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과 달걀의 얘기를 해보자.
일부 물리학자는 세상만사가 물리의 구조에 속해 있으며, 그들은 철학을 밟고 학문의 최정점에 서 있다고 생각한다. 세상은 물리의 구조 속에서 돌아가고 있을까 아니면 그들이 우리의 삶으로부터 물리 구조를 끌어낸 것일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우리의 삶이 미분 적분으로 표현되든, 슈뢰딩거의 고양이 아니면 아인슈타인의 주사위로 표현되든. 오늘도 우리는 눈을 뜨고 또 하루를 살아간다.
여러 아우성이 겹친다.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 보톡스를 맞아야할지 인공 지방을 넣는 게 나은지. 여기 보다 강남에 사는 게 좋은지. 어느 회사의 아파트가 나은지. 리포트를 쓰던 대학생이 콤팩트를 꺼내 펌프로 살짝 누르고 공부를 계속할지 화장을 덧바를지 눈을 깜빡이고 있다. 유창한 영어, 논술을 가르치는 선생님, 아기의 외마디 소리...
내 안의 고통이 덧칠해져 근육을 만들고 이제 그 근육은 가슴통을 편히 거쳐 좁은 목을 통과하려고 몸집을 줄인다. 크기가 준 만큼 탄성은 비례하여 용수철처럼 튀어 오르려는 순간이다. 거센 압력에 얼굴의 세포와 근육이 들어 올려지고 찌그러져 뭉크로 변한다. 외마디 절규가 동네를 거쳐 지구 끝까지 터져 나갈 것 같아 얼른 카페를 나온다. 절규한들 뭐가 달라질 수 있을까. 찬 바람을 맞으며 고통을 안으로 구겨넣는다.
아파트 건물 밑에 있던 고양이가 길거리에 어깨를 내리고 서 있는 나를 쳐다본다. 어쩌라구. 네가 나 대신 슈뢰딩거의 상자 안에 들어가고 싶어. 짜증 섞인 시선으로 쳐다보는 나를 무시하듯 고양이는 시선을 돌린다. 그래, 네가 왼쪽 꽃밭으로 가서 캣맘이 놓고 간 먹이를 먹던, 오른쪽 뒷길로 돌아가 쥐를 쫒던 어차피 세상은 돌아가거든.
오늘은 어떤 실험을 위해 내가 슈뢰딩거의 통 속에 집어 넣어질까. 엄마는 관찰자가 되겠지. 가족을 위해 열심히 살아온 엄마는 몸과 정신이 아프다. 나를 바라보며 끊임없이 고통을 호소한다. 말로 표현하면 아픔이 반감되나 의문을 갖지만 늙고 병들었다는 것밖에 엄마의 잘못은 없다.
도돌이표 사고실험으로 나는 지치고 병들었다. 더해서 늙어가기도 한다.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이중의 위험에 처해 있다. 끈끈한, 혈연의 가슴 아린 연민과 의무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과 싸우고 있다.
이제 노모를 위해 집으로 돌아가 다시 실험 대상자가 되어야 한다. 선택지가 없는 막다른 골목길에 나는 서 있다.
하이젠베르그의 불확정성을, 관찰자가 마음을 보내 방향을 정할 것인가. 아니면 슈뢰딩거의 고양이처럼 확률에 갇혀 우연에 따를 것인가.
엄마는 또 다른 상자에 갇혀 있다. 허리의 통증과 몸이 굳어가는 아픔이 점점 커지고 있다. 이번에는 절대자가 관찰자가 되어 엄마를 바라본다.
두 사람, 오는 쪽으로 마음을 보내지 못하고 각기 다른 상자 속에 갇혀버렸다.
*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양자역학의 불완전함을 입증해 보이려고 슈뢰딩거가 제안한 사고실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