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슬픔 변하여 춤이 되게 하는 길
박영선 목사님의 <박영선의 욥기 설교>를 읽고 있다.
전부터 위시에 담아두었던 책인데, 이번에야 주문해서 어제 배송받아 읽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읽은 박영선 목사님의 책이 아마도 <구원 그 이후>였던가. 그 책을 읽고 다른 책들도 하나씩 읽어가면서, 이분의 책은 전부를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단지 성경을 주해하는 것을 넘어서는, 삶에 대한 깊은 고찰과 인간 면면에 대한 세심한 시선이 담겨 있기 때문.
누구나 삶의 법칙이나 도덕률을 이야기하기는 쉽다. 사람은 바로 곁에서 고통 당하는 사람을 보면서도 그런 무례를 너무 쉽게 범한다. 이렇게 된 것은 알고 보면 조금은 네 잘못이야, 그러니 이렇게 저렇게 마음을 가져봐, 이런저런 노력을 해봐, 라고 청하지도 않은 조언을 들려준다. 그저 고통 당하는 이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곁에 있어주는 것도 사람에겐 그렇게 참기 어려운 일인가보다.
보통은 이런 책을 읽으면 '고통당하는 욥'에 이입하면서 읽게 되는데, 책을 읽다가 '나는 그런 적이 없었을까' 하고 돌아보며 뜨끔하게 된다. 신앙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는 '나는 대체로 착하고, 그렇게 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줄곧 생각해 왔다. 그래서 '죄인'이라는 단어가 너무 싫었고, 왜 그런 부정적인 정체성을 사람에게 부여하려 하는 것인지 거부감이 심했다. 그런데 믿음의 길에 접어든 후 나의 마음을 면밀히 관찰해 보면, 그 말을 부정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이것으로 인해 마음이 괴롭기도 했다.
'죄인'이라는 말은 '과녁을 벗어났다'라는 의미를 가졌다고 한다. 그러니까, 삶에서 우리가 마땅히 가져야 할 어떤 인간으로서의 방향이 있는데, 인간의 마음과 생각이나 의도가 자꾸 그것을 벗어난다는 것, 이랄까. 사람이 어떤 법리적인 죄를 끊임없이 짓는다는 의미라기보다, 그의 마음이 부패해서 자기 자신에게나 타인에게나 좋지 않은, 혹은 파괴적인 길로 가고자 하는 어떤 경향성 정도로 해석해도 될 것 같다.
그럼에도 우리에겐 '양심'이라는 것이 주어져서, 어떤 것이 옳고 그른 것인지에 대한 판단을 종교가 있든 없든 할 수 있고, 수많은 교육과 학습을 통해 대체로는 사회인으로서 무리없이 이 세상을 살아가고, 또 유지하고 있다. 심지어 아름다운 것들을 창출해내면서.
그런데 그 안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우리의 마음이 어쩔 수 없이 부패해 있다는 것.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사람의 마음. 타인을 향한 경멸, 우월감, 열등감, 시기심, 미움, 지독한 경쟁의식, 타인에 대한 배제, 무리짓기, 심리적 괴롭힘 등. 그리고 이것이 양산하는 온갖 문제들. 그로 인해 고통 당하는 사람들. 그것이 불러오는 또다른 미움들. 그 끊임없는 죄의 굴레들.
이것을 막기 위해 인간은 법을 만들고, 죄를 범한 사람들을 처벌하고,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애써오고 있다. 그리고 그건 일정 부분 죄의 문제를 억제하는 효력을 발휘하기도 하리라. 그래서 우리는 부당한 이익을 획득하지 않고(유혹에 넘어가는 사람도 있지만), 화가 난다고 함부로 사람을 때리거나 죽이지 않는다(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지만).
이 책은 이야기한다. 그런데 인간의 그런 부패한 마음이 다른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고. 아니, 죽이기까지는 못하더라도(욥이 그로 인해 죽지는 않았으니까) 죽을 만큼 괴롭게 만들 수도 있다고. 고통을 당하는 사람의 환부에 마치 소금을 끼얹는 것처럼, 누군가의 마음을 그토록 더욱 못 견디게 만들 수도 있는 것이 사람이라고. 그러니 늘 이것을 경계하며 살아야 한다고.
고통당하는 이에게 <욥기>는 반가운 책이다. 그 책은 편을 들어준다. 너의 고통이 너의 잘못만은 아니라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나쁘다고. 너의 고통을 사실은 신이 다 알고 있다고(그럼에도 당장 구해주지는 않지만, 거기에는 네가 온전히 성숙하기를 바라는 신의 뜻이 있지만). 욥기를 항상 이렇게 읽어왔다. 아, 하나님이 나를 대변해주시는구나.
세상 많은 부모들이 '내 아이는 절대 가해자일 리가 없다'라고 믿고 살아가는 것처럼, 아마도 우리는, 혹은 나는, '나는 타인에게 그런 상처를 줄 리 없어' 하고 살아왔던 것 같다. 그렇지만 다시 한번 자문해 본다. 내가 혹 고통 당하는 이의 곁에서 쓸데없는 말이나 보태 아픔을 더하지는 않았는지. 내가 아플 때 다른 이의 참된 배려와 위로를 바라면서도, 타인에게는 그런 마음을 얼마나 내어주었는지. 혹은, 나의 고통을 배가하는 사람으로 인해 아파하다가 나도 또다른 죄를 범하는 일은 없는지. 나의 '명명백백한 고통'으로 인하여 타인에게 상처주는 일은 마땅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는지.
그런데 참 인간에게 어려운 일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살아가고 싶은 것이 사람 마음 아닌가(물론 눈 하나에는 눈 두개, 이 하나에는 이 열 개로 대응하고 싶어하는 것이 사람이라 '응보의 원리'로 같은 죄에는 같은 보응으로 갚아주기 위해 만든 최소한의 원칙이라고는 하지만). 그런데 예수는 너희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갚으라고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한다, 고 하지 않았는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아무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너희를 저주하는 사람을 위해 오히려 축복하라고. 이것은 대체 어떤 경지인가.
구체적인 방법까지 세세하게 알려주셨다면 좋았을 텐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니구나. 몸소 보여주셨구나. 그는 그를 비방하고 음해하는 사람들에게 기꺼이 몸을 내어맡기고, 채찍질을 당하고, 조롱을 당하고, 심지어 3년을 함께한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조차 배신을 당하고(심지어 배신당하는 순간에 그와 눈이 마주치는 일도 있었다..), 결국에는 십자가에 못 박혀 최악의 저주를 당하며 돌아가셨지.
그렇게 죽기 전날 밤, 그는 자기와 가까운 사람들에게 만찬을 베풀었다. 빵을 떼어주고, 포도주를 나눠주었다. 자기의 죽음을 목전에 두고 말이다.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고, '너희도 서로의 발을 씻어주라'고 했다. 울지 않을 수 없는 사랑이다...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 마지막회에서도 울 수밖에 없었던 건, 동석의 어미 옥동이 죽음을 앞두고 아들에게 마지막으로 차려준 그 밥상, 뜨끈하고 맛있는 된장찌개를 끓이고 숨을 거둔 장면 때문이었지. 동석은 어미가 마지막으로 끓여준 된장찌개를 한 술 뜨며 그 맛에 감탄한다. 아마 평생 잊을 수 없지 않았을까. 어미가 차려준 그 마지막 밥상. 그 된장찌개의 맛.
그리고 또 하나, 와인이나 된장찌개는 모두 발효와 숙성을 통하여 깊은 맛을 내는 음식이라는 것도 닮았다. 마치 포도가 으깨어지고 콩이 진득하니 썩어가는 과정을 통해서만 사람들의 입맛을 돋워주는 그런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삶의 이치와도 닮은 음식이랄까. 자기를 내어주고, 기꺼이 고통당함으로써 타인에게 기쁨을 주는 존재.
그걸 너무 잘 알아서, 예수는 나를 기억하는 모든 곳에서 빵과 포도주를 나누며 자기를 기억하라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너희들을 이렇게 사랑했단다. 너희와 함께하는 모든 순간은 마치 Feast와 같단다.
<우리들의 블루스> 마지막 장면에 나온 메시지도 그러하였다. 우리는 고통당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행복하기 위해 이 세상에 왔다고.
그러나 그 행복에 이르기까지 삶이란 참 얼마나 고단하기도 한 것인가. 우리의 사소한 잘못 때문에. 타인에게 상처가 될 거라고 생각지 못하고 함부로 내뱉은 말 때문에. 때로는 돈 때문에. 비교의식 때문에. 우리의 모든 연약함과 어리석음으로 인하여.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블루스(우울)'에도 불구하고 이 드라마는 말한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분명한 사명 하나.
우리는 이 땅에 괴롭게 위해
불행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오직 행복하기 위해 태어났다는 것.
모두 행복하세요!
미움을 넘어, 고독과 아픔을 넘어 오로지 타인을 껴안고 이해와 화해의 길로 나아갈 때 우리에게 그 고통의 '블루스'는 비로소 '블루스(춤)'이 될 수 있다고. 때로 명백한 슬픔 앞에서도 우리는 떡을 떼자고. 와인을 나누자고. 발을 씻겨주며, 머리를 빗겨주자고. 그리고 함께 어우러지는 축제를 열자고. 연약하고 깨지기 쉬운 우리 모두는, 그럼으로써 행복해질 수 있는 존재일 거라고. 그러니, 우리 모두에게, 다시 CHEERS!
글을 쓰기 전에는 <욥기>와 <우리들의 블루스>를 함께 이야기하게 될 줄 몰랐다. 이것은 결국 사람의 이야기. 신은 욥을 탓했던 친구들을 꾸짖으며, 욥에게 뜬금없이 자기의 창조 세계를 친히 보여준다. 하늘의 달과 별, 지구의 땅과 물, 그리고 멋진 동물들에 대한 이야기. 우리가 바로 이런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제임스웹 망원경이 보여주는 우주의 찬란한 모습도 다시 한번 떠올려 본다. 이토록 장엄하고 때로 무섭고도 아름다운 세상에서, 이렇게나 미약하지만 사랑하고 상상할 수 있는 우리는 너무나 소중한 존재들이라고. 우리의 잘못과 '과녁을 빗나가는' 마음 때문에 때로 잘못을 저지르기도 하지만, 연약한 마음을 내어주어 사랑할 수 있다면, 우리도 퍽, 괜찮은 존재라고. 실은, 신을 닮은 존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