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백경희 Aug 13. 2021

로라, 그 후 이야기

테네시 윌리엄스 연극 《유리 동물원》을 보고

 연극을  보고 난 후 로라가 나의 머릿속을  맴돈다.  그녀를 세상 속에서 살게 할 수 없을까? 나는 로라가 행복해지기를,  삶의 세계를  찾기를 바라며 로라의 삶을 재구성한다.


 새벽녘, 창밖이  어스름하게 동이 튼다. 아만다는 어제 톰이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어두운 거실에서 불안하게  서성이고 있다.  로라가 방에서 나온다.

"로라! 톰이 어제 술이 취해  다른 곳에서 밤을  새운 모양이야. 구두공장으로 바로  출근했겠지? 어두워서 도무지 앞이 보이질 않는구나. 톰에게 전기요금을 빨리 내라고 해야겠어. 구두공장에  다녀올게."

 그날 저녁, 얼이 빠지고 초주검이 된 아만다가 거실로 들어온다.

 "톰이 공장에 출근하지 않았어.  종일 발이 부르트게 찾아다녔는데 집에 오는 길에 짐을 만났어. 톰이 배를 타고 멀리 떠났다고 하는구나.  우리는 어떻게 살라고.  톰,  그놈도  제 아비를 닮아선지 책임감이라곤 하나도 없어.  로라!  우린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지?"

 "쥐꼬리만큼 들어오던 잡지  판매금도 공황으로 줄어들고. 전기는 이미 끊겼는데  수도도 끊기겠지. 아파트를 팔고  공동주택으로 이사를 해야겠어.  죽지 않을 만큼 절약하면 일 년 정도 생활할 수 있을까. 불쌍한 로라! 좋은 남편을 골라 줄 수가 없구나.  그래도 네가 결혼하는 거밖에  달리 방법이 없어."

 공동주택 1층에는 폴란드 출신의  스탠리가 살고 있다. 이사할 때 공기구를 빌리면서 안면을 익혔다. 그는 투박하고 거칠게  보이지만  로라에게 호감을  보였고,  원초적인 건강함이  약한 로라를 잘 돌볼 것  같다. 아만다는 틈이 날 때마다 스탠리에게 도움을 청하고 케이크를 만들어 그를 초대한다. 로라는 자신을 뻔뻔하게 쳐다보는 스탠리의 노골적인 눈길을 피해 아만다의  뒤로 몸을 숨긴다. 아만다는 미국 남부에서 아름다운 소녀로서 누렸던 부유했던 시절을 꿈꾸듯 얘기하고, 자신에게 조금의 유산이 남아있음을  내비친다.  그때마다 관심을 보이는 스탠리를 흥미롭게 바라보면서.


 로라는 아만다의 잔소리에 등이 떠밀려 매일 아침 일거리를 찾아 집을 나선다.  이곳저곳 상점을 기웃거리지만,  사람을 구하느냐는 말을 꺼내지 못하고 발끝만  내려보다 돌아선다.

 종일 돌아다니다 지친 로라는 식물원에 간다.  몇 달 전만 해도 유리 동물원과 축음기로 하루를 보냈다. 외뿔이 깨진 유니콘을 짐에게 선물하면서  유리  동물에게 가졌던 애착이 사라졌다. 튤립이 바람에  휘날리며 향기를 보내고, 색색의 꽃잎이 빛에 따라 변하는 것을 바라본다. 잎의 투명함에 따라 물 준 날짜를  어림할 수 있다.  로라는 꽃의 생기에 기분이 밝아지고 마음속에 막연한 희망이 살짝 인다.

 정원사들이 일하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지켜본 지 벌써 삼 개월째. 그녀가 유리 동물을 아꼈듯이 정원사들은 애정을 갖고 꽃과 수목을 돌본다. 규칙적으로 물을 주고, 온도와 통풍을 조절하고  가지를 치고 보살핀다. 그들의 움직임이 아름답다.

 오후 다섯 시,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로라는 일어서지 못하고 앉아있다. 오늘은 엄마가  결혼을 약속하기 위해 스탠리를 초대한 날이다. 동생 톰이 있었다면 엄마에게 화를 내며  스탠리를 내쫓을 텐데.  톰이 몹시 보고 싶다.

 정원사들이  허둥지둥 바쁘게 움직인다. 수석 정원사가 그녀에게 다가온다. 그만 나가라는 소리가 들릴듯하여 로라는 몸을 움츠리며  엉거주춤 일어선다.

 정원사는 둥글둥글 웃는 얼굴의 오십 대 여자다. 그녀는 몇 달 전부터  로라를 쭉 지켜보았다. 로라는 오후 3시쯤에 식물원에 와서  피곤한 듯 벤치에 앉는다. 로라는 무릎에 놓인  손을 내려보다가 조심스럽게 눈을 들어  주위를 둘러본다. 바람을 느끼고 꽃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다  표정이 밝아진다. 그녀가 꽃을 보며  환하게 미소 짓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정원사는 로라에게 꽃나무의  물 주기를 어떻게 하는지 아느냐고 묻는다. 로라는 그동안 지켜본 대로  관리하는 방법을 말한다. 몇 달 후 식물원에는 큰 행사가 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어린 정원사가  며칠 전에 그만 두어 일손이 아쉽다. 로라에게 같이 지내며 일을 하겠냐고 묻는다. 로라는 오늘 집에 가면 엄마의 뜻을 거절하지 못하고  약혼을 하게  될 거란  사실과 함께 스탠리의 얼굴을 떠올리며  몸서리를 친다  일을 수락한다.

  로라는  정원사 일에 재미를 붙이고, 꽃을  사랑하며 정성껏  키운다. 로라는 수석 정원사에게 의지하고, 정원사는 그녀를 딸처럼 가르치고 보살핀다.

 이제 로라는  무생물인 유리 동물에 집착했던 과거에서 벗어나 사회성이 조금씩 자라나기 시작한다. 살아있는 식물과의 교감을 통해 대화 상대가 꽃에서 나무로, 나무에서  동료 정원사, 관람객으로 점차 넓어져 갔다. 그녀의 수줍음은 여전하지만 이전과 같은 답답함이 아니라  모두가 사랑하는 그녀의  매력으로 자리 잡았다.

 물을 주는 정원사에서,  식재하고  병충해를 방제하는 역할로 그녀의 입지는 점점 커진다. 로라는 1년을 생각했었다. 엄마가 버틸 수 있는 생활비가 그렇고  스탠리와의 결혼을  포기할만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시간은 빨리 지나갔다.


 한편,  아만다는  아들 톰에 이어  딸의 가출에 정신이 혼미하다. 톰의 경우와  달리 생계가 아니라 자신이 없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딸이 걱정되어 다시 시내를 헤맨다. 자신의 운명을 넋두리하며.

 로라가 사라지자  스탠리는 아만다를 대놓고 무시한다.  한 달쯤 지나자 이십 대 초반의 동거녀를  집으로 데려온다. 스탠리는 일이 끝나면 술을 마시고 포커를 친다. 술을 마시면 과격해져  폭력을 행사하고,  동거녀는 울면서 아만다에게 도망 온다. 아만다는 그녀를 로라처럼 생각하며 따뜻하게 위로한다. 술에 취한 스탠리가 동거녀를 부른다. 아만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집으로 돌아가 스태리에게 안긴다. 로라와 결혼했다면  로라는 스탠리를 거부하고 폭력을 무서워하며 하녀처럼 살 것이다.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로라!


 벌써 오 년이 지났다.  로라는 시장이 애지중지하는 나무를 식물원에 식재하고 살려내는 데 성공한다. 은퇴하는 수석 정원사를 대신해 로라가 수석 정원사가 되었다.

 수석 정원사가 된 로라! 이제 엄마를 만나러 간다.


keyword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