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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읽는 사람

<은중과 상연>, 동경과 슬픔 그리고 성장의 연대기

사실은 우리 모두의 이야기

by 별빛



<은중과 상연>을 다 보았다. 마지막회까지 한달음에 다다라서는, 그만 끝까지 다 봐버리기 아까워 절반쯤 남겨놓았다. 마지막회를 보던 날은 일요일 저녁이었는데, 남은 건 가족들이 없는 고요한 시간에 혼자서 숨죽이며, 혹은 슬프면 마음껏 눈물 흘리며 보고 싶었달까.


과연 죽음의 때와 시를 선택하고 그 길을 향해 뚜벅뚜벅 향해 나아가는 상연, 그리고 그런 상연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은중의 마음을 생각하며 어쩔 수 없이 울 수밖에 없었다. 결국 누구나 맞게 되는 죽음이라는 문턱을 너무나 자명한, 가까운 미래로 상정해둔 사람의 심정은 도저히 상상도 해볼 수가 없다. 내일 내가 어느 곳에서, 어떻게 생을 끝내게 될지 알고 있다면, 그 사람이 갖는 오늘, 지금이라는 시간의 질감은 어떻게 다를까.


"그거 쉬운 거 아니야. 우리 아빠 호흡기 떼기로 결정한 거, 그거 나 몇 년이 지나도 해결이 안 돼."


라던, 은중을 아끼던 선배의 우려 섞인 말을 뒤로하고 상연의 마지막까지 동행해주기로 한 은중. 어린 상연의 손바닥을 '이걸로 맞으면 얼마나 아픈지 알아?'라며 차마 때리지 못했던 은중은 결국, 끝끝내 너그러웠다. 그러니까 은중은, 자기의 삶을 생의 길목마다 흔들어대던 상연을, '끝내 받아주었다'. 그 누가 은중처럼 할 수 있을지, 평범한 나는 그 마음도 가늠이 되지 않았다.








은중과 상연, 둘 중 누구에게 감정이입이 되느냐고 묻는다면 아마 대부분의 여성은 상연보다는 은중을 택할 것이다. 어린 시절 부유한 집에서 빼어난 외모와 비상한 지능을 가지고 '화목해 보이는' 가정에서 태어나 살아간다는 것은 매우 드문 행운에 속하니까. 그런데도 살아가다 보면 신기하게 상연과 같은 사람을 우리는 한번쯤 만나보게 된다. 그에 대해 속속들이 알지도 못하면서 막연히 '완벽해 보이는' 화려한 사람을, 한번쯤은. 그런 은중의 마음으로, 우리는 언젠가 만났거나 주변에 있는 어떤 상연을 떠올리며 은중의 서사를 따라간다.


그래서인지 이야기 역시 은중의 시선으로 펼쳐진다. 은중의 목소리, 은중의 형편, 은중의 내밀한 마음이 스토리의 중요한 라인이 된다. 은중의 어린시절은 마치 불행을 묘하게 범벅해놓은 것처럼 보인다. 아버지의 부재, 좁고 낡은 반지하 집, 화장실에 가려면 신발을 신고 나가야만 이를 수 있는, 타인과 함께 써야 하는 공용 화장실까지. 학교에서는 '아버지 안 계신 사람 손 들라' 하고, 동경하던 어여쁜 친구는 반장 노릇을 하며 무시하는 것 같고, 마음을 주었던 남학생은 '편하다(=만만하다)'는, 십수 년이 지나서도 마음에서 지워지지 않는 말을 남긴다.


그럼에도 은중의 주변에는 선물 같이 주어지는 따스함이 있다. 고된 노동을 하고 집에 와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엄마, 학급의 놀림감이 되어 수치심을 느끼는 은중의 마음을 섬세하게 어루만져주는 선생님, 그리고 언제나 곁에 있어주는 친구들.


놀랍게도 상연은 그런 은중을 부러워하고, 질투하고, 심지어 미워하기에 이른다. 그 미움은 어른이 되어 더 격렬해져서 은중의 소중한 것을 빼앗고, 마침내 은중이 '망가져버리기'를 바라는 끔찍하고 황폐한 마음에 이르게 된다.


대체로 현실에서는 상연과 같은 아이는 타인의 부러움을 사며 어른이 되어서도 건강한 삶을 이어가는 경우가 많다. '가난하지만 행복한/부유하지만 불행한'이라는 이분법은 쌍팔년도부터 너무나 오랫동안 반복되어 온 클리셰다. 실제로는 가난으로 인해 불행까지는 아니더라도 너무 기막히고 막막하고 복잡한 시간을 건너야 하는 경우가 더 많다. 부유한 집에 결핍이 없을 수는 없지만, 경제적으로 안정되어 있다는 것은 부모의 탄탄한 직업 혹은 재능, 그리고 건강과 연결되어 있는 경우가 많아 살아가는 일이 상대적으로 수월한 경우가 많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드라마에서는 그 오래된 클리셰를 차용해 이야기를 풀어간다. 가난하지만 대인배와 같은 마음을 가진 은중, 부유하지만 엄마 아빠 사이의 불화와 가정의 몰락을 경험해야 했던 상연. 실제로 이러한 경우가 없지는 않겠지만, 이렇게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경우 역시 흔치는 않을 것 같다.


그리하여 상연의 마음 어딘가가 꼬여버린 것을 관중은 얼마간 납득하게 된다. 화장실이 두 개인 집에서 살던 아이가 8만 원짜리 월셋방에서 하루종일 몸이 부서지도록 아르바이트를 해야 겨우 살아갈 수 있게 된다면, 그리고 외곬의 성향으로 인해 언제나 마음 한켠에 항상 휑한 바람이 부는 외로운 삶을 살게 된다면.


그리고 남몰래 오래 마음에 둔 사람을 통해 오빠의 오랜 죽음의 이유를 알게 되기까지(사실 오빠의 죽음이 '설마 그 소재와 관련 있는 건 아니겠지'라고 생각했는데 예상을 빗겨가지 않아 개인적으로는 좀 아쉽긴 했다). 이상하게도 상연의 삶에는 가혹하게도 자꾸 불행에 불행이 더해지고, 그걸 온몸으로 받아내던 상연의 마음도 부서져간다.


자기에게 닥치는 운명의 회오리 속에서, 은중의 행복을 바라보는 것조차 견딜 수 없었던 상연은, 상학과 은중이 다시 가까워지는 것을 보고 조바심이 나, 은중에게 '제발 선배 만나지 마'라고 말했지만 그 말의 속뜻은 아마도 '제발 행복해지지 마. 나는 이렇게 불행한데 너만 행복해지지 마'라는 게 아니었을까. 은중과 상연의 사이에 내내 있었던 선배 상학은 실은 은중과 상연 사이의 묘한 기운을 줄다리기하게 하는 상징적인 존재였을 것이다. (과연 극의 막바지에 상학의 후일담은 찾아볼 수가 없다)


"널 외롭게 하는 건,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너야."


라는 말을 뒤로 하고, 위안보다는 자존심을 지키는 쪽을 선택하는 상연. 세상 무엇보다도, 친구보다도 자기의 마음보다도 자존심이 가장 중요한 상연. 그렇게 자존심이 강하고 평판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은중의 프로젝트를 빼앗아가는 것은 상식선에서 이해하기는 어렵다. 극의 클라이맥스를 위한 좀 극단적인 장치로 사용한 것 같다. 흥미로운 극에는 악역이 필요하고, 남들에 비해 여러모로 빼어난 자질을 지녀 질시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 몰락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 역시 우리가 드라마로 오래 즐겨온 전개가 아니던가.






너무나 상연답게, 다시 은중 앞에 불쑥 나타나서는 무리한 제안을 한다. "나 이제 죽는대"라는 거침없는 말로, 상대방의 말문을 막고 거절하기 어려운 부탁을 하면서.


상연으로 인해 직장까지 그만두고 어두운 터널을 홀로 지나야 했던 은중은 여전히 제멋대로인 상연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다. 상연의 거듭된 사과에도 '너 회사 잘되고 건물 올리고 그럴 때, 그때 내 생각했어?'라며 사과의 타이밍에 대해 논한다. 은중의 말에는 틀린 구석이 하나도 없다. 보는 우리 역시 그렇게 느낀다. 사랑도 일도, 은중의 가장 소중한 것을 그렇게 계속 빼앗아 갔으면서, 이제 와서 사과하면 다인가?


은중의 마음이 미움과 기막힘, 복잡함의 단계를 지나 그 빗장이 조금씩 열리게 되기까지, 상연은 사과의 농도를 높여간다. 용기 내어 은중을 만나기, 성수동 건물을 증여하려고 시도하기, 막무가내로 집에 찾아가기, 매체를 통해 자기의 과오를 고백하고 은중의 것을 늦게나마 제자리로 되돌려주면서.


마침내 은중은,


어린 상연의 매질을 되갚지 않았던 그때처럼, 상연의 배신으로 인한 오래된 상처를 털어내고 그의 손을 다시 잡아준다. 그리고 그 고통스러운 여정을 지나 마침내 안식에 이르는 과정을 묵묵히 감내한다. 그 어여쁘고 아름다웠던 상연의 눈밑이 컴컴해지고 고통에 몸부림치며 울부짖는 밤을 함께하면서. 그럼에도 여전히 눈빛이 맑고 예쁜 상연의 마지막을 모두 바라봐주고 기억해주는, 단 한 사람이 된다.


죽음을 앞둔 상연의 말과 표정은 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따뜻해졌다. 자기의 30대를 내내 지배했다던, '누가 널 끝내, 받아주겠니'라는 은중의 저주를 온몸으로 살아내며 속죄의 시간을 보낸다고 생각했던 걸까. 그 과정에서 상연은 조금씩, 자기 안에 덕지덕지 붙은 자존심과 욕심을 벗어가며 정결해지고 있었던 것일까. 그 속죄의 기간이 끝난 후에야, 비로소 현생의 짐을 벗고 그의 이름처럼 제비가 되어 가벼이 훨훨 날아갈 수 있게 된 걸까.







제목을 '사랑과 미움'이 아닌 '동경과 슬픔'이라고 적은 데에는 이유가 있다. 마지막회 은중은 '사랑하고, 미워했던' 나의 친구라고 했지만. 실은 자기에게 없는 어떤 것을 동경하고, 또 그 결핍으로 인해 느끼는 슬픔이 형상화된 존재가 은중에겐 상연이고, 상연에겐 은중이 아니었을까.


그러니까, 사실 은중과 상연의 라이벌 혹은 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존재는 상대방이 아닌 자기의 내면인 것이다. 나의 어떤 점을 미워하기에 타인을 동경하고, 내가 갖지 못한 것으로 인해 슬픔을 느끼게 되는데, 그걸 자극하고 상기시키는 존재가 하필이면 너무나 가까운 친구였던 것. 그래서 온전히 사랑하지도, 미워하지도 못한 채 그 사이 어딘가에서 내내 시계추처럼 오가곤 했던 것이 아니었는지.


이것은 연약하고 어리석은 우리 모두의 슬픈 연대기가 아닌가.


우리는 어느 때에는 은중이었다가, 때로 놀랍게도 아주 가끔은 상연이기도 하다. 부러워 죽을 것 같은 누군가를 보는 것이 괴로웠다가, 이유를 알 수 없이 나를 견제하며 질투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기도 한다. 우리는 은중과 상연을 오가며 마침내 조금씩 더 사람에 대한 이해를 넓혀가게 되고, 그렇게 어른이 된다.


깨달음이 조금 더 일찍 찾아오면 좋을 텐데, 우리는 오늘도 누군가를 동경하거나 내게 없는 것으로 인해 슬픔을 느끼며 살아간다. 진정한 화해와 너그러움은 상연처럼 생의 끝에 다다라서야 갖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떠랴. 우리가 여전히 어리거나 젊고, 늙음과 불행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어리석게도 건강해서 그런 것을.


그러나 기억했으면 좋겠다.


너무 늦기 전에, 자신과 타인을 망가뜨리는 어리석음은 이야기를 통해 배우며 반면교사로 삼고, 곁에 있는 친구들에게 너그러워지고, 따뜻해지고, 그리하여 나와 친구의 삶을 모두 껴안을 수 있다면. 그럼, 삶이 얼마나 더 따뜻해질까. '파란 문의 집'을 앞두고 서로를 가장 따스한 눈길로 바라보던 상연과, 은중처럼. 그 화해의 길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여정도 울퉁불퉁하겠지만, 상연의 여정처럼 너무 골이 깊고 아프지 않기를. 나 자신에게 덜 가혹하기를. 자꾸만 어리석어질 때마다 그런 나의 등을 세워줄 좋은 친구들이, 부디 내내 곁에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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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의 여운이 날아가기 전에 써두어야 할 것 같아서 남겨둔다. 그렇게 하지 못하고 지나쳐버린 이야기가 얼마나 많은가. 애써 갈무리해 길목마다 기록해보아야겠다.




++상연의 역을 분한 배우를 이 드라마에서 처음 보았다. 등장하자마자 마음을 빼앗는 마스크에 여성인 나도 반할 만큼 놀랐다. 이 배우는 어디에 있었던 걸까. 이미 필모가 있지만 내가 알지 못했던 배우임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그의 여정을 하나씩 따라가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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