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이 되자 비가 그쳤다. 남편이 갑자기 바다에 다녀오자고 제안했다. 저녁을 먹을 때여서 간단히 먹을 것을 챙겨 집을 나섰다. 차로 20분을 달리면 해변에 닿을 수 있다. 내가 이 도시에 오래 머무르기로 마음먹은 이유 중 하나다. 20대가 끝나갈 무렵, 아무 연고도 없는 이곳에 와서 불확실한 미래와 가능성 때문에 질식할 것 같았던 주말에는 혼자서 이 바다를 찾았었다. 구름 한점 없이 화창한 한낮의 여름이었다.
바다가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차를 주차해 놓고, 햇빛에 눈부시게 반짝거리는 윤슬의 움직임에 시선을 가져다 두었다. 몇 시간이고 하염없이, 이런저런 생각을 뒤적거렸다. 주로 지나간 사람들, 시간들을 다시 붙들고 싶은 미련한 마음 때문이었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들을 그리워하기에 알맞은 장소였다. 영화가 끝나고 모두가 돌아간 후에도, 혼자 남아서 엔딩 크레딧이라도 끝날 때까지 다 보고야 말겠다며 고집스럽게 자리를 지키고 앉은 사람 같았다. 끝이 났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과 마음을 쏟아부을 혼자만의 장소가 필요했다.
적막. 음악. 에어컨 바람. 차 엔진 소리. 헤어진 연인의 음악 취향. 몇 주 전 지인의 결혼식에서 나를 보던 그의 표정. 눈맞춤. 서둘러 스쳐지나가는 몸짓. 걸음걸이. 그가 보낸 메시지의 의미를 해독하려 뒤척이던 밤들. 머리를 쥐어짜며 답장을 쓰고, 망설이다 보내고 후회하며 머리를 쥐어짜던 마음 같은 것들. 뻔하디 뻔한 것들. 어떻게 그렇게까지 마음을 쏟을 수 있었는지 이제와서 의아한 것들. 다시는 그런 방식으로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지는 못할 것 같다는 예감에 사로잡혔던.
그리고 그 예감은 틀렸다. 당신도 이미 짐작하고 있을 법한 뻔한 이야기. 나는 이제 애 둘 딸린, 낼모레 마흔 살 기혼여성이고, 그 사실마저 별 감흥이 없을 만큼(슬프지도 기쁘지도 않다) 세월이 흘렀다.
거의 십 년 만이었다. 이곳에 온 것은.
비가 많이 온 뒤라 구름이 많았다. 해는 그림자도 보이질 않고, 노을은 구름에 가려 흔적조차 희미했다. 그래도 좋았다. 바닷바람이 시원하게 팔다리를 훑었다. 바다가 우릴 맞아주는 것 같다고 느껴질 만큼 시원하고 포근한 바람이었다. 아이들은 신이 나서 데크길을 뛰어다녔다. 이따금 부지런히 집을 짓고 있는 거미들을 만나기도 하고, 우리처럼 산책을 나온 것인지 알 수 없는 게들을 쫓기도 하면서. 나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다시는 이런 방식으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없으리라는 오래된 예감을 새로이 떠올렸다.
바다의 바닥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바닷물이 없어도 그곳은 여전히 바다였다. 한낮의 햇빛도, 반짝이는 윤슬도, 파도도, 물결도 없었지만, 그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아쉽지도 않았다. 오히려 신비로웠다. 바닥을 드러냈어도 내 감각은 이것을 갯벌이 아니라 바다라고 호명하고 있었다. 출렁이는 물결도 파도소리도 반짝이는 빛도 없는 고요한 침묵 같은 바닥을 보며 생각했다. 이것이 바다의 바닥이구나. 그리고 이것은 여전히 바다로구나. 내가 그동안 보지 못했을 뿐. 그것은 반짝이는 윤슬 아래, 굽이치는 파도 아래, 늘 그곳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