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로잘리 Nov 19. 2019

울리지 않는 전화 2

기억에 끝에 그리움만 남았다.

시골, 외갓집, 제비꽃,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단어만으로도 왠지 마음 한 구석이 따뜻지면서 가슴 한편이 먹먹해지는 느낌.


어린 시절 사업에 실패하셨던 아빠께서 낯선 땅 국으로 일하러 떠나시고 몇 년 동안 엄마와 난 외갓집에서 큰할머니,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래서인지 나에겐 외갓집에 얽힌 추억 많고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에 대한 정도 마음  . 나에게 있어 외할머니는 외할머니가 아닌 그냥 할머니였다. 세상에 단 한 명뿐인 내 할머니.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아직도 선명한 기억들.

그 시절 특별한 인형이나 장난감이 없어도 시골에 있는 모든 것들이 내 장난감이자 더없이 훌륭한 놀이터였다.

 

외갓집 옆으로 커다랗고 넓은 대나무 숲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그 대나무 숲 안에 들어서면 갖가지 조개껍질부터 여러 가지 풀과 나뭇잎, 담벼락에 붙어 피어있는 꽃들과 수북이 쌓인 톱밥들까지 모든 게 자연 그대로 소꿉놀이의 재료들이었다. 버려진 조개나 꼬막 껍데기를 모아 그 안에 흙이나 톱밥을 담고 풀과 작은 들꽃으로 모양까지 내어 납작한 돌 위에 얹고 "식사하세요!"를 외치던 다섯 살 꼬마 아이는 엄마와 외할머니를 참 많이도 귀찮게 했었다.

매일 아침 꼬꼬 꼭 소리를 내며 마당을 돌아다니는 닭들에게 모이도 나눠주고 여기저기 숨바꼭질하듯 숨겨놓은 달걀을 찾는 것도 시골살이 재미 중 하나였다. 불을 피우려고 모아둔 나무들 속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달걀에선 작은 두 손 가득 따듯한 온기가 느껴졌다.


봄이 되면 넓은 마당 한편 돌담 및 옹기종기 피어있는 보랏빛 제비꽃들도 참 좋았었다. 장미꽃처럼 크고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그 꽃을 보고 있으면 어린 마음에도 어쩐지 편안하고 따스해지는 것 같은 느낌에 봄 햇살을 받으며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는 제비꽃들이 그렇게 예쁘고 좋을 수가 없었다.


외갓집 기둥에 걸린 새장엔 작은 새 한 마리도 키우고 있었는데 새에게 주려고 작은 거미를 찾으러 다니던 기억과 그 새가 낳은 푸르스름한 작은 알들을 밤사이 족제비가 먹어버려 빈 껍질만 남아버린 둥지를 보며 어미새보다 더 목놓아 울었던 기억까지.

 

외갓집으로 올라오던 길목에 샘터도 자리해 있었는데 네모난 모양 두 개의 샘 중 하나에선 동네 할머니들이 모여 빨래도 하고 나머지 하나의 샘에선 물도 길러다 먹었다. 물이 얼마나 맑고 깨끗했는지 한여름에도 주전자에 물방울이 맺힐 만큼 손이 시리 차가웠다.


여름 끝자락 마당에서 피우던 매캐했던 모깃불 냄새와 장날이면 부엌에서 나던 석쇠에 생선 굽던 고소했던 냄새까지 지금도 생선구이집 앞을 지날 때면 그때의 기억들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늦여름밤 마루 끝에 앉아있으면 어디선가 날아와 풀밭에 앉은 반딧불이를 보며 신기해 손뼉 치던 내게 할머니는 호박꽃 안에 반딧불이를 가만히 넣어 보여주셨다. 반딧불이가 내는 불빛에 캄캄한 밤 등불처럼 호박꽃이 은은하게 빛을 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젊었던 엄마는 아빠와 떨어져 시골에서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텐데 난 외갓집에서의 하루하루가 그저 재미로 가득했던 것 같다.


어린 시절 애교도 많고 노래도 잘 부르고 텔레비전에 음악만 나오면 백댄서 저리 가라 춤을 춰대는 흥 꼬마였던 내 탓에 힘든 속에서도 웃음 끊일 날 이 없었다던 그 시절. 그땐 왜 그랬는지 이유는 모르지만 내 춤과 노래를 보던 동네 어른들 모두 이장님 댁 손녀는 나중에 가수가 될 줄 알았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서야 전해 들었다.


시간은 흐르고 내가 유치원에 들어 무렵 아빠께서 돌아오셨고 난 자연스레 외갓집을 떠나게 되었지만 어린 시절 그곳에서 보낸 기억들 모두 마치 어제 일처럼 선명하기만 하다.


학교에 다니면서도 방학 때 놀러 가는 날이면 내가 좋아하는 갈치, 게장 등의 반찬을 준비해 많이 먹어라 내어주시고 집으로 돌아오는 날이면 할머니는 마당 절구 옆에서 우리 차가 멀어져 안 보일 때까지 보고 또 바라보고 서 계셨다.




뜨거운 여름을 지나 울긋불긋 단풍이 한창이지난달. 

나의 하나뿐인 할머니, 울리지 않는 전화의 주인공이셨던 우리 하동 덕하늘나라로 떠나셨다. 그동안 병원에 계셔서 많이 편찮으셨던 건 알고 있었지만 어느 새벽 갑자기 찾아온 이별에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가슴이 시리다는 게 먹먹하다는 게 이런 느낌이었을까?

아주 오래전 큰할머니가 떠나고 그 뒤 외할아버지께서 떠나시고 내 주변에 한 분씩 돌아올 수 없는 먼 곳으로 가실 때마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슬펐다.


서울로 오시기 전, 시골에 계실 때 할머니동네 사람들이 도둑고양이라 부르던 집 없는 고양이들이 집에 찾아오면 귀찮다 하시면서도 꼭 밥을 챙겨주셨다. 빗자루를 휘두르며 쫓아내기 바쁘던 동네 사람들과 달리 "왜 저래 우리 집만 찾아오는가 몰라." 하시며 귀찮다는 말과 달리 하루 거의 매일을 빠짐없이 고양이들 밥을 챙겨주셨다. 그 고양이가 새끼를 낳아 데리고 올 때까지.

할머니께서 떠나신 그날 그곳. 거짓말처럼 안으로 들어서는 운구차 앞으로 어디선가 고양이 몇 마리가 마치 제 식구라도 온 듯 반갑게 쫓아 달려 나왔다. 그곳에서 지내는 주인 없는 고양이들이라고 사람들 오면 도망가기 바쁜데 별일이라는 관리자의 말에 순간 무언가 울컥 차올라 또다시 슬퍼졌다.


시골을 떠나시면서도 "이제 누 저것들 밥 주겠어, 살런가 죽을런가 몰라." 지나가듯 말씀하셨던 할머니.

외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다음 해 봄 외할아버지 산소 주변에 모여 피어있었던 제비꽃들을 보면서 제비꽃의 꽃말을 떠올리며 말할 수 없이 마음 아팠었는데.


세상에 괜찮은 이별은 없다. 나이가 들어 늙고 때가 되면 모두 떠난다고 하지만 나에게 이별은 아직도 너무나 시리고 먹먹하기만 하다.


봄날 외갓집 마당 한구석에 피어있었던 제비꽃들도.

여름날 호박 덩굴을 물들였던 반딧불도.

가을에 주렁주렁 잘 익은 감들이 달렸던 감나무도.

겨울에 달콤했던 군고구마와 따듯했던 아랫목도.

이제 남아있는 건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계셨던 내 기억과 추억이 가득 담긴 텅 빈 집뿐이다.


할머니가 우리 곁을 떠나신 지 이제 막 한 달.

또다시 차가운 겨울이 찾아왔지만 아직도 곁에 할머니가 안 계신다는 게 두 번 다시는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다는 사실이 믿을 수도 없고 믿고 싶지않다.

절구 옆에서 눈물을 훔치며 서 계시던 내 할머니.

투박하지만 누구보다 착하고 정 많던 우리 할머니.

시간이 얼마나 더 많이 흘러야 조금은 괜찮아질지 모르겠지만 난 오늘도 할머니가 너무나 그립고 또 그립다. 







  




매거진의 이전글 싱글이 죄송할 일인가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