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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나무 Feb 25. 2022

언어영역은 언제나 100점

방학이면 호텔에서 공부하는 아이들

"영어는 국어랑 점수가 같이 가요."

영어 과외를 상담하면서 내가 학부모와 학생에게 꼭 질문하는 것이 언어영역 점수이다. 국어를 잘한다는 것은 책을 많이 읽었다는 이야기로 해석되거나  이해력 즉 문해력이 뛰어나다는 말이다.


그동안 가르쳤던 많은 학생들 중에 언제나 언어영역이 백점인 학생이 있었다.


성남의 한 재개발지역에 오래된 집이 즐비해있던 한 작은 골목 2층 집이었다. 그 학생은 그동안 과외나 학원에서 수업을 받은 적이 없이 고3까지 오로지 학교 공부와 EBS 강의에만 의존하여 공부를 해왔다고 했다. 고3이 되면서 다른 과목은 그런대로 괜찮았지만 영어가 잘 오르지 않아서 과외를 구하기 마음먹었고 처음 해보는 과외수업에 아버지도 어머니도 학생도 내가 수업하러 나타나기만 하면 대단한 손님을 대접하듯 대해주셨다.


아버지께서는 대기업 사모님의 운전기사로 일하셨는데 그래서 그런지 무엇인지 모를 젠틀함이 묻어있었고, 어머니는 마트에서 계산원으로 일하고 계셨다. 외동딸인 나의 학생 세경이는 성격이 내성적이고 친구도 그다지 많지 않으며 학교가 끝나면 곧장 집으로 와서 아무도 없는 집에서 혼자 공부를 하거나 독서를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고 했다.

 

수업을 진행하고 두 달 후쯤 모의고사가 있었는데 생각보다 등급이 많이 올라서 나도 놀랬다. 영어를 아주 못하는 편이라기보다는 그동안 관리를 받으면서 체계적으로 공부하지 않아서 자신이 진정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문제집만 풀고 있었고 틀린 문제를 대충 분석하였기 때문에 언제나 비슷한 등급을 왔다 갔다 거렸다.

짧게 과외수업을 한 것 치고는 등급이 잘 나와서 나도 기분이 좋았지만 부모님이 너무 좋아하셨다.


"세경아 이번에도 언어영역이 만점이야?"


이번 모의고사에서는 그동안 지문 길이의 두배 정도가 되는 어려운 비문학 지문이 나와서 나의 다른 학생들이 당황을 하여 지문을 다 읽어내지 못하거나 시간이 모자라서 등급이 다들 내려가 있었다. 그러나 오직 세경이는 이번에도 만점이다.


"세경아 그게 가능한 일이니? 애들은 국어 지문이 너무 길어서 못 읽어내고 문제가 그 다음장까지 넘어가서 풀기가 힘들었다던데..."


"네... 뭐 저는 그냥 좀 길어서 당황하긴 했는데요. 천천히 봤어요."


"너는 국어학원도 안 다니는데, 책을 많이 읽었니? 넌 어떤 책이 제일 좋아? 좋아하는 책이 있어? "


이 질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세경이는 대답을 했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이요."


아... 보통 학생들에게 물어보면 일순위가로 이야기하는 해리포터나 요즘 베스트셀러가 아닌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세경이는 그 소설을 너무 재미가 있어서 읽고 또 읽는다고 했다. 읽을 때마다 다르고,  항상 새로운 것을 발견한다는 말에 세경이의 책장이 궁금해졌다.


사실 세경이의 집은 재개발로 인해서 얼마 후에 다른 집으로 이사 예정이라 항상 과외수업을 거실에서 작은 상을 펼쳐놓고 했었다. 집이 정리 중이라서 자신의 방이 지저분하다며 보여준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날은 책장을 보여달라고 졸랐다.


"별거 없는데, 선생님 5분만요. 조금 치울게요."


5분이 지나 그녀의 방으로 들어갔을 때 나는 역시나 답은 독서구나 싶었다.

작은 방안에 나름 규칙이 있는 모양으로 쌓여있는 수백 권의 고전소설들과 장르가 다양한 비문학 책들이 바로 언어영역 백점의 비결이었다. 세경이는 그냥 다독이 아니라 책을 정말 좋아하는 마음이 있는 아이였다. 시험이 있어도 피곤해도 하루에 한쪽이라고 읽고 생각하는 습관은 그 아이의 우주를 무한하게 펼쳐준 자양분이었고, 가보지 못하고 해보지 못했던 모든 간접경험을 생생하게 뇌리 속에 그려보는 상상력과 창의력의 샘이었다.

세경이가 가장 좋아하는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은 여러 출판사의 버전을 소장하고 있었고 읽고 또 읽은 흔적들이 책 곳곳에 보였다.


"안 읽은 것도 많아요. 책 욕심이 있어서요. 중고서점 가면 한두 권씩 사 와요."


"그래 세경아. 그래서 네가 언어영역이 백점인 거야."


어느 시기부터인가 영어, 수학학원을 다니는 아이들만큼이나 논술과 국어학원을 다니는 아이들이 많아졌다. 학교의 내신국어도 많이 어렵고 모의고사, 수능의 지문들은 어디서 보지도 못한 개념들의 비문학과, 제목만 어렴풋이 아는 문학이 나와 그것을 읽어 내기도 힘들고 이를  이해하고 푸는 문제도 너무 어렵다. 무엇보다도 그 방대한 양의 지문을 끝까지 읽어내는 능력은 평소 긴 글을 읽는 습관이 안되어있는 아이들에게는, 아니 어른들에게도 만만치 않은 일이다. 게다가 초중고를 다니면서 글을 쓰는 습관이나 기회가 많지 않아서 글을 잘 쓴다는 것은 원래 필력을 타고나거나 학원 등에서 글을 쓰는 방법을 배우지 않고서는 학교에서 일일이 첨삭을 해주는 기회가 거의 없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자신의 글을 보여주고 평가받는 것이 매우 낯선 것이 현실이다.


 교내 백일장 등에서 일 년의 한두 번 있는 행사로 학교 주위에 위치한 공원으로 가서 글의 주제를 주고 백일장에 참여하라는 것은 그저 많은 아이들에게는 공원에 김밥을 싸가서 잠시 바깥바람을 쐬는 행사일 뿐이다. 그리고 국어책에 나와있는 지문은 소설의 일부나 어느 논문이나 시의 일부만 나와있어서 그 안에서 만들어진 문제를 푸는 형식이 되므로 하나의 온전한 글을 읽고 글을 생각해보는 기회가 없는 것이다.


 국제학교 아이들의 수업 방법을 보고 한국의 방식과 조금 다르다고 생각했던 부분은 책을 온전히 다루는 수업과 일정한 양의 책을 읽은 후 그 안의 내용으로 이루어진 문제를 컴퓨터로 풀어내 학교 성적에 반영하는 방식이었다. 한 학기에 한두 권을 깊게 다루면서 요약은 물론이고 나오는 인물에 대한 자세한 분석을 통해 이야기에서 삶의 지혜를 학생 자신이 이끌어 내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책을 읽고 장면을 그려본다던지 인물이나 사건에 대한 학생의 생각을 발표하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다. 이러한 수업은 한 반에 10-15명 내외의 학생들의 에세이를 한 선생님이 첨삭해야 하는 일이라 우리나라의 학생과 선생님의 비율로는 어려울 수도 있지만 불가능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책을 사랑하고 글을 좋아하는 나의 입장에서 책을 읽어야만 국어 점수가 올라간다는 생각으로 아이들에게 책 읽기를 강요하거나 책을 읽는 것이 조건에 의한 행위가 안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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