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리 Dec 14. 2023

길을 잃은 채로 쓰기

계속 쓰려는 자의 자기 위로

순전히 우연의 일치일 뿐 어떤 개연성도 있을 리 없겠지만 내가 막 불 붙인 불씨에 온 세상이 부채질해 주는 느낌이 드는 요즘이다. 부채질은 이를 테면 이런 것들이다.  내가 존경하는 (자칭) 글쓰기 스승님인 은유 작가님이 십여 년 만에 글쓰기 관련 신간을 내신다. 내가 좋아하는 매실 님(신나리 작가님)이 신간을 내시고 독자 한정 이벤트로 글에 피드백을 해 주시는 이벤트를 하신다. 동네 책방에서 은유 작가님을 초청한 북토크를 한다는 소식을 듣는다. 또 내가 좋아하는 이슬아 작가님이 오셔서 무려 '글쓰기'를 주제로 강연을 하신단다. 동네 책방에서는 글쓰기에 관심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글쓰기 모임을 운영할 예정이라고 한다. 한 이웃님으로부터 글쓰기 강의 정보를 얻는다. 심지어 내가 좋아하는 작가님이 글 스승이다.

내가 붙인 불씨는 이런 것들이다. 글쓰기 관련 책을 읽고, 좋아하는 작가의 북토크와 강연을 찾아다니고, 독자 피드백 이벤트에 참여하기 위해 미친 듯이 사적인 에세이 쓰기에 돌입하고, 내 글에 피드백을 받는 과정에서 글쓰기를 더 나아지게 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들을 점검했다. 마감과 피드백을 해줄 느슨한 글쓰기 공동체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무턱대고 온라인 글쓰기 모임을 만들었다. 참으로 감사하게도 세 명의 이웃님이 함께해 주셨고 순조롭게 글쓰기 모임을 시작했다. 동네 책방에서 주최하는 글쓰기 모임에 참여하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유료 글쓰기 강좌를 수강 신청했다. 그야말로 내게 주어진 일(생업과 가사, 돌봄 노동)을 제외하면 글쓰기만 남는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닌 삶이다.

내 안에서 이야기가 폭발하는 느낌이었다. 문장이 곧바로 다음 문장을 불러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면서 이야기는 끊임없이 흘러나와 금세 흰 화면을 시꺼멓게 채웠다. 쓰는 도중에 종종 글이 너무 길어진 것 같아 흠칫 놀라고, 도대체 무슨 말을 이렇게나 쓴 것인가 싶어 처음부터 다시 읽기를 반복했다. 내 속에 이렇게나 많은 이야기가 들어 있었는지 글을 쓰고 나서야 알았다. 그 사실은 놀랍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감탄할 만한 일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징그럽기도 했다. 조성모의 <가시나무> 속 가사가 대번에 떠올라서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A4 용지 분량으로 8~10매 정도 되는 글자들을 화면 앞에 몇 시간 동안 마주 보고 앉아 있으면, '이게 다 내 안에서 나온 거라고?' 하는 생각이 들어 아연해졌다.

내가 보기에 지나치게 사적이고 장황해서 도무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알 수 없는 기나긴 글을 누군가에게 보여주어야 한다는 사실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한 소설가의 말처럼 그것은 마치 익명의 사람들 앞에서 "하체를 드러내는 일" 같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일에 굉장한 열정을 바쳤는데, 그 과정을 통해 나는 내가 (글에 있어서) 일종의 노출증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리고 '노출증'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이러한 종류의 노출에도 윤리가 필요하다. 어렵지만, 나의 노출을 받아들이게 될 타인의 입장을 헤아려야 한다. 타인의 삶을 글에서 다룰 때는 더욱 신중해야 함은 물론이다. 이것은 매우 까다로운 일이다. 아무리 고민해도 명확한 답이 나오지 않는다.(결국 고민 끝에 "익명"의 가면 뒤에서 쓰는 방식을 택했다.)

스스로에게 최대한 솔직하게 쓰고자 노력하는 과정에서 겪는 딜레마를 안고 어떻게든지 해서 하나의 글을 완성하기 위한 고민으로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바람에 한동안 나는 스스로가 '나사 빠진 인간'이 된 것 같았다. 지금 쓰고 있는 글과 앞으로 써야 할 것들을 생각하느라 현실의 문제들은 뒷전이 되기 일쑤였다. 내가 쓴 글이 곧 내 세상이 되었다. 내가 쓴 글이 나를 글 속으로 빨아들였다. 나는 글 속에서도 글 바깥에서도 자주 길을 잃어버린 듯한 기분이 되었다.

글을 쓰면서 항상 생각한다. 나는 이 글을 왜 쓰고 있는가? 무엇을 '위해' 쓰고자 하는가? 어떤 목적이나 의도도 없이, 그저 '쓰고 싶다'는 열정에 사로잡혀 쓰는 글이 어떤 쓸모가 있을까? 스스로도 잘 알지 못하는 어떤 목적 또는 목적 없음의 글쓰기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대부분 나는 이 질문에 명확한 답이 없는 채로 쓴다. 쓰다 보면 목적이 또렷해지기도 하고 여전히 글을 완성하기 직전까지도, 심지어는 다 쓰고 나서도 내가 이 글을 왜 썼는지 모를 때도 있다.

그러나 내가 어떤 분명한 목적이나 의도를 따지지 않고 글을 읽기도 하는 것처럼, 내 글 또한 분명한 목적이나 의도 없이 쓰이면 안 된다는 법은 없다. 어떤 쓸모나 의미가 항상, 꼭 필요한 것도 아니다. 어떤 목적으로 글을 썼든, 글을 쓴 사람의 의도와 읽은 독자의 해석은 매우 달라지기 마련이다. 게다가 나는 종종 쓸모없다고 여겨지는 일들에 이끌린다.(책 읽기와 글쓰기도 그중 하나다.) 그런데도 내가 쓰는 글에는 항상 그 "쓸모"와 "의미"를 요구한다. 의도가 명확하고 논지가 탄탄한 글의 쓸모 있음은 말할 필요도 없이 자명하다. 그런 글은 종종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관점, 태도와 행동을 변화시킨다. 그건 대단한 쓸모다. 하지만 의도가 명확하지 않고 쓸모를 알 수 없는 글이 갖는 쓸모도 있을 것이다. 엉킨 생각의 실타래를 슬슬 풀어나가듯 문장과 문장을 이어 글을 써 나가다 보면, 글을 시작할 때는 내 안에 있었는지도 몰랐던 생각이 새로이 발견되기도 한다. 새로운 생각을 발견하는 일은 곧 새로운 나를 발견하는 일이다. 문장이 나를 새로운 나에게로 데려다 주기를 빌면서, 오늘도 목적이 분명하지 않은 글을 쓴다. 문장에 기대어, 이 쓸모도 목적도 없는 문장을 세심하게 읽어 줄 몇몇의 동료와 독자에 기대어.


p.s. 글쓰기는 고독한 작업이지만, 분명히 혼자'만'으로는 절대로 지속할 수 없는 일이 맞는 것 같다. 두서없이 쓰인 이 글을 읽을 독자들을 생각하며 결국 써냈다는 사실이 그것을 입증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