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헤운 Apr 14. 2021

<모범택시>로 보는, 최근 한국 드라마의 몇 가지 단상


이제훈 주연의 웨이브 오리지널 드라마 <모범택시>는 피해자들을 대신하여 흉악한 범죄자들을 사적으로 처리하는 택시회사 ‘무지개 운수’ 사람들의 복수 대행극이다. 학교폭력 논란으로 배우가 교체되는 논란을 겪기도 한 이 드라마는 1회 10.7%로 시작한 시청률이 2회 13.5%로 상승하며 기분 좋은 첫 주를 맞이했는데, 나는 (아직은 섣부른 판단이긴 하지만) 이 드라마의 성공을 보면서 최근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거나 혹은 화제가 되었던 한국 드라마 간에 몇 가지 유사성이 눈에 띄어 그것들을 적어보려 한다.


1. 

중국산 김치, 악덕 고용주, 무기징역 범죄자의 조기 석방 등 <모범택시>가 응징해가는 대상엔 한국에서 벌어진 몇몇 범죄 사건을 어렵지 않게 대입할 수 있는데, 드라마 역시 이런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극중 한 범죄자 이름이 ‘조두철’이다). <빈센조>가 마피아를 내세워 대기업의 횡포를 처단하고, <경이로운 소문>이 ‘카운터’들을 내세워 악귀들을 물리쳤던 것처럼 <모범택시>도 음지의 조직이 형사사법기관을 대신해 본인들의 방식으로 범죄자들을 응징한다. 이처럼 최근 한국 드라마에선 공권력이 부패하고 제기능을 못하는 것을 넘어, 그 자리를 사적 개인과 집단이 대체하고 있다.

재난과 범죄 장르의 성격을 지닌 한국 드라마나 영화가 무정부상태에 가까운 시스템의 무능과 부재를 표상하는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닐 텐데, <모범택시>는 시스템의 불가능까지 나아간다는 점에서 더 말할 여지가 있을 것 같다. 이를 잘 나타내는 인물이 장성철(김의성)이다. 그는 가해자들을 비합법적으로 단죄하는 ‘무지개 운수’의 리더이면서, 대외적으로는 범죄피해자 지원센터 ‘파랑새 재단’의 대표이기도 하다. 각각의 역할은 놀랍지 않지만, 두 역할을 함께 겸하고 있다는 점에서 후자의 한계를 드러낸다. 정성철은 가면을 쓴 정의의 사도인 셈인데, 그가 가면을 써야만 했던 이유에는, 법의 처벌과 국가적 지원만으로는 피해자들의 억울함과 범죄자의 뻔뻔함을 해결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자리한다. 사법제도의 사각지대에 놓인 국민의 법 감정을 대변해준다는 점에서 통쾌하지만, 그것이 통쾌하다는 점에서 씁쓸하다.



2. 

<모범택시>로 들어가기 위해 다시 한번 <경이로운 소문>을 빌려와야겠다. 두 드라마의 흥미로운 공통점은, 범죄자를 응징하는 인물이 개인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집단을 이뤄간다는 점에 있다. 그리고 이들은 주위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우리들’이다. 전 특수부대 장교인 김도기(이제훈)를 제외하면, 평범한 택시회사 직원들로 구성된 인물들은 <경이로운 소문>의 ‘카운터’들이 계급적으로 최상위에 있거나 시민들의 우상인 할리우드식 슈퍼히어로의 모습보다 동네에서 국숫집을 운영하는 등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였던 것과 닮아있다. 덧붙여 할리우드의 히어로들이 체제를 ‘대신’하여 외계의 적들과 싸울 때, 한국의 히어로들은 내부의 체제와 ‘대립’한다. 그렇다면, 시청자들이 기다리는 것은 외부의 적으로부터 시민들을 지키는 ‘영웅’이 아니라, 사회 정의를 실현하는 주체로서 연대하는 ‘시민’인지도 모르겠다.


3. 

최근 한국 드라마에선 삽화들의 중요성이 더욱 커진 것 같다. 메인 플롯이라는 줄기 위에 다양한 삽화들로 가지를 내는 것은 미니시리즈가 예전부터 자주 사용해 오던 방식이지만, 최근엔 삽화들이 메인 플롯 앞에 서는 듯 보인다. <모범택시>도 2회까지 무지개 운수의 구성원들과 주인공 김도기의 사연은 암시로만 등장할 뿐, 명확하게 알려주지 않는다. 감정이입의 대상이자 극을 끌어가는 인물들의 전사 없이 그들의 역할만 주어진 상태에서 삽화들이 서사를 주도한다. 그리고 이 삽화들은 정체되거나 탈선하는 법 없이 곧게 활주하는데, 악인들이 큰 무리 없이 주인공(들)에게 해결되는 ‘사이다’ 전개에서 오는 쾌감이 상당하다. 이는 사연의 여백을 사건으로 채워가는 것처럼 보이는데, 영상 콘텐츠들이 OTT 플랫폼에 맞춰 숏폼의 형태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한 시간짜리 미니시리즈들의 자연선택일지도 모르겠다. 2% 넘게 상승한 시청률은 시청자들이 이런 방식에 동의했다는 방증일 텐데, 나 역시 동의하지만, 한편으론 숨 가쁘게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장르물 사이에서 조용히 마음을 적시던 우리네 이야기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노파심이 교차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판단을 지연하여 도달하는 곳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