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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공부를 싫어해도 괜찮을까

‘엄마표’ 공부를 시작하고 만난 질문

by 서리

지난 3월에 유치원 선생님과 상담했을 때, 아이들이 전반적으로 많이 뒤처진 상황인데 이제는 일곱 살이 되었고 내년이면 초등학생(이 말의 무게가 참 무겁다...)이 되니까 부모님께서 학습면과 생활면 전반에 경각심을 더 가지고 집에서도 더 푸시해주셔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더 자세히 말해보자면 이런 얘기들이다. 일곱 살이 되었는데도 자기 할 일을 빠릿빠릿하게 하지 않고 한눈을 판다든가, 딴짓을 한다든가 해서 단체생활 규칙을 따르는 데 어려움이 많다는 이야기, 아직 소근육 발달이 느려서 선을 똑바로 긋기 어려워한다는 이야기 등등... 어느 정도는 집에서 생활하는 모습을 통해 짐작하고 있었던 이야기였는데도, 유치원 선생님의 입을 통해 전해 들으니 얼굴이 새삼스레 얼굴이 화끈거렸다.



우리 아이들은 어렸을 때부터 모든 발달이 늦었기 때문에 늦는 건 딱히 걱정할 만한 일이 아니었다. 그전까지는 뭐, 한글이야 때 되면 알아서 떼겠지, 싶었고 유치원에서 한글이랑 수학 학습지도 풀어 오는 듯해서 괜찮겠거니 싶었는데, 정반대의 이야기를 들으니 냉수마찰이라도 한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유치원 선생님은 놀라는 내 반응에 웃으며 말했다.


“어머님이 저보다 더 전문가이시잖아요. 하하...”


그 웃음 속에는, 어쩌면 내가 감당하지 못한 책임에 대한 무언의 지적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엄마로서 너무 안이했던 거 아니야?’ 오랫동안 깊이 가라앉아 있었던 그 생각이 의식의 수면 위로 떠올라 불안의 머리채를 쥐고 흔들었다.



그날 저녁 인터넷을 뒤져 문제집을 주문했다. 문제집이 도착한 날부터 매일 유치원에서 돌아온 아이들을 붙들고 하루에 2장씩 선긋기/한글 문제집을 풀렸다. 매일 유치원에서 내주는 독서 과제까지 마치면 거의 한 시간이 흘러간다. 이렇게 3월부터 거의 두 달 남짓을 선긋기에서부터 시작해 한글 문제집을 풀어왔다.



맞다, 이건 사람들이 흔히들 말하는 '엄마표' 공부다. 엄마표 수학, 엄마표 영어, 엄마표 독서교육... '엄마표'라는 말이 붙은 다종다양한 공부들은 학원을 보내지 않고 엄마가 아이와 집에서 하는 모든 공부에 붙을 수 있는 딱지다.



그토록 많은 엄마표 공부들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왠지 주눅이 든다. 마치 엄마라면 응당 아이를 위해 이런저런 공부를 안내하고 조력해주어야 한다는 압박이 느껴지니까. 누가 칼 들고 협박하냐고? 아니다, 세상의 수많은 일은 누가 칼 들고 협박하기 때문에 일어나지 않는다.



아무튼 나는 선생님과 상담 이후, 그동안 거의 방치하다시피 했던 아이들 한글 교육에 열을 올리고 있다. 하루에 20분, 학습지 두 장 풀리는 거 가지고 뭘 그리 대단한 공부냐고 묻는다면, 그 말도 맞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로 '별 것 아닌 일'로 느껴지느냐는, 각자의 처지에 따라 다를 것이다.



이전까지 나는 본인이 흥미를 느끼기 전에는 강제로 공부를 시키지 않으려는 나름의 '개똥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서 '철학'이란 여러 경험과 고민을 통과한 나만의 논리적 결론의 집합체다. 그런데 왜 그 앞에 '개똥'이 붙었느냐면, 지나치게 개인적 경험에 의존하고 있는 데다 논리도 부실한 이 생각을 '철학'이라고 부르기엔 양심에 찔리기 때문이다...



다행히 아이들은 '엄마표' 한글 공부를 싫어하지는 않는다.(아직까지는 그렇다...) 만약에 싫어하게 되면 어떡하지? 이것이 요즘 육아에 있어 내 아킬레스건이다. 아마 아이들이 공부를 싫어하게 된다면 땅을 치고 후회할 거다. 그러면 왜 이걸 하고 있느냐? 이유는 많다. 선생님이 하라고 하니까, 다른 집도 다 이 정도는 시키니까(안/못 시키는 집은 비교 대상에서 제외한다.), 우리 아이들만(?) 뒤처진다는데 그럼 우리 아이들이 너무 짠하니까...



결국 가장 강력한 이유는 "아이들을 위해서"라는 말로 함축된다. 정작 여기에 당사자인 아이들의 의사는 빠져 있다는 사실이 불편하지만, 살짝쿵 눈을 감자. 지금은 몰라도, 나중에는 내 뜻을 알아주리라고, 이해해 주리라고 믿자. 그렇게 스스로를 속이며 애써 불안을 잠재우자. 공부를 시켜도 불안하고 안 시켜도 불안한 상황 속에서, 문제를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의 구도로 단순화해서, 하고 후회하겠다는 선택을 했다는 식으로 자기기만을 정당화하자.



지난번 독서모임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더니, 어떤 분께서 "아이가 공부를 꼭 좋아해야만 하는 걸까요?"라는 질문을 하셨다. 내 고민의 전제를 묻는 질문이었다. 생각해 보니 그동안 아이들이 공부를 싫어하게 될까 봐 전전긍긍하면서도 "공부를 좋아해야 한다"는 전제이자 신념은 한 번도 의문에 부쳐본 일이 없었다. 나는 왜 아이들이 공부를 좋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걸까?



답을 찾아보려고 내 어린 시절을 되돌아보았다. 공부는 때로 재미있었지만 대체로 재미있지 않았다. 공부가 재미있었던 적은 정말 잠깐이고, 대부분의 공부는 시험 점수를 위해 억지로 해야만 하는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잘하면 본전이고, 망치면 부모님께 혼날까 봐 벌벌 떠는 강제 노역 같은 것.



내 지금 모습도 생각해 보았다. 내가 하는 공부라고 해봐야 관심 있는 분야의 책을 읽고 생각을 정리하고 모임에 참여하고 강의를 듣는 일들을 설렁설렁하는 것뿐이다. 이렇게 쓰고 보니 뭔가 공부를 엄청 열심히 하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내가 하는 공부라고 해봐야, 그저 좋아하는 주제의 책을 읽고 생각을 곱씹는 일이다. 대부분의 시간은 여전히 웹툰이나 지피티에게 뺏기지만 말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학창 시절 부담감과 두려움에 시달렸던 입시를 위한 공부와 지금 내가 하고자 하는 공부는 많은 면에서 매우 다르다는 사실이다. 억지로 했던 공부와 하고 싶어서 하는 공부라는 표면적인 차이도 있지만, 전자는 높은 점수-상위권 대학-좋은 직업으로 이어지는 인생 과업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공부라면 후자는 공부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자기 갱신 효과 그 자체가 목적인 공부다. 무엇을 위한 공부가 아니라, 공부하는 과정 자체가 목적인 공부.



나는 공부를 좋아한다기보다, 새로운 것을 알아가는 행위로서의 공부가 내 삶을 흘러가게 하는 힘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일은 그 힘을 가장 선명하게 느끼게 해 준다. 어떻게 보면 참 쓸쓸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나는 점점 더 사람들과 더 적게 만나고, 더 오랜 시간을 혼자 읽거나 글을 쓸 생각을 하면서 보낸다. 외로움이 나와 가장 친한 친구이자 동거인이다.



그러나 이런 삶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지 않다. 이것들이 없으면 나는 지탱되지 않는다. 내 정신적 뿌리가 책과 글쓰기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공부를 하고 지식과 관점이 갱신될 때의 희열은 살아 있다는 느낌을 준다. 그 순간,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살아 있다.



아이들이 공부를 좋아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다시 대답해 보자면, 그 공부가 무슨 공부냐에 따라 다르게 답할 것이다. 입시를 목적으로 하는 공부라면, 좋아하지 않아도 된다고 답할 것이다. 그건 내가 어쩔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하고.(나도 대부분의 학창 시절 내내 공부를 싫어했는데 무슨 수로 아이들이 공부를 좋아하게 만들 수 있단 말인가.) 그러니 아이들이 공부를 싫어해도 된다.



그러나 그 공부가 삶을 갱신해 나가는 과정으로서의 공부라면, 아이들이 공부를 좋아하고 싫어하는 문제는 무의미하다. 아이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자기 삶을 갱신해 나갈 테니까.



마지막으로, “아이가 공부를 싫어해도 괜찮다”는 문장은 결국 나 자신을 위한 한 줌의 위안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두고 싶다.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시작한 엄마표 공부는, 결과적으로 또 다른 불안과 불확실함을 만들어내고야 말았다.



그럼에도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나의 불완전한 선택이 설령 만족스러운 결과로 이어지지 않더라도, 아이들을 탓하거나 실망하지 않기 위해서다. “아이들을 위해서”라는 말 뒤에 숨어서 “나는 최선을 다했다”라고 변명하고 싶지 않다. 전적으로 내 탓도, 아이 탓도 하지 않으면서 불안을 견디는 명쾌한 해결책은 없다. 그러므로 이 글쓰기는 나를 위한 미봉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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