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독언 May 30. 2023

가끔 인생에는 환상이 필요해

뮤지컬 윌리엄과 윌리엄의 윌리엄들 후기

2023.03.08 ~ 05.28 | 아트원씨어터 2관

사진=뮤지컬 윌리엄과 윌리엄의 윌리엄들 공식 트위터

그간 치열한 일상을 살아가느라 뮤지컬 관람을 물론이고 후기를 적을 시간도 정신도 없었다. 그럼에도 공연장에서 나와 귀가하는 길에 열심히 후기를 적고, 잠들기 전 시간을 내어 후기를 정리할 만큼이나 이 뮤지컬을 좋아했다. 공연에 대한 열정을 식히고 싶지 않았다. 내 오랜 취미를 이대로 방치하고 싶지도 않았다. 오랜만에 이대로 보내주고 싶지 않은 뮤지컬 <윌리엄과 윌리엄의 윌리엄들>에 대한 아주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후기를 적어보려고 한다.

사진=뮤지컬 윌리엄과 윌리엄의 윌리엄들 공식 트위터

다른 뮤지컬 또한 관람할 때에도 캐릭터들의 관계성에 집중해서 봤듯이 본 뮤지컬 또한 헨리와 사무엘의 관계에 집중하여 관람했다. 무대 사이즈가 작은 소극장의 특성상 무대 위 소품들의 위치를 변화시키면서 무대를 전환하는 등의 표현으로 공간과 시간을 달리 표현하기보다 조명을 통해 공간을 분리하는 연출이 많았다. 사실 캐릭터들의 감정선에 집중하고 공감하면서 뮤지컬을 관람하는 나로서는 배우들의 표정이 잘 보이는 앞자리를 선호하는 편이다. 그러나 1층에서와 2층에서 발견할 수 있는 디테일들이 다 달라서 여러 자리에서도 즐겁게 관람할 수 있었다. 또한 강조되는 조명들을 효과적으로 사용한 것과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뮤지컬 난세의 경우에도 도전적인 조명 연출을 사용해서 극적인 느낌을 극대화한다는 개인적인 감상을 남겼었는데, 본 뮤지컬에서도 각 캐릭터들에게 스포트라이트를 주거나 암전을 통해 무대의 다른 요소들에는 시야를 차단시키고 캐릭터들에게 시선이 집중되는 조명을 적절하게 사용한 느낌을 받았다. 난세의 경우에는 캐릭터들의 표정만을 강조하는 장면들도 많았기 때문에 사실 조명이 들어가는 부분이 너무 적어 무대와는 조금 먼 좌석에서 보면 배우의 표정은 잘 보이지 않는데 얼굴만 조명이 강조되어 극적인 느낌보다는 답답한 느낌을 많이 받았었다. 그러나 역사 뮤지컬에서 그런 조명은 나에게 신선했고 세련된 뮤지컬이라는 인상을 줬다. 스포트라이트의 연출에서는 다른 모든 판단할 수 있는 요소들을 단절시키고 헨리의 이야기만을 온전히 들려주는 느낌을 받았다. 헨리에게서 시선을 집중시키고, 아무도 헨리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다는 것을 드러내주면서도 관객들이 헨리의 입장이 되어 헨리의 행보를 지켜보게 되는 것이다. 또한 무대가 완전히 가려지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장면 전환도 흥미로웠다. 난세에서의 연출 또한 좋아했지만, 세련되고 도전적이긴 하나 극의 분위기와는 맞지 않아서 그로 인해 극의 몰입을 깨는 듯한 연출들도 있었다. 또한 이런 조명 연출을 통해 효과적으로 전반적인 분위기를 이끌어 나가는 뮤지컬들도 많았지만 그와는 대비되게 장소나 시간대의 구분이 효과적이지 못할 때 또한 많았다. 그러나 본 뮤지컬의 조명 연출은 세련된 느낌으로 좋았다. 본 뮤지컬의 연출들은 깔끔하고 납득되는 전개였다. 조명을 효과적이게 사용하면서도 암전이 많은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극이 중간에 끊기는 느낌은 줄고 극적인 느낌과 극의 전반적인 분위기 틀이 조화롭게 잘 잡힌 것이 느껴졌다.


헨리가 적은 희곡 보르티게른이 위작 논란으로 인해 열린 재판으로부터 시작된다. 헨리가 보르티게른을 적게 된 이유와 재판에서 보르티게른 및 다른 셰익스피어의 유물들이 모두 거짓이며 자신이 만들었다는 것을 말하기 되기까지의 인과과정에 대한 내용이 뮤지컬로 전개된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뮤지컬로 시놉시스만 본다면 무겁게 느껴질 수 있는 이야기들이지만 환상이 가득한 소설 혹은 동화 속에 있는 것과 같은 느낌을 준다. 어쭙잖은 관객참여형 뮤지컬보다 더욱 내가 뮤지컬에 참여하는 느낌을 받았다. 뮤지컬에서 진행자의 역할 H로 인해 잘 꾸며진 구연동화 같다는 인상을 받기도 했다. 암전 이후에도 무대의 커튼 부분만 강조되는 연출부터 헨리와 사무엘이 무대 위로 처음 등장하면서 자신들의 역할을 설명하는 독특한 구성의 전개는 그런 느낌을 더욱 극대화시킨다. 그러나 완전히 대조되게도 무대 왼쪽에 배치된 종이 인형 세트장이 무대와 연결되었다는 느낌이 들자 문득 공포 영화인 유전이 떠올랐다. 헨리와 사무엘의 존재가 작가인 H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등장인물들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H는 관객들에게 이야기를 전달하는 전달자이자 헨리에게 조언을 건네는 조언자이기도 하고 사무엘에게는 진실을 알려주는 존재로써 제4의 벽을 넘나드는 존재이기 때문에 무대 위에서 관객들의 앞에 자신을 작가로 소개하는 것도 무리가 아닐 것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H는 미지의 신사이고 해석할 수 있는 방향이 무궁무진한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종종 작가의 의도와는 다르게 의지를 가지고 움직이는 캐릭터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H의 소설 속에서 헨리가 그런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닐까? 실상 결국 본 극을 관통하는 메시지를 H라는 미지의 존재를 통해 관객들이 추리하고 해석해 가는 과정에서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H의 역할은 성공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사실 공연을 관람하다 보니 헨리가 진실을 바로잡으려 한 이후에는 헨리의 눈에 H의 모습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더 이상 헨리에게는 H의 존재가 필요하지 않다. 어떤 환상들은 우리의 인생을 살아가면서 행복한 일상을 안겨주지만 때로는 그 환상이 과하면 일상에서 균형을 잃을 수 있다. 때로 어떤 환상들은 살아가는 데 있어서 불순물과 같은 역할을 한다.


전체적인 감상

이 뮤지컬을 너무도 사랑하고 좋아한다는 사실은 변치 않지만 어디서 많이 본 것 같다는 평가에 대해서는 동감한다. 극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이고 관객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가 무엇인지 불분명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너무 많다 보니 관객들이 받아들여야 할 정보들이 너무 많았고 사실 어느 정도의 메시지는 없어도 될 법했다. 어떤 메시지들은 극에서 친절하게 설명하지 않더라도 그저 이야기의 흐름에 따라 뮤지컬을 관람하면서 관객들이 스스로 판단하고 생각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극본은 내가 기대한 것보다 허술한 면이 있었다. 말마따나 본 뮤지컬이 흔하게 비판을 샀던 것은 어디서 본 것과 같은 장면들과 대사들. 그리고 크게 감흥 없이 다가오는 캐릭터들의 서사들이 대표적이었다. 물론 어떤 뮤지컬을 관람한다 하더라도 어디에서 많이 본 것과 같은 기분은 필연적인 듯하다고 생각하는 요즘이다. 그러나 어느 부분에서 웃어야 하고 어느 부분에서 진지해져야 할지에 대한 창작자의 의도를 판단하지 못할 혼란스러운 장면들은 어느 뮤지컬이라도 유쾌하게 받아들일 수가 없다. 몇몇 장면들은 의도적으로 웃긴 장면을 만들려다가 실패한 것인지 혹은 웃고 나서 관객들이 실은 웃을 만한 장면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반전의 연출을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둘 중 무엇이라도 실패한 연출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나는 관객들에게 웃어도 괜찮은 듯한 우스꽝스러운 장면을 배치해 놓고 사실 그것이 웃긴 장면이 아니었다는 연출을 좋아한다. 그러한 장면들은 더욱더 큰 충격을 받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상황을 생각하고 판단하게 만들어준다. 더 라스트맨의 이야기를 잠깐 해보려고 한다. 주민진 배우의 디테일이었지만, 생존자가 급하게 초코파이를 먹는 장면에서 처음에 관객들은 웃음을 터트렸지만 그것이 너무 오랜 공복으로 인한 허기진 마음에서 비롯된 이유라는 것을 알게 된 이후에는 웃음소리가 멎어 들고 관객석에 앉아 있던 그 누구도 웃지 않았다. 웃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런 연출들은 나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좋아하지만 어떤 장면에서 웃어도 되는지 혹은 웃으면 안 되는지의 여부에 대해 재면서 관람하는 것은 유쾌한 경험이 아니다. 전반적으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많다는 인상을 받았으나 너무 좋은 메시지들이라도 일관성이 없으니 극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이 어려웠다. 본 뮤지컬은 한 줄 요약이 안 되는 뮤지컬이다. 처음 뮤지컬을 보고 극장에서 나왔을 때에는, 그래서 이 극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일까? 하는 고민에 빠졌던 것 같다. 사실 이 뮤지컬을 너무도 좋아하는 관객의 입장에서 바라보기에, 그저 시간 보내기에 좋은 뮤지컬이라는 평을 듣는 것이 나에게는 너무도 아쉬운 일이었다. 원래 뮤지컬을 감상한 뒤의 평가는 개인의 자유라지만 나에게는 너무도 아쉬운 평가인 것이다. 


사무엘과 헨리

동일한 뮤지컬을 관람한 다른 관객들과 다른 해석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우리가 흔히 살아오면서 느낀 경험들을 토대로 캐릭터들의 상황에 이입하고 판단하면서 개인적인 결론을 도출하도록 하는 뮤지컬이었다. 극에서도 말하는 것처럼 우리 모두는 각자의 이야기가 있다. 살아온 배경과 쌓아온 경험들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같은 캐릭터들을 바라보면서도 다양한 생각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도 즐겁다. 한 캐릭터를 봐도 무두 다른 면을 바라보기 때문에 그 캐릭터에 대한 이해와 해석들을 나누며 대화를 통해 의견을 나누면서 캐릭터들을 조금 더 입체적이고 깊게 이해해 나갈 수 있었다. 그렇게 캐릭터들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지면서 더욱 극에 몰입하게 되자 뮤지컬을 볼 때마다 새로운 만족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더욱 다음 공연이 기대될 뿐만이 아니라 나의 세계가 한층 더 넓어진다는 느낌으로 늘 기분이 좋았다.

사진=뮤지컬 윌리엄과 윌리엄의 윌리엄들 공식 트위터

뮤지컬의 이름이 윌리엄과 윌리엄의 윌리엄들인 만큼 각자의 인생의 장면들에 적절한 비중이 맞춰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H의 존재에 대해서는 극에서도 여러 가지 해석을 열어두는 캐릭터이다 보니 해석이 갈릴 것이라는 것은 예상했다. 그러나 사무엘과 헨리와 관련해서 해석이 갈리는 것은 또 다른 즐거움이었다. 그중 가장 재밌었던 것은 사무엘에 대한 해석이었다. 다른 많은 면들이 있겠지만 대표적으로는 내가 양육자의 경험을 겪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사무엘을 이해하는 것이 더 넓은 세게로 발돋움하는 기분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하면서 동일하게 사무엘을 관통하는 해석은 사무엘이 올바른 양육자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현실에서도 언제나 훌륭하고 옳은 부모의 얼굴을 하는 것이 불가능하듯이 그보다 사무엘 또한 더 다양한 면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굳이 사무엘의 태도에 대해서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사무엘에게 아버지라는 면도 결국 사무엘의 여러 가지 다양한 얼굴 중 하나일 뿐이었다. 사무엘의 아버지라는 포지션에 한때 매몰되었던 나로서는 사무엘을 미워할 수가 없었고 사무엘의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 계속 분석하고 해석하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이 이후의 텍스트들은 나의 사무엘과 헨리에 대한 아주 개인적인 해석을 담고 있다.


사무엘은 헨리의 사실 누구보다 현실적이어야 하는 캐릭터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펜과 잉크조차 갖기 어렵던 작가라면 더욱더 그랬을 것이다. H가 부르는 첫 넘버인 '어떤 재판'부터 본 뮤지컬이 관객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잘 드러난다. 사라졌지만 사라지지 않은 신분제라는 가사는 사실 현사회를 관통하는 것이기도 하다. 살롱의 스캔들 또한 결국 SNS나 기사들처럼 다른 매개체를 통해 아직도 우리의 주위에 존재하고 있다. 신분제라는 실제 제도는 사라졌지만 실상 우리는 항상 보이지 않는 수직적인 관계 속에서 단순한 동경을 넘어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학교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계속 집으로 돌아오는 헨리를 대하는 사무엘의 걱정하는 마음 또한 이해할만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사무엘은 작가를 꿈꾼다. 그것도 유명한 작가! 사무엘이 동경하는 셰익스피어는 이런 사무엘에게 또 다른 환상을 심어주는 존재가 아니었을까? 우리는 우리가 동경하고 바라보는 모습들에 매료되고는 하는데 우리의 환상 속 인물들은 삶의 활력소로써 우리의 곁에 늘 존재한다. 예를 들어 무언가를 바라는 마음 없이 순수한 응원을 하는 덕질의 상대가 떠올랐다. 그런 존재들이 우리를 기쁘게 만드는 것처럼 셰익스피어는 사무엘에게 그런 모습이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사무엘이 가진 셰익스피어의 환상들은 헨리가 심어줬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무엘은 그저 셰익스피어의 글이나 문장 혹은 유명 작가 타이틀을 동경했을 수도 있으나 헨리가 사무엘이 기대할 것 같은 셰익스피어의 모습으로 환상을 심어준 것처럼 결국 그 환상은 독이 되어 자라난 것이 아닐까. 셰익스피어가 가방 끈 짧고 하찮은 가문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환상적인 문장들을 만들어냈다는 것을 사무엘이 알았다면 어땠을까? 실상 사무엘의 가난한 상황이 무엇인가를 하기에 한계인 것은 맞으나 그것이 과연 사무엘의 상황 때문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사실 내가 사무엘의 입장이라면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그저 가난한 예술가들을 후원하는 H에게 고마운 마음도 들었겠지만 사실 내심 가슴 한구석에는 H를 이용할 수 있는 방법들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을 것 같다. 그 부분에 집중하고 뮤지컬을 보다 보니 사무엘의 서평에 대한 기사도 어쩌면 마땅히 사무엘이 자신의 문장들로 그 자리를 얻은 것이 아닌 셰익스피어의 유물에 의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무엘은 남들에게 자신의 글에 대한 평가를 받은 적이 없으니 더욱이 혹평에 무너지는 것이다. 처음에는 재능에 대한 H의 평가를 듣고는 관객으로서 조금 말이 너무 심하다고 느꼈으나 관람을 하면 할수록 역량을 더 키울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헨리가 사무엘과 함께 스트랫퍼드어폰에이번으로 여행을 떠날 때 셰익스피어의 비극 중 리어왕에 대한 이야기와 가족들과의 불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나는 여전히 그 장면이 마음에 걸린다. 극의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아무도 헨리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았다는 점에서 평소 아버지와 친밀한 대화나 감정적인 교류가 많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극을 진행하면서 내내 헨리의 말을 막으면서 무시하는 사무엘의 모습 또한 볼 수 있었다. 다른 장면들 보다도 대표적으로 헨리처럼 기질이 섬세하고 예민한 아이에게 계속 무시하는 듯한 어투를 사용하는 것을 본다면 올바른 양육자의 얼굴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다 직접적으로 헨리를 무시하는 발언을 한 것은 재판에서 자신의 아들은 그렇게 똑똑하지 않다고 판사에게 진술한 부분이 그랬다. 아이들은 보통 부모가 말하는 대로 믿어버리기 때문에 평소 부모의 태도에서 확신을 가진다. 그리고 그것이 어쩌면 헨리에게는 결핍으로 작용하지 않았을까? 사무엘은 줄곧 헨리에게 화나고 엄한 아버지의 얼굴을 한다. 항상 자신에게 화를 내던 아버지가 기뻐하는 모습을 봤던 헨리는 단순히 기뻐하는 아버지의 얼굴이 보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헨리는 아버지를 기쁘게 하는 방법은 결국 위조품을 만들어내는 것이고 그것이 아버지가 자신에게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라는 결론을 스스로 내렸을지도 모른다. 윌리엄의 투구와 헨리는 비슷한 맥락을 한다. 윌리엄의 투구는 결국 원래 버려졌지만 헨리에게서 와서 소중한 존재가 되어주었듯이 헨리 또한 자신에게 소중한 단 한 사람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고자 한다. 그리고 헨리가 진실을 말하고자 결심하는 장면에서 소네트 130을 다시 읽게 된다. 아름답지 않아도 그 누구보다 특별한 존재. 처음에는 그 단 한 사람이 사무엘이라고 생각했으나 극이 진행되면서 그 주체가 점차 헨리 자신으로 변화해 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헨리는 사무엘의 행복한 얼굴을 보기 위해서 모든 것들을 만들었으나 사무엘은 진심으로 행복한 순간에도 헨리를 안아주지 않았고, 그저 행복한 감정을 함께 나누기보다 존경과 인정을 받는 자신의 모습을 헨리에게 보여주는 모습에서 안타까움을 느꼈다. 물론 사무엘이 헨리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무엘의 태도에서 필연적으로 사랑할 수밖에 없는 존재에 대한 의문과 함께 영화 '케빈에 대하여'가 떠올랐다. 사실 자신이 사랑하고 믿어왔던 헨리의 모든 확신을 무너뜨린 것은 사무엘의 태도이다. 자신이 하는 행동에 대한 것이 잘못된 행동이라는 깨달음을 알려준 것도 사무엘이라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사실 사무엘의 태도가 아니었다면 헨리가 평생토록 이런 교훈을 얻을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만약에 사무엘이 헨리의 말을 잘 듣고 헨리를 잘 타일렀다면 아버지의 행복을 최우선순위로 두었던 헨리가 재판에서 과연 진실을 말했을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굳이 어떤 얼굴을 하고 필요성을 타인에게 증명하려 하지 않아도, 숨만 쉬면서 자신의 삶을 지속해 나갈 때에도 결국에 헨리는 소중한 존재이자 가치일 것이며 자신에게 헨리는 그 누구보다 특별한 존재일 것이다. 결국 아버지에게 인정받는 자랑스러운 아들이 아니어도 그렇다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 사무엘도 타인의 눈에 보이는 것이 더 중요해진 것 같으니 진실을 밝히지 않을 이유도 없다.


관람 초반에는 사무엘이 정말 셰익스피어의 유물을 헨리가 위조하여 만들어낸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궁금했다. 하지만 헨리가 재판에서 사무엘에게 그것이 진실이라고 직접적으로 말하기 전까지는 그것이 현실이라고 믿고 있지 않았을까? 우리는 믿고 싶은 것을 그대로 믿는 경향이 있다. 그렇기에 의심 가는 부분에 대해서도 눈과 귀를 막고 그저 믿어버렸을 것 같다. 눈과 귀를 막고 자신이 믿는 것이 사실이라고 생각하고 믿으려고 한다면 쉽게 믿을 수 있다. 사실 본인의 기쁨을 망치지 않게 노력했던 것은 그 누구보다 현실을 외면했던 사무엘 자신일지도 모르겠다. 사무엘에게는 자신의 작가에 대한 역량 또한 기사에서 말하는 대로 믿어버리지 않았을까. 유명해진 이후에는 자신이 최고의 작가라는 사실을 더 믿기 쉬웠을 것이다. 애초에 사무엘은 작가에 대한 재능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이 말하는 얘기에 대해서 믿으려고 한다면 속 편하게 믿을 수 있을 것이다. 아름다운 문장들에 대한 욕심을 가지고 있던 사무엘이었기 때문에 점점 셰익스피어와 동등하다는 평을 받게 되면서부터 사무엘은 그저 믿고 싶은 것을 믿었듯이 이후에는 점차 정말 자신이 글에 대한 재능이 있다는 것을 믿었을 것 같다. 

사진=뮤지컬 윌리엄과 윌리엄의 윌리엄들 공식 트위터

원래 관계는 상호보완적인 모습을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관계에서 발생하는 문제는 오직 누군가 한 명의 문제로 인해서 벌어지는 이야기들이 아니다. '깜찍한 병아리처럼 귀여워해주세요.'라는 워딩만으로도 알 수 있듯이 애초에 헨리는 엉성하고 허술한 느낌의 위조품들을 만들어냈다. 그러니 보르티게른은 결국 발각될 수밖에 없었던 거짓말이지만 헨리는 자신의 선택을 통해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재판 때 털어놓는다. 헨리는 분명 H와 사무엘 둘만 공유하는 것이었으면 좋겠다고 편지에 명확하게 명시해 놓았으나 점차 유물들을 돈벌이에 대한 수단으로 생각하여 약속을 어긴 것은 사무일이었다. 세상에 내놓지 말라는 아들의 말에도 결국 세상에 내놓은 것이다. 사실 극이 진행되면서 욕심의 방향이 커진 것은 사무엘뿐만 아니라 헨리였던 것도 같다. 물론 이것은 당연한 것이다. 무엇이든지 참는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특히 부모에게서 사랑받지 못한 경험은 다 자란 이후에도 가슴에 응어리지는데 어린 헨리가 아버지에게서 인정받고 싶어 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그것은 삭힐 수 있는 감정이 아니다. 처음에 헨리는 아버지의 행복을 위해서 위조품을 만든 것이었으나 어느 한편으로는 자신의 정성을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과 아버지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가 자라났을 것 같다. 자신을 좀 봐달라는 마음. 사실 자식의 입장에서는 정말 기본적인 것이다. 아버지가 자신을 봐주고 사랑한다는 것은 정말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꿈에 방해가 되는 쓸모없고 귀찮은 아들. 실제로 가사에서 나오는 것처럼 헨리가 느꼈던 절망은 결국 자신의 존재에 대한 부정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이유를 증명하기 위해서 리처드 16세와 유령들을 적어낸 것은 아닐까? 그러나 결국 아버지는 그것 또한 재판에 참석한 관중들의 눈앞에 내려놓으면서 헨리의 필요성을 고작 위조품으로 증명한 것이다. 

사진=뮤지컬 윌리엄과 윌리엄의 윌리엄들 공식 트위터

새로운 지팡이와 보석과 레이스가 달른 프릴, 그리고 모자. 아버지의 복장은 디테일하게 달라진다. 그러나 헨리의 복장은 한치의 다름없이 이전과 동일하다. '당신은 나를 몰라', '사실은 알고 싶지도 않아'라는 가사가 연결되는 것을 볼 때 사무엘은 어느 시점부터 현실을 부정하고 자신이 믿는 것만 바라보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그러나 자신이 믿고 싶은 것을 바라봤던 것은 헨리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역량에 대한 비관적인 태도와 필요에 따라 자신의 가치를 판단하는 잣대와 이야기에 관련된 많은 것들. 무엇인가에 대해 경험하면 더 많은 것들을 필요로 하고 욕심을 가지게 된다. 


헨리가 숨만 쉬어도 된다는 말에 결국 해방감을 느끼는 것은 자신의 꿈을 이유로 자식을 방치했다는 사무엘의 말이 틀림없는 사실이 된다. 아들을 맞지 않는 옷을 입히듯 학교에 보내는 것이 아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숨만 쉬면 된다는 말이 헨리에게는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듯이 그 속에는 자신의 꿈으로 다가가는데 헨리의 존재가 방해가 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그 무엇도 그르치지 말고 그냥 그대로 있으라는 것. 자신은 그대로 늙어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면서 헨리에게는 그 무엇도 하지 말라는 경고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헨리가 자라는데 아주 큰 문제와 방해가 된다. 모든 재판이 일어나고 헨리가 진실을 말하고 추방되어 프랑스로 가는 것까지의 인과에 아주 큰 영향을 줬다고 생각한다.

사진=뮤지컬 윌리엄과 윌리엄의 윌리엄들 공식 트위터

13번째 넘버인 '윌리엄과 윌리엄의 이야기'에서 무겁게 눌리는 피아노 건반의 선율은 마치 헨리의 심장이 짓눌리는 소리처럼 들렸다. 헨리가 그동안 생각해 오던 미지의 신사 H가 아닌 가상의 캐릭터 H가 등장하는 '미지의 신사장면에서는 극장에서 항상 유쾌한 기분으로 즐기며 웃었지만, 항상 웃으면서도 이 장면이 이렇게 재밌어도 되나? 하는 생각이 문득문득 들고는 했다. 그러나 김지웅 배우가 연기하는 헨리의 경우에는 이 장면이 우스운 장면으로 더 극대화될수록 이후에 더 속상해하는 것이 느껴졌다. 앞의 장면에 더 큰 시너지를 받는다는 것이 느껴져서 인상 깊었다. 일을 바로잡으려고 하면 할수록 모든 해결방안들이 내 손을 수많은 모래알처럼 손수무책으로 빠져나가는 느낌.


배우들

셰익스피어의 비극 중 리어왕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가족들의 불통을 얘기할 때 임규형 배우는 조금 눈치를 보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달라는 이야기인지 혹은 둘의 관계에 대한 복선일지 몰라도 나는 이 디테일이 없었다면 그 말이 뮤지컬 전반에 걸친 둘의 비극에 대한 이야기였을 것이라는 것은 몰랐을 것도 같다.


감정선이 가장 세심했던 것은 황순종 배우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단하게 자신의 주체를 찾은 것은 임규형 배우였고 작가로서 자신의 이야기를 찾은 것은 김지웅 배우였다. 사실 헨리가 프랑스로 가서 자신의 이야기를 적어 내려간다는 결말은 김지웅 배우와 가장 잘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셰익스피어에 대한 위작이 거짓이라는 것이 드러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프랑스에서도 위작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이 만약 헨리의 일이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김지웅 배우가 연기하는 헨리는 행복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김지웅 배우의 헨리를 좋아했다. 사무엘과 헨리를 연기하는 모든 배우들에 대한 만족감이 상당히 높았다. 사무엘은 모두 다른 의미로 나를 분노케 하고 또 미워하지 못하게 했으며 한편으로는 이해하게 했다. 사실 위의 본문을 읽어봐도 알 수 있듯이 어쩔 수 없이 사무엘의 아버지의 얼굴을 한 면에 집중하긴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가장 현실을 믿지 않고 환상을 굳게 믿어버린 배우는 원종환 배우였다. 욕심이 과해서 탐욕스럽기까지 했고, 엄한 얼굴은 헨리에게 두려운 인상을 심어주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본래 아버지의 얼굴이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저 욕심이 점점 부풀어 올라 만족을 모르는 이의 얼굴이 그렇게 두려워 보였던 것도 같다. 김수용 배우가 말하는 사무엘은, 김수용 배우의 해석처럼 실상 헨리가 다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조금 느껴지긴 했다. 그러나 결국 모두 자신의 욕심이 더욱 그 앞에 굳게 자리 잡았다고 생각된다.


마무리

극을 관람하면서 후기를 미뤘다. 덕에 하고 싶은 말들이 너무 많아 정제되지 않은 단어들과 문장들을 억지로 끄집어내고 정리하느라 시간이 오래 걸려 마지막 공연이 다 지나간 시점에서 브런치스토리를 발행한다. 헨리와 사무엘에게서 보이는 메시지가 달랐던 것처럼 캐릭터들을 통해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다른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 열린 결말이지만 우리가 어떤 결말을 선택하는지에 따라서 이야기의 결말이 달라질 수 있다는 교훈마저도 느껴졌다. 그럼에도 우리 모두 숨만 쉬면 된다는 극을 관통하는 메시지를 통해 항상 뮤지컬을 관람하면서 많은 위로를 받았던 것이 아닐까? 모두가 어려운 상황에서 꿈이 간절한 상황에서 사무엘과 같은 선택을 하지는 않는다. 헨리와 사무엘, 그리고 가문을 지키기 위한 결정이었다고 하더라도 결국에 사무엘이 선택한 것은 헨리와는 다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 뮤지컬의 열린 결말 속에서 헨리의 앞날을 마냥 응원하게 된다.


최근에는 뮤지컬을 여러 번 관람하면서 해석하고 또 분석하는 즐거움이 있는 뮤지컬도 재밌지만, 다만 한번 즐겁게 감상하고 만족하는 마음으로 넘길 수 있는 뮤지컬이 더 많아졌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관객을 회전하게 하는 것도 하나의 마케팅 방식이라지만 극이 너무 어려워진다는 불만이 생기는 것이다. 최근 지인과 대화를 하다가 너무 잘 만든 뮤지컬은 한 번만 봐도 마음이 풍족해지는 느낌이 든다는 평을 들은 적이 있다. 소극장의 경우 관객들의 소비와 직결되는 문제 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건전한 뮤지컬들이 조금 더 많이 생겼으면 하는 욕심이 항상 가슴 한구석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 자극적인 소재들이 넘쳐나는 대학로에서 즐거운 마음으로 건전하게 즐길 수 있는 뮤지컬은 나에게 너무나도 소중하다.


다시 나에게 <윌리엄과 윌리엄의 윌리엄들>이라는 뮤지컬이 찾아와 줄지 모르겠지만, 온다면 많은 사람들이 관람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로써 긴 글을 마친다.

매거진의 이전글 혁명의 불씨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