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우리에게 남는 건
'작가님'에서 '주사님'(6급 이하는 다 그렇게 부른다고 한다)이 된 지 두 달이 다 되어 간다. 새로운 호칭에 익숙해지기에는 너무도 짧은 시간이라 아직도 사무실에서 누가 나를 불러도 대답을 잘 못한다. 어제는 번호를 저장해 놓지 않은 동료에게서 전화가 왔는데,
"주사님, 통화 가능하세요?"
"네? 저요?"
바보처럼 되물었다.
임용(이라는 말도 진짜 낯설다...) 후에 한 달이 채 안 되었을 무렵 공무원증을 받았다. 이제 사무실 문도 열고 구내식당에 가서 점심도 먹을 수 있다고 했는데 정작 나는 다른 곳에 그걸 제일 먼저 써먹었다.
-(공무원증 사진 전송)
-선배, 저 공무원 됐어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뭐야? 어디야?
5년 전에 만난 선배는 시도 때도 없이 '우리 작가님 최고'라며 당시 무지하게 방황하던 나를 바른길로 인도해 주었다. 그는 나보다 2년 먼저 업계를 떠났고 지금은 방송과 거리가 먼 일을 하고 있다.
-OO일, OO일, OO일 중에 언제 시간 돼? 서울 올라와. 밥 먹자.
두 계절 만에 선배를 만났다. 우리는 늘 그렇듯 안주가 나오기도 전에 시원한 술을 연거푸 들이켰다.
"어때? 할만해?"
"아니요?"
주저 없는 나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의 선배가 마주 보고 낄낄 웃었다.
"선배는 어때요?"
"얼마 전까지 바쁘다가 며칠 전부터 한가해졌어."
"저는 요즘 좀... 바보가 된 것 같아요."
"왜?"
"저 아예 뉴스를 안 보거든요. 이재명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 1심 유죄 나온 것도 남편이 말해줘서 알았어요. 세상 돌아가는 걸 하나도 몰라요. 그럼 뉴스를 보면 되잖아요? 근데 안 봐요. 보기 싫더라고요."
"나도 그래. TV 안 본 지 너무 오래됐어."
5년 전의 우리는 5년 후에 우리가 이렇게 될 거라고는 꿈에도 몰랐겠지. 주문한 안주가 나왔지만 선배도 나도 술잔만 손에 쥐고 있었다.
"방송할 때는 출근하면 퇴근할 때까지 계속 뭔가 해야 했잖아요. 우리 막 화장실도 못 가고 그랬잖아요. 근데 지금은 안 그렇거든요.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시간이 오면 어쩔 줄을 모르겠어요."
잠시 말이 없던 선배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도 그럴 때 있어. 내 자리가 창가에 있거든? 그럼 창밖을 이렇게 내다 본다? 사실은 창에 비친 나를 보는 거지. 보면서 생각해. 여긴 어디지? 내가 지금 뭘 하는 거지?"
지금도 가끔 꿈을 꾼다. 꿈속에서 나는 원고를 넘겨야 하는데 울상이 돼서 빈 화면만 보고 있기도 하고 다 쓴 원고를 저장 안 해서 소스라치게 놀라기도 한다. 그런 꿈을 꾼 날이면 종일 생각한다. 다시 방송국에 가고 싶은 건가. 그건 아닌데. 난 진짜 할 만큼 했는데. 대체 왜 이런 꿈을 꾸는 걸까.
나는 선배에게 오랫동안 궁금했던 질문을 내밀었다.
"후회하세요? 방송국 나오신 거요."
"글쎄. 후회해서 뭐 하겠어. 지금 있는 곳이랑 방송국을 비교하는 게 의미가 있을까. 그때 그렇게 바쁘게 살았으니까 지금 이렇게도 살아보는 거지."
선배다운 현명한 대답에 나도 나이를 먹으면 선배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늦게 합류한 동료들과 다 같이 연말 선물도 주고받고 세상 실현 가능성 없는 사업 계획도 세우고 집에 오려고 예약한 기차표를 두 번이나 취소하고 나서야 자리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선배에게 건넨 후회하냐는 바보 같은 질문의 답은 사실 나도 알고 있었다. 심지어 크리스마스카드에 직접 쓰기까지 했다.
-작가로 일했던 시간이 지금은 전생 같이 느껴져요. 그럼 또 허무해지다가도 선배를 생각하면, 선배 덕에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된 건 확실하니까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올해도 감사했어요.
사진 출처
https://greenfield.com.ph/how-to-peacefully-celebrate-christmas-in-your-condo-in-mandaluy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