 감정이다. 그런데 후자는 맥락이 좀 다르다.




영화 속 김지영 어린시절부터 남동생을 편애하는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집안일은 당연한 듯 김지영과 그녀의 언니 몫으로 돌아갔으며, 김지영은 아버지에게 "얌전히 있으라"는 구박이나 받아왔다.

회사에서는 또 어떤가? 그녀는 젊은 여직원이라는 이유만으로 '잠재적 임신여성' 취급을 받으며 주요 프로젝트에서 배제됐다. 능력 있던 김지영의 여성 상사는 남성중심의 조직에서 잘 버티는 듯했으나 결국 유리천장을 뚫지 못하고 회사를 나왔다.


그런데 92년생인 내 삶은 좀 달랐다.

내 아버지는 내가 태어난 그 순간부터 '딸바보'였다. 딸내미가 먹고 싶어하는 것이라면 오밤중에도 나가서 사오셨고, 내가 대학생이 됐을 때 그리고 수험생활을 하겠다고 선언했을 때도 그저 "하고 싶은 것 다 하라"며 물심양면 지원해주셨다. 딸에 대한 사랑이 지나쳐 오죽하면 내가 "그 관심 동생한테 나눠주라"고 했을 정도다.

직장생활 또한 그렇다. 모든 면에서 평등한 건 아니지만, 최소한 우리 회사는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승진 후보에서 제외한다거나 주요 프로젝트에서 배제시키지 않는다. 업무배치에 있어서는 개인의 능력과 평판이 가장 중요하고, 성별은 그 다음 문제다.




남자친구에게 말했다.
"그래도 김지영보다는 내가 더 좋은 세상에서 살았네"

남자친구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싶어 보러 간 영화지만, 내 삶을 돌아보면 세상이 느리게나마 바뀌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알고있다. 내가 김지영보다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김지영을 비롯한 수많은 언니들이 '불편하다' '힘들다' 수없이 울부짖어줬기 때문임을. 그리고 아직 내가 겪어보지 않은 '기혼여성의 삶'이라는 무시무시한 미지의 세계가 나를 기다리고 있음을.




[2] '미숙'의 삶에 대하여


그도 나도 아직 결혼을 해보지 않아서일까? 영화관을 나서는 우리 두 사람의 뇌리에 보다 깊이 박힌 건 김지영의 어머니 '미숙'의 삶이었다.

3년 전 원작 소설을 처음 읽을 땐 분노라는 감정만이 단전에서부터 치밀어올랐다. 돌이켜보면 그때의 나는 우리 집 '68년생 김지영'에 빙의돼 있었던 것 같다. 정작 당신은 괜찮다 하시는데도 나는 입버릇처럼 '68년생 김지영'이 되지 말라며 당돌하게 말하곤 했다.

그런데 3년이 지나도 여전히 내 눈에 비친 미숙의 삶은 애달프다. 조금 달라진 게 있다면 그땐 분노가 주된 감정이었지만 지금은 안쓰러운 느낌이 더하다는 것. 정작 주인공인 김지영의 삶은 담담하게 봤는데, 미숙과 관련된 장면에서 눈물샘이 폭발했다. 미숙이 지영의 병을 알고 찾아가 딸을 끌어안으며 아이를 대신 봐주겠다고 했을 때, 지영이 외할머니에 빙의돼 "미숙아. 그렇게 살지 마"라고 말하는 장면 말이다.


"우리 엄마는 배우가 꿈이었대. 근데 결혼해서 나 낳고는 그냥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엄마로만 살았어."

내가 말했다. 그러자 남자친구가 맞장구를 친다.

"나도 엄마 생각 나더라. 우리 엄마도 미술 쪽으로 촉망받는 인재였는데 나 낳고 그냥 나만 키우셨어."

평행선을 달리던 우리는 씁쓸한 합의를 했다. 떠올릴수록 울컥하고 곱씹을수록 안쓰러운 미숙의 삶에 대하여.




[3] '대현'의 삶에 대하여


"공유 같은 남편이 어딨어. 난 공유가 너무 불쌍하더라." 

그가 말했다.

김지영 남편 '대현'의 삶은 3년 전 원작을 읽을 때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동시에 남자친구와 내 생각이 어느 정도 일치했던 김지영이나 미숙의 삶과 달리, 의견이 엇갈린 부분이기도 하다.

언뜻 보기에 대현은 실존하지 않는 '백점짜리 신랑감'으로 보인다. 그는 언제나 아내를 다정하게 배려하지만, 아내 지영은 정신병에 걸리고 만다. 바로 이 사실을 바라봄에 있어 그와 나의 시선이 엇갈렸다.

"대현이 불쌍하다"는 남자친구는 아마도 대현이 아내를 위해 그렇게나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힘든 상황에 놓였다는 점에서 안타까운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그런데 내 눈에 비친 대현은, 겉으로는 완벽한 남편이지만 사실은 부모 세대가 만들어낸 가부장적 분위기에 순응하며 이리저리 휘둘리는 사람이었다. 이는 "부모님이 원하시니 아이를 갖자"며 지영을 설득하는 모습, 그리고 지영이 재취업을 포기했을 때 "그래, 좀 더 쉬어"라고 말하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정작 아이를 낳을 주체는 지영인데 그녀가 준비가 안됐다고 하지 않았는가? 육아가 언제부터 '쉬는 것'이었는가?




그럼에도 나는 남자친구에게 "그래. 공유 같은 남편도 없지" 정도로 짧게 공감의 표시만 했을 뿐, 굳이 이견을 내세우진 않았다. 두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 나를 위해 보기 싫은 영화를 함께 보러가주고 심지어 일정 수준 공감까지 해준 남자친구에게 너무나 고마웠다. 나를 위해 나름의 큰 양보를 해준 그에게, 소박하지만 나만의 방식으로 감사 표시를 한 거다.

둘째, 우여곡절 끝에 함께 영화를 보고나니 그가 왜 자신을 '89년생 김지훈'이라 표현하는지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다. 김지영 언니의 세상보다 92년생인 내 세상이 더 좋아질 동안, 남자친구를 비롯한 80년대생 오빠들이 혼란을 겪어왔음을 안다. 물론 그렇다 해서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가 남성의 그것과 완전히 평등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세상은 변하고 있기에, 그 과도기에서 '89년생 김지훈'들이 겪은 불합리ㅡ승진에 있어서 남녀차별은 줄어들었는데 궂은 업무나 오지 근무는 여전히 남성들에게만 편중된다거나 하는 것ㅡ역시 존재하기 때문이다.





남자친구는 내게 "네가 '92년생 김지영'이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의 말처럼 요즘 세상은 여성들에게만 힘든 건 아니기에, 나 역시 그가 '89년생 김지훈'이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리라 다짐했다.

사회의 프레임을 굳이 우리에게 씌울 필요가 있을까? 결국 그와 나, 여성과 남성은 이 퍽퍽한 세상에서 한 배를 탄 사이지 않은가. 영화 속에서 지영이 힘들어지자 대현 역시 힘들어진 것처럼, 인류는 성별에 따라 무 자르듯 완벽히 분리된 삶을 살 수 없다. 그렇기에 '82년생 김지영'은 여성들만 힘들다고 울부짖는 영화가 아니다. 사실은 그 어떤 영화보다도 "같이 잘 살아보자"고 울부짖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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