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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독언 Dec 30. 2022

난 그저 안타까울 뿐이오

뮤지컬 난세 후기

2022.05.31 ~ 08.21 | 서경대학교 공연예술센터 스콘 2관

사진=콘텐츠플래닝 공식 트위터

솔직히 말하자면 난세는 다른 사람들의 흥미를 이끄는 내용의 뮤지컬이 아니기 때문에 지루하게 느낄 수 있는 요소가 다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나조차도 사극이라는 장르에 큰 매력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뮤지컬 난세를 접했을 때는 만족스러운 마음을 쉽게 감출 수 없었다. 나는 난세를 소개할 때 새로운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혁신적인 뮤지컬이라고 소개한다. 과한 칭찬일 수도 있으나 사극 뮤지컬은 약간 예스러운 느낌과 촌스러운 느낌이 공존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나의 선입견을 깨준 소중한 뮤지컬이다. 나는 난세의 전체적인 연출 방향이 참 좋았다. 뮤지컬의 러닝 타임은 1시간에서 2시간 정도의 사이 밖에 되지 않으나 고려의 멸망과 조선의 설립 또한 이방원과 정도전 사이의 7년이라는 세월을 관객들이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알맞은 페이스로 전개된다. 또한 이야기의 흐름이 중간에 모나게 튀어나온 부분 없이 일관되게 전개된다. 원래도 김은영 감독의 음악을 좋아하던 나로서는 마음에 드는 넘버부터 연출, 그리고 텍스트까지 모든 것이 세련되게 느껴져서 참 좋았다. 하나의 통일된 분위기를 끝까지 가져가기 때문에 극을 편하게 즐길 수 있었다. 역사적인 배경의 이해 없이도 즐겁게 즐길 수 있는 뮤지컬이지만, 역사적인 사실을 알고 본다면 더욱더 재밌는 뮤지컬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사진=콘텐츠플래닝 공식 트위터

조선 초기의 건국과 이방원의 왕자의 난에 대한 지식만 알고 있다면 사실 뮤지컬을 관람하지 않아도 난세라는 뮤지컬의 결말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하지만 난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정도전과 이방원 중 누가 살아남고 역사 속에서 승리하였는지가 아니기 때문에 결말을 미리 알아도 지루하거나 진부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난세에서 특히 인상 깊었던 부분은 리프라이즈라는 뮤지컬적 요소를 잘 사용했다는 것에 있다. 기존에 사용하던 뮤지컬 요소들을 통해 신선하고 세련된 새로운 것의 느낌을 만들어낼 수 있는 뮤지컬이라는 것이 신기했다. 예를 들면 배우가 노래를 부르는 소리가 루프 스테이션처럼 겹겹이 녹음되어 쌓이는 형식의 넘버 '명으로 보내소서'가 그랬다. 사실 대학로에 새로운 도전과 혁신적인 뮤지컬이라는 타이틀을 하고 돌아오는 뮤지컬을 볼 때마다 좀 적당히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는데, 난세의 조명이나 연출 같은 경우에는 새롭게 세련된 느낌으로 좋았다. 다른 극에 비해 난세가 극을 중간에 끊고 넘어가는 암전 요소가 적게 느껴지지만, 전체적인 암전 후 핀 조명을 사용하여 캐릭터들의 감정선에 집중되게 하는 연출은 특히 신선하고 좋았다. 영화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난세가 영화의 연출을 생각나게 하는 구성들이 많이 있다고 느꼈다. 이방원이 정도전을 참수한 이후 무대가 암전 된 이후 핀조명이 얼굴만을 비추며 암전에 암전을 거듭하는 장면에서는 박찬욱 감독의 친절한 금자 씨가 백 선생에게 복수를 한 직후 얼굴만 클로즈업한 카메라가 금자의 표정을 통해 감정의 극적인 변화를 보여주는 연출이 생각났다. 이런 연출을 통해 이방원이 자신의 내면에서 느끼는 처절하고 복잡한 감정선을 잘 드러낸 것 같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 부분에서 양지원 배우의 연기가 참 가슴 깊게 와닿았다.



이야기의 흐름에 따른 전체적인 감상

극의 첫 넘버가 극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낸다고 생각한다. 난세는 첫 넘버가 강렬하다기보다는 극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파악할 수 있도록 함축적인 느낌을 내포한다. 극의 시작을 알리며 하우스의 조명이 어두워지고 바람 소리가 들려오며, 꾼 배우가 무대로 등장해 '나는 그저 안타까울 뿐이오'라는 대사로 뮤지컬이 시작된다. 이 대사는 극의 시작을 애달프고 잔잔하게 만들어주어 좋았다. 첫 넘버가 강렬한 편은 아니었으나, 그래서 더욱 극과 조화로운 느낌이 들었다. 난세는 무대를 깊게 사용한다는 인상을 줬는데(바로 전 스콘 2관에서 올렸던 뮤지컬 더 테일의 무대를 생각하니 더 그렇게 와닿았다.), 처음 무대 중앙에 정몽주와 과거의 고려(高麗)를 나타내는 검은 천이 허공에 걸려 있는 것을 보았을 때 그 천이 주는 웅장함이 있었다. 고려를 향한 마음 변치 않을 것이라는 정몽주의 시조 단심가를 생각나게 했다. 첫 넘버 '그들의 이야기'가 끝난 직후, 정도전이 정몽주에게 자신들이 꿈꾸는 나라가 고려가 아닌 조선에서 이룰 수 없는 것이냐는 물음을 건넨다. 이후 이방원과 정몽주가 하여가와 단심가의 시조를 나누는 장면 이후 이방원은 천을 뜯어낸다. 정몽주의 죽음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이는 고려의 멸망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때의 붉은 조명은 정몽주의 죽음을 나타내지만, 이방원에 대한 강렬한 인상을 주는 극적인 표현이 되었다. 비앙원이 입은 옷이 붉은 색인 것 또한 조선을 피바람으로 연 장본이라는 생각과 동시에 왕을 떠올리게 하는 곤룡포의 붉은색이 떠올랐다. 또한 '귀천 + 깊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네' 넘버에서 정도전이 말하는 지음이 이방원이라는 것을 드러내면서 이방원과 정도전과의 우정이 깨졌다는 것을 극의 초반에 보여준다. 이러한 난세의 시작은 잔잔한 영화가 시작하는 장면을 떠오르게 했다. 넘버 또한 여러 가지 스타일을 시도하는 것이 느껴져서 좋았다. 특히 꾼 배우분들의 호소력 깊은 목소리는 정도전과 이방원, 그리고 이성계와 백성들의 마음을 대변해주는 역할을 했다. 포은 정몽주가 죽은 후 울부짖는 정도전의 마음, 그리고 포은의 죽음으로 조선을 피로 열었던 이방원에 대해 분노한 이성계, 무너지고 다시 일어서는 이방원을 향해 붉은 조명이 켜지고 결국 다시 피바람을 일으키는 이방원의 마음, 그리고 그저 살기 좋은 나라를 소망하는 백성들의 간절한 마음까지도.

사진=콘텐츠플래닝 공식 트위터

전에 서술한 것처럼 난세의 연출은 세련되고 깔끔한 영화의 연출을 생각나게 한다. 특히 챕터가 나뉘어 있는 옴니버스 형식의 영화가 떠오르는데, 난세는 과거와 현재의 시간을 넘나들며 이야기가 전개된다. 자칫하면 극의 시간 속에서 관객들이 길을 잃을 수 있으나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야기가 전개되는 장면이 과거인지 현재인지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극의 초반 정도전이 정몽주를 죽인 이방원은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나라의 왕이 될 수 없다는 대사를 끝으로 무대가 암전 된다. 그리고 그 이후 이방원 또한 세자 책봉이 되지 못하자 이방원은 정도전은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나라의 신하가 없다는 대사와 함께 무대가 암전 된다. 나는 이 암전들을 기점으로 뮤지컬을 관람할 때 1 챕터, 2 챕터로 나누어 관람했다. 또한 명으로 보내소서 이후 넘버인 차도살인지계 넘버에서, 이성계가 결국 정도전의 판의흥삼부사 파직 이후 동북면 순행을 명한 장면 바로 이후 정도전이 처음 이성계를 찾아왔던 과거의 시간대를 비춘다. 나는 그 기점을 3 챕터로 나누어 생각했다.

사진=콘텐츠플래닝 공식 트위터

내가 가장 인상 깊게 봤던 장면들은, 내가 주관적인 관점으로 나눈 3 챕터의 앞부분에 있다. 내가 생각한 3 챕터의 기준은 대사에 있는데, 정도전이 극의 초반에 이방원을 향해 '내가 이루고자 하는 나라의 군주가 될 수 없다'라고 말하는 장면을 1 챕터로 생각했고, 이방원이 정도전을 향해 '내가 이루고자 하는 나라의 신하가 될 수 없다'라고 말하는 부분을 2 챕터로 생각했다. 동북면 지사로 동북면에 내려가 순행하고 오는 장면에서는 바로 이방원을 처음 만나는 장면으로 시점이 되돌아간다. 이 이후부터를 3 챕터로 나누어 생각했다. 물론 뒷부분에서도 인상 깊은 장면들은 많았다. 이성계가 정도전에게, 정도전은 포은처럼 잃지 않겠다고 말하는 장면이나 혹은 이성계가 병상에 누운 이후 정도전이 이방원에게 사람의 마음을 얻기 위해 노력을 해보라 말한 직후 '어명이오!'하고 외치는 장면은 정말 이방원의 말처럼 정도전이 단순히 신하의 자리에 위치한 것이 아닌, 왕의 위치에서 행동하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지며 그의 주제넘음이 드러나는 장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난세라는 극에서 항상 왕의 자리에 서서 왕의 말을 전하는 것은 꾼의 역할이었는데 정도전이 왕의 목소리를 빌리는 것도 아닌 자신의 목소리로 어명을 하는 모습이 특히 그러했다. 이 장면은 극 초반 이방원이 정도전에게 왕이 되고 싶은 것처럼 보인다고 말했던 장면이 떠올랐다. 또한 넘버 침투에서 이방원과 정도전의 관계를 고양이와 쥐의 관계에 비유한 것이 재밌다고 느껴졌다. 처음 볼 때에는 그것이 정도전과 이방원을 뜻하는 줄 미처 모르고 관람하였는데, 점차 시간이 지나며 그 넘버가 뜻하는 것이 생각보다 직관적이라 해석하는 재미 또한 느껴졌다. 정도전을 죽이기 전 이방원의 감정적인 동요까지도.

사진=콘텐츠플래닝 공식 트위터

배우들의 노선이 돋보이는 연기 포인트

'네 이놈, 네가 감히 정몽주를 죽여 피로 조선을 열었겠다.'와 같은 문장들을 통해 꾼이 연기하는 왕의 포인트들이 꾼 배우분들마다 다른 것 또한 인상 깊었다. 특히 침투 넘버에서 정도전을 툭툭 치며 이방원이 저기 있다고 말하는 듯한 정연 배우님의 디테일이 좋았다. 사실 나는 난세를 보면서 이방원이 아닌 정도전과 백성에게 이입했는데, 이준우 배우가 연기하는 이방원은 딕션이 뚜렷하고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분명한 이방원이라는 것이 느껴져서 이준우 배우 회차로 관람할 때에는 항상 묘한 설득을 당했던 것 같다. 나는 최석진 배우를 해적이 아닌 더 테일 에이프릴 풀스라는 작품에서 처음 만났는데, 그때에는 정말 곧 깨질 것 같은 위태롭고 불안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면 난세에서는, 정도전을 죽인 이후 '사사로운 감정은 없습니다. 대의에 따를 뿐'이라는 대사를 정말 아무런 감정의 동요도 없이 말하며 왕의 모습을 보여줬다. 나는 정도전을 참수한 이후의 저 대사를 참 좋아한다. 이방원을 연기하는 배우들의 연기 노선이 잘 보이는 부분이라고 생각해서 항상 그 변화를 캐치하며 관람하는 재미가 있었는데, 양지원 배우님이 연기하는 이방원은 세심한 감정적인 변화가 잘 보여서 좋았다. 정도전을 죽인 이후 감정의 동요에도 불구하고 가려는 방향이 뚜렷했기 때문에, 사사로운 감정이 없으며 대의를 위한 것이라는 대사가 잘 와닿았던 것 같다. 주민진 배우의 디테일 중에 좋았던 것은 '뜰 앞의 국화' 넘버에서 국악 특유의 기교를 넣어 넘버를 부르시는 것... 사실 가장 좋은 것은 마지막에 말하는 법이다. 가장 좋아했던 넘버는 정도전 인생에서의 터닝 포인트 곡처럼 느껴지는 '귀천 + 깊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네'이지만 나에게 가장 큰 울림을 주었던 넘버는 '잠시 잊었다'였다. 사실 이 넘버는 정도전의 또 다른 터닝 포인트처럼 느껴질 수 있는 곡이다. 나를 힘들게 하는 것들에 집중하지 않고 나의 길을 묵묵히 걷다 보면, 항상 내 곁에 있지만 당연시 생각해서 고마움을 모르던 존재들이 있다는 것을 떠올리게 했다. 나는 정연 배우님의 디테일을 참 사랑했는데, '힘내시게, 나도 이 자리가 버겁지 않을 때가 있었을까'라는 디테일이었다.


개인적으로 취향이 아니거나 실망스러웠던 부분들

특히 도전 정신이 느껴지는 넘버들이 그러했는데, 적당히 해!라고 말하고 싶은 부분들이 있었다. 난세의 '명으로 보내소서' 넘버가 실망스러웠던 이유는 배우의 목소리를 녹음하여 루프 스테이션처럼 음을 쌓아 만든 것이 실상 사극과 안 어울리고 너무 붕 뜨는 느낌이 들어서 싫었는데, 정도전의 말을 녹음한 다른 넘버에서도 MR이라는 티가 너무 많이 나는 것이 사극과는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느낌이라 싫었다. 그러나 이방원의 목소리가 쌓이고 울리면서 이성계를 압박하는 유생들의 외침이라고 생각하면 정도전을 명으로 보내고자 하지 않는 이성계의 고뇌가 느껴지는 좋은 연출이었다. 좋은 연출인 것과 별개로 넘버는 정말 취향이 아니었다.


또한 솔직히 말하자면 난세가 재밌는 뮤지컬은 아니라는 감상 또한 남긴다. 사극이라는 특성상 감안해야 하는 부분이라 생각하지만, 개인적으로 사극 뮤지컬의 무겁고 진중한 분위기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생각 또한 들었다. 꼭 모든 뮤지컬들이 재미있거나 흥미로워야 할 필요는 없으나, 많은 사람들이 더 즐겁게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아쉬운 마음에서 추가로 텍스트를 적어 봤다. 남들에게 좋은 뮤지컬이라고 추천은 하겠지만 재밌는 뮤지컬이라고 추천을 하기에는 약간 어딘가 부족한 느낌이 있다. 나처럼 역사적 지식이 없는 사람도 즐겁게 관람을 할 수 있지만,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역사와는 분명히 다른 부분들도 있으며 역사를 보면서도 이렇게 사람마다 해석하는 바가 다르구나 하는 것 또한 느낄 수 있다. 뮤지컬 난세는 재미를 바라고 봐서는 안 되는 뮤지컬이다. 또한 이방원이 정도전을 참수하기 직전 장면은 중요한 장면이라는 생각은 들지만 너무 루즈하고 늘어지는 느낌이 있어서... 대사들 또한 이방원과 정도전의 뜻을 대변하는 느낌으로 중요하다는 것은 알겠지만 관람하는 데 있어 좀 힘들었다. 난세는 단순히 좋고 나쁘고를 가리는 일차원적인 뮤지컬이 아니다! 우리 모두 더 나은 사람과 더 나은 구성원이 되기 위해 그런 시선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선입견과 편견 없이 타인의 말을 듣고 통찰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나를 발전시킨다는 점에도 큰 의미를 두지만 그것뿐만이 아니라 내가 행복해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미처 모르던 사실을 알게 된다는 사실이 나를 행복하게 했다. 뮤지컬 난세가 내가 가지고 있던 사극 뮤지컬에 대한 선입견을 깨 주었듯이! 사극 뮤지컬이지만 그것뿐만이 아닌 많은 생각을 하게 했던 웰메이드 고품격 사극 뮤지컬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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