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리 Dec 24. 2023

새 차를 살 때 내가 떠올리는 것들 1

나도 중산층이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 집에는 차가 두 대 있다. 하나는 남편이 결혼 전부터 굴리던 회색 카이런이고, 다른 하나는 내가 결혼 전부터 굴리던 하늘색 스파크다. 나는 이걸 2013년에 출퇴근용으로 샀다. 직장생활을 시작한 지 약 3년쯤 되던 때였다. 그전에는 15년 된 자주색 라노스를 90만 원을 주고 사서 끌고 다녔었다. 그 차가 오래된 차라는 건 겉모습만 보면 모두가 알 법한 비주얼이었으나, 사람들은 왠지 그 차가 15년 넘은 차라는 사실보다는 내가 그 차를 90만 원에 샀다는 사실에 유독 더 놀랍다는 반응을 보이곤 했다. ‘90만 원을 주고 산 차’라는 사실은 그 차의 오래된 외양을 감안하더라도 새삼스럽게 놀라울 만한 가격이었던가 보다. 나는 그 차를 처음 시승했을 때, 그 차가 90만 원이라는 사실보다 멀쩡히 굴러간다는 사실이 더 놀라웠다.


내 첫 차이자 이미 오래전에 폐차장의 고물이 되어버린 그 라노스는 공채 시험을 합격하고 약 반년쯤 뒤에 P군으로 발령이 나자 출퇴근용으로 쓰려고 급하게 구한 거였다. 당시에 내 수중에 모아둔 돈이라고는 한 푼도 없었다. 부모님께 지원을 받거나 개인적으로 빚을 내서 차를 구입해야 할 형편이었다. 부모님은 직장 생활과 운전을 처음으로 시작하는 나를 위해 이 ‘멀쩡한’ 중고 라노스를 사주셨다. 내가 살던 곳에서 P군까지 약 한 시간이 조금 더 되는 장거리 운전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이제 막 운전을 시작한 생초보에게 이만큼 제격인 차는 없다며. 물론 이것은 충분히 복에 겨운 일이다. 비록 모두가 놀랄 만큼 파격적인 가격의 차라고 할지라도 부모님이 그 돈을 지원해 줄 수 있을 만큼의 경제적 여유가 있다는 건, 내가 그만큼 운 좋은 조건을 타고났다는 말이니까.


그러나 여태껏 나는 내가 경제적으로 안정된 가정에서 운 좋게 태어났다고 생각해 본 적이 거의 없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우리 집에서 외식이라는 건 아주 특별한 일이 있는 날이 아니고서야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고 피자나 치킨 같이 당시에도 흔했던 배달 음식도 마찬가지였다. 나와 동생들은 늘 피자 한 조각을 더 먹기 위해 목숨 걸고 싸웠다.(여기서 건 ‘목숨’이란 과장된 표현이기는 하지만 어느 정도는 맞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정말로 격하게 싸웠고 그건 곧 어머니의 불호령이 떨어질 가능성이 매우 높았기 때문이다.) 우리 부모님은 매우 검소한 생활을 했다. 검소하다는 판단 역시 상대적이겠으나, 내가 보기에 나와 비슷하게 사는(것처럼 보이는) 다른 집들과 비교해 보면 우리 집에는 없으나 다른 집에는 당연하게 있는 물건들이 많았다. 같은 아파트 옆 동에 사는 친구의 집에 놀러 가면 그 집에는 있는데 우리 집에는 없는 물건들부터 눈에 쏙 들어왔다. 바닥에 깔린 러그나 카펫, 소파와 침대 같은 것들. 그것들은 일제히 내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했다. 너희 집에는 이런 거 없지. 이래도 너희 집이랑 우리 집이 비슷하게 사는 거 같아?


당연하게도 용돈은 늘 부족하거나 없었다.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우리 집이 보통의 평범한 다른 집(그때는 그런 게 정말로 존재한다고 믿었다.)에 비해 가난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이해했다기보다는 직감했다. 학교가 끝나면 삼삼오오 친구들끼리 모여 학교 앞 문방구에 들러 각자 용돈을 꺼내 군것질거리를 사 먹는 일은 그 당시 모두가 공유했던 문화 중 하나였다. 예외는 없었다. 내가 아는 내 또래 모두가 그렇게 했다.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내 용돈이 언제나 부족하거나 아예 없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나는 함께 하교하는 친구들의 군것질 쇼핑이 끝날 때까지 문방구 앞에서 쭈뼛거리며 기다렸고, 그런 나를 조금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을 느꼈던 몇몇 친구들은 내게 몇 번인가 군것질거리를 사주는 호의를 베풀기도 했다. 처음에는 그런 호의를 받으면 횡재라도 한 듯 기뻤고 그 친구의 등 뒤에 샤방한 날개라도 팔락거리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으나, 그런 호의가 몇 번씩이고 반복되면서 점점 스스로가 하염없이 비루하게 느껴졌다. 나는 왜 돈이 없는가. 나는 왜 저 아이들처럼 하굣길에 백 원, 이백 원이 없어서 이렇게 함께 하교하는 친구에게 얻어먹는 처지가 되었나. 용돈을 적게 주는 부모님을 원망도 해 보았지만, 그 원망은 그리 오래가는 법이 없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의 경제관을 무의식적으로 체득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단순히 ‘안다’라기보다는 내가 알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인지하지 못하는 수준의 무의식적인 앎이라서, 나는 내 용돈의 부족함을 부모님께 호소하거나 원망을 토로할 생각조차도 하지 않았다. 나에게 선택지는 없었다. 그저 문방구 앞에서 다른 아이들이 군것질 쇼핑을 하며 떠들썩하게 즐거워하는 모습들을 나와 무관한 어떤 풍경처럼 멀찍이 떨어져서 구경하면서 친구의 쇼핑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일밖에는.


그러나 점점 친구와 함께 집에 돌아가는 길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친구가 매일 나에게 호의를 베풀어줄 만큼 용돈이 넉넉한 것도 아니라면 더더욱. 언제부턴가 친구의 호의가 끊기고 그 친구는 늘 그렇듯이 군것질 쇼핑을 즐기고 난 뒤 그 결과물을 우물우물 씹고 있는데, 내게는 입에 넣고 씹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명백한 차이가 나와 친구의 사이를 점점 벌려놓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나는 너와 달라. 나는 너와 계속 친구가 될 수 없을지도 몰라. 그래서였을까. 나는 언젠가는 친구가 나와 함께 하교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다른 친구와-하굣길에 당연하다는 듯이 함께 군것질 쇼핑을 하고 그것을 함께 우물거리며 편안하고 즐거운 대화를 할 수 있는 친구와-집에 돌아가겠다고 선언할지 모른다는 공포를 느꼈다. 친구가 아무것도 우물거리지 않는 나와 함께 하교해 준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나는 크게 안도했다.




*다음 글에 이어집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