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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냇물 Nov 18. 2024

[중동11] 탄생날이 전쟁날

유대국가 탄생날에 전쟁발발

유대왕국이 멸망된 뒤 유대인들은 이베리아로, 유럽 여러 국가들로, 남미로, 북미로 뿔뿔이 흩어져 살게 되었다.     


2,000여 년 가까이 세계 곳곳에 흩어져 유랑생활 -̵ 이산(Diaspora)의 역사 속에서도 신앙공동체를 유지하며 힘겹게 살던 유대인들에게 충격을 준 사건이 있었다. 뒤레퓌스 사건이다.


1894년 프랑스에서 대외 군사기밀 유출사고가 있었는데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특별한 범죄증거도 없는 뒤레퓌스 대위를 반역죄로 종신형에 처한 후 '악마의 섬'에 유배했다. 

한 젊은 장교가 진범을 적발하고 무죄를 주장했으나 군 수뇌부는 사건을 은폐하고 오히려 고발자를 좌천시켰다. 이에 '실천하는 지성' 에밀졸라까지 뛰어들어 정부와 여론을 질타하였다.

프랑스는 자유주의와 반유대주의로 양분되어 극렬한 진통 끝에 1906년 그는 무죄판결을 받았고, 이 사건을 취재하던 유대인 기자는 큰 충격을 받아 국가의 필요성을 뼈저리게 느끼고 '시오니즘' 운동을 시작하였다.


***시오니즘(Zionism) : 유대인들의 민족국가 건설을 위한 민족주의 운동. 그들의 조상 땅인 팔레스타인에 국가를 건설하려는 운동으로 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함으로써 실현


이것이 이스라엘 건국의 모멘텀이 되었다. 1897년 스위스 바젤에서 제1회 시온주의 세계대회 이후 본격적인 유대인 국가 건설작업이 시작되었다.(국가명칭과 국기를 채택)


그 무렵부터 팔레스타인 지역에는 개인자격으로 이주를 시작해 1914년까지 10만 에이커의 땅을 확보하고 로 8.5만 명이 거주하게 되었다.


1차 대전 기간 중 영국의 맥마흔은 아랍인 독립국가를, 발포어는 유대민족 독립국가를 건설지원한다는 모순적 약속을 해 양 세력을 갈등, 격화시켰다.

그러나 전승국으로 국제정세를 리드하던 영미 주도로 1922년 국제연맹'발포어 선언'을 인정, 1947년 팔레스타인 분할 안(영국의 위임통치 포함) 가결 등의 조치로 독립의 밑자락을 깔았다.


드디어 영국의 위임통치 종료 하루 전인 1948년 5월 14일 16:30에 이스라엘은 독립을 선포하였다.    


팔레스타인들은 날벼락을 맞았다. 2,000여 년 동안 살던 땅에 갑자기 다른 민족이 들어와 나라를 만들다니...

팔레스타인은 물론 주변 아랍인들도 격앙했다.


독립선포 다음 날인 1948.5.15 주변 5개 아랍연맹군(이집트, 시리아, 요르단, 레바논, 이라크) 일제히 공격을 개시했다.


아랍군의 무기장비가 우세했으나 이스라엘은 전 국민이 참전하여 결사적으로 항전했고, 사우디가 뒤늦게 참전했다.

'팔레스타인 전쟁(=1차 중동전쟁)'이라 불리는 이 전쟁은 8개월 동안 3차에 걸친 전투를 벌였으나, 이스라엘은  자신들보다 40배나 인구가 많은 아랍국들과의 전쟁에도 불구하고,


국민의 정신적 단결, 리더들의 탁월한 지휘통솔력을 바탕으로 가습과 선제공격의 원칙을 잘 활용하여 전장 곳곳에서 수적우위를 유지하여 전투를 유리하게 이끌었다


전쟁이 끝났을 때 이스라엘은 영토 40% 더 확보했고, 해외에서 10만 명의 유대인이 유입되었다.


반면 팔레스타인에서 밀려난 100만 명의 아랍인 유랑자가 발생했고, 저항조직 '하마스'가 만들어졌다. 

*** 하마스(Hamas) : 가자지구를 실효지배하고 있는 팔레스타인의 이슬람주의 정당, 준군사조직 또는 테러단체. 하마스는 '이슬람 저항운동'의 의미를 가진 말임.

이는 두고두고 팔레스타인은 물론 중동지역 갈등의 핵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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