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백경희 Aug 14. 2021

마린공주와 라벤더

다시 쓰는 안데르센의 인어공주

 멀고 먼, 깊은 바다 왕궁에 여섯 인어공주가 살고 있었다. 여섯 공주 모두 아름답고 예쁜 마음씨를 가졌지만,  그중에서 막내 공주는 호기심이 많고 사려가 깊었다.  

 막내 공주가 열다섯 살이 되자, 인간 세상을 구경하러 두근두근 설레는 마음으로 바다 왕궁을 나선다. 깊은 바다에서 빠르게 헤엄쳐 수면 위로 고개를  든 순간, 찌르듯 강한 햇살에 저절로 눈이 감긴다. 호기심을  못 이겨 눈을 뜬 인어공주는 아름다운 세상에 넋을 잃는다. 세상은 밝은 햇살에 찬란히 빛나고, 그 빛이 그녀를 축복하듯 따뜻하게 내리쬐며 어루만진다. 바다는 온통 작은 보석을 뿌려놓은 듯, 햇살이 물결 따라 알알이 부서지며 일렁인다.

 바위에 앉아 정신없이 세상을 바라보던 인어공주는 멀리 떠 있는 배를 발견하고 가까이 간다. 갑판 위에 잘 생긴 왕자가 서 있고, 그의 아름다운 모습에 눈을 뗄 수 없다. 밤이 되어 달이 뜨고 파도가 점차 세져 배가 출렁이지만, 인어공주는 배에서 떠날 줄 모른다. 성난 파도가  삽시간에 배를 덮치고  왕자가 바다에  떨어진다. 인어공주는 왕자를 구해  바닷가 바위로 데려오고, 잠시 후  사람들이 모여들자 바위 뒤로 숨는다. 왕자를 사랑하게 된 인어공주는  아침마다 왕자를 두고 왔던 바위를 찾아가지만  만나지 못한다.


 순백의 파티장은 정교한 조각과 크리스털로 우아하게 장식되어 아름답다. 수많은 촛불이  층층이 밝혀진  커다란 샹들리에 아래 음악이 흐른다. 연미복과  섬세한 레이스로 한껏 치장한 드레스의 남녀가 왈츠에 맞춰 춤을 춘다. 왕자는 이웃 나라 공주와 춤추며 누구를 기다리는 듯 가끔 고개를 들어 문을 바라본다. 그러나 곧 약혼녀에게 예의를 갖추고 미소를 짓는다.

 인어공주는  왕궁의 파티장에 들어선다.  걸을 때마다 파고드는 발의 아픔을 애써 참으며 서두른다. 오늘 보는 왕자의  마지막 모습을 오래오래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이웃나라 공주를 바라보며 춤을 추는 왕자를 보고 심장이  내려앉고 마음이 무너져 내린다.

 음악이 끝날 무렵이다. 파티장에 들어선 인어공주를 본 왕자는 약혼녀의 손을 왕에게 건네고 다가온다. 반가움에 환하게 웃는다.

 "마린 공주! 너를 많이 찾았어. 귀여운  동생인 네가 축하해줘야지. 발이 아파 나랑 춤을 추지 못해 아쉽구나."

 '생에 한 번만이라도 왕자님과  춤을 추고 싶어요. 생명을 구한 이는 이웃 공주가 아니라 바로 나예요. 내 목소리를 들으면 왕자님이 알아차릴 텐데. 마녀에게 목소리를 주는 대신 인간의 다리를 얻어 왕자님을 찾아왔어요. 왕자님이 다른 사람과 결혼하면 나는 물거품이 되어 사라져 버려요. 왕자님을 다시 볼 수 없어요!'

 왕자는 마린공주를 보고 기뻐하지만 슬픔에 잠겨 쓰러질 듯한 모습을 보자 마음이 아프다. 시종이 와서 왕의 부름을 알린다. 왕자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긴다. 인어공주가 사람으로 변해서 왕자를 처음 만났을 때였다. 허름한 차림이지만  빛나는 공주의 아름다움에  왕자가 머뭇거리며 이름을 묻는다. 공주가 대답하지 못하자 왕자는 마린공주로 부르기 시작했다.

 파티에 오기 전 인어공주는 다섯 언니를 만났다. 언니들은 머리카락을 잘라 마녀에게 주고 구해온 칼을 건네주며, "왕자의 심장을 찌르면 너는 원래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어. 바다 왕궁에서 다시 행복하게 살자."라고 말한다. 인어는 사랑하는 왕자를 해치는 일은 꿈에도 생각할 수 없다. 키워주신 사랑하는 할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언니를 생각하며 흐르는 눈물을 감추려 고개를 떨군다. 언니들이 바다 왕궁으로 돌아가자 인어공주는  떨리는 손으로 파도 속에 칼을 던져버렸다.

 이제 떠나야 할 시간이다. 인어공주는 슬픔이 차올라 붉어진 눈으로 손님 사이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왕자를 바라본다.  문을 향해 천천히 발을 옮기다 잠시 돌아서 다시 한번 왕자를 바라보고 왕궁을 뛰쳐나온다.  그리고  왕자를 구했던 바위에 올라서서,  환하게 웃어주던 왕자를 떠올리며 바다에 몸을 던진다.


 한편,  바다의 왕이  "막내가 요즘 보이지  않는구나?"라고 물으면  인간 세상 구경을 나갔다고 변명해왔다. 그러나 오늘 막내의 표정을 보면  왕자의 심장을 찌르지 못해 물거품이 될 것이다.  언니들은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왕에게 알린다.  불같이 화가 난 왕은 마녀를 끌고 오라고 명한다. 왕은 "인어공주를 살려서 데려오시오.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오!"라며 마녀를 인간 세상으로 내쫓는다. 인간 세상으로 헤엄쳐 올라오던 마녀는 바다에 몸을 던진  인어공주와 마주친다.  마녀는  인어를 안고 올라와 둘은 바닷가에 앉았다.

 마녀는 여러 가지 약초와 약품을 사용하는 연금술을 연구했고, 그녀의 마술은 뛰어난 연금술의 결과였다. 이제 연금술만으로 마술을 부릴 수 없다고 생각해 인간 세상의 과학에 관심을 가졌다. 마녀는 인공지능 로봇 기술을 터득하고 연구했다. 인어공주의  간청으로 사람의 유전자 칩을 넣어 사람으로 변환시켰다. 차가운 체온을  모두 바꾸고 꼬리를 발로 바꾸는 과정은 완벽하지 못했다. 인어공주는 차가운 손과 걸을 때마다 찌를 듯한 아픔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마녀는 그 대가로 빼앗은 인어공주 목소리를 칩에 입혀 아름답고 매혹적인 목소리를 얻었다. 그때부터  이곳을 지나는 배들은 마녀의 목소리에 홀려 길을 잃고 거센 파도에 난파당한다. 사람들이 수난을 당해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을  보면서 마녀는 눈물을 흘릴 만큼 깔깔 웃는다.

 " 얼마 남지 않은 내 목숨이 너에게 달렸구나." 마녀가 중얼거린다.

 '목소리를  돌려주세요. 바다 마녀님!'

" 이런, 뭐라고! 너에게 사람 다리를 주려고 얼마나 힘들었는데."

' 제 생명에서 100살을 드릴게요.'

 늙은 마녀는 음흉한 미소를  뒤로 감추고 더 욕심을 부려본다.

" 그거로는 안되지. 되돌리는  일은 더 어려워. 될지나 모르겠네."

 ' 제발요! 도와주세요! 제가 살 수 있는 300살 중 200살을 드릴게요.'

 마녀는 아름다운 인어 목소리로 괴롭혀왔던 배들을 떠올린다. 그들을  놀리던 재미는 사라지지만 얼마 남지 않은 생명을 늘여야 한다. 마녀는 못 이기는 척  인어공주에게 목소리 칩을 건넨다.


 시간이 지나갈수록 바다의 왕은  막내 걱정에 안절부절못한다. 결국 왕자의 결혼을 막기로 결심하고,  큰  파도와 바람을 일으켜  왕궁을 덮쳐버린다. 약혼식 파티가  한창이었던 왕궁은  성난 파도에 창문이 깨지고 테이블이 휩쓸리며  샹들리에가 떨어져 나간다. 왕자는 사람들을 구하느라 뛰어다니다 거센 파도에 밀려  방파제에 머리를 부딪히고 정신을 잃는다.

 인어공주는 이 모습을 보고 바다에 뛰어들어 왕자를  구해  바닷가로 올라온다. 인어공주는 젖은 머리카락이 흩어진 아름다운 왕자 얼굴을 감싸며 간절히 노래를 부른다. 인어공주의 노래는 아픈 사람을 낫게 하는 힘이 있다. 아름다운 노랫소리에 왕자가 눈을 뜬다. 정신을 차린  왕자는 깜짝 놀라며 인어공주의 손을 잡는다.

 " 나를 두 번이나 살린 은인은 마린공주였군. 전에도 아름다운 노래에 깨어났는데, 네가 달아나 얼굴을 보지 못했어. 이웃나라 공주가 나를 살린 게 아니었군. 마린공주! 너를 사랑했지만  어쩔 수 없이 이웃 공주와 결혼할 뻔했어.  정말 다행이야."라며 인어공주의 손에 키스를 한다. 그 순간 인어공주의 눈에 기쁨의 눈물이 차오르고, 그 눈물이  왕자가 키스한 손등에 떨어진다. 어디선가 라벤더  향을 실은 바람이 산들산들 춤춘다.

"왕자님! 왕자님도 나를 사랑했군요. 왕자님을 늘 그리워했어요.  한 번만이라도 왕자님과 춤을 추고 싶었어요."

"마린공주!  손이 따뜻해졌구나."

 왕자가 사랑의 키스를 한 손에 인어의 눈물이 닿은 순간,  인어공주는 로봇에서 사람으로 변한다. 진심 어린 사랑이  하늘을 감동하게 하고, 하늘은 화답하듯 라벤더 향기를  세상에 보낸다. 깜짝 놀란 인어공주는 손의 온기를  확인한다. 손을 잡고 일어선 두 사람은 춤추듯 빙글빙글 돌며 걸어본다. 발의 아픔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기쁨에 겨운 왕자와 공주는 넓은 바닷가에서  행복의 춤을 춘다. 드디어 소원이 이루어졌다.

 왕자와 인어공주는 바다의 왕과 할머니, 다섯 언니를 초대해 성대한 결혼을 한다. 왕자는  곧 왕위를 물려받고, 왕비가 된 인어공주에게 세 명의 공주와 세 명의 왕자가 태어났다. 왕궁의  행복한 웃음이 라벤더 향이 스민 부드러운 바람결에  실려서 세상으로 전해진다.

 사람들은 향기에 끌려  바닷가를 찾아오고  이곳을 다녀가면 소원이 이뤄진다는 소문이  널 리 알려진다. 라베더 향과 따스한 햇빛이 어우러진 이곳에서 사람들은 행복의 춤을 추고 웃음과 사랑이 먼 나라까지 널리 널리 퍼져나간다.

 그 후 '행복의 축제'가 열리기 시작했고,  영원히 계속되었다.


작가의 이전글 폼페이의 어느 하루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