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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현 Jun 11. 2023

나는 진경이네서 설거지를 도맡아 했는데 싱크대에 수세미가 여섯 개나 됐다. 여섯 개도 충분히 많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그 집에는 수도가 여섯 군데 있는데 수돗가마다 비슷한 개수의 수세미가 놓여있었다. 밖에 나와 있는 게 그렇다는 것이고, 미처 꺼내 놓지 않은 수세미도 적지 않을 것이다. 왜 그렇게 많은 수세미가 필요한지 물었더니, 진경은 그것들이 다 기능이 다르고 했다. 몬드리안의 격자무늬 추상화가 프린트된 수세미는 스테인리스용이고, 철물점에서 산 옛날 수세미는 붓을 닦기 좋으며, 눈코입이 그려진 연두색 수세미는 독일제인데 물 온도에 따라 색깔이 바뀌는 재간둥이라는 것이었다. 그 집에 넘치도록 많은 건 수세미만이 아니다. 


나는 진경이네 가면 내가 앉고 누울 자리를 만들기 위해서 약간의 정리를 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집 정리에 매달렸다. 물건의 포화도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것도 있지만 오랫동안 책상 앞에만 앉아 있었더니 몸 쓰는 일을 하고 싶어 좀이 쑤셨다. 정리는 버리는 데서 시작된다. 마음 같아서는 트럭을 불러 싹 다 내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내 것이 아니니 쓰레기만 골라 내버리기로 했다. 마당 여기저기에 널브러진 비닐봉지, 공구, 옷, 이불, 그릇, 신발, 의자 등의 잡동사니들이 첫 타깃이 됐다. 그런데 그것들 대부분이 언 땅에 붙들려 있어서 있는 힘을 다해 잡아당겨도 떨어지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땅 위에 있는 것들을 줍는 데 만족해야 했는데, 그것만 해도 대형 쓰레기 봉지 네 개가 됐다. 


두 번째 타깃은 마당에 쌓인 낙엽과 풀. 마당엔 누런 풀이 허리까지 우거져 있고 낙엽이 종아리까지 쌓여 있었다. 그것들을 태워 없애기로 했다. 그런데 마른 풀을 모아 놓고 불을 붙이려는데 진경이 그것을 빼앗아 들었다. “너 이게 얼마나 좋은 땔감인 줄 알아?” 진경은 그것을 가져다 아궁이 앞에 쌓아 놓았다. 그 앞엔 이미 땔감이 발 디딜 틈이 없이 쌓여 있었는데 말이다. 내가 낙엽을 모아 놓고 불을 붙이려고 하자 진경이 또 그것을 빼앗아 들었다. “너 이게 얼마나 좋은 거름인 줄 알아?” 진경은 그것을 가져다 나무 밑에 부려 놓았다. 그 밑에는 이미 낙엽이 산을 이루고 있었는데 말이다. 


한번은 내가 모닥불에 던져 넣은 다리 세 개 짜리 의자가 불가에 세워져 있었고, 또 한번은 내가 점심 설거지 하면서 쓰레기통에 버린 낡은 수세미가 저녁 설거지할 때 보니 제자리에 돌아와 있었다. 진경이 죽은 나무에 몇 번이고 물을 주는 걸 본 적이 있다. 죽은 것처럼 보여도 잎이 새로 날지 모른다고 했다. 이 무슨 타르코프스키적 시추에이션이란 말인가. 확신컨데 죽은 나무에서 잎이 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다리 세 개 의자는 불가에 세워진 채 눈비를 맞으며 썩어갈 것이고, 수세미는 다른 수세미들과 뒤섞인 채 언제까지고 방치될 것이다. 


진경은 물건을 쓰레기통에서 꺼내 놓기만 하면 그 다음은 물건이 스스로 알아서 해 나갈 거라고 여기는 것 같다. 하긴, 스스로 알아서 해 나가긴 한다. 그것이 우리가 원하는 방향이 아니라는 것뿐. 관리 않고 뒀을 때 가장 문제가 되는 건 음식이다. 나는 그릇 뚜껑을 열 때마다 아주 자지러졌는데, 진경은 그 안에서 벌어지는 엄청난 사태를 보고도 얼굴 한 번 찡그리지 않았다. 그 안에 자리잡은 생명체들을 좋아하는 것까지는 아니겠지만 같이 사는 데 불편을 느끼지 않는 것이다. 그런 성정을 지녔으니 별별 물건 별별 손님들과 같이 지낼 수 있는 것이리라. 별별 손님에는 나도 포함된다. 


나라고 남의 걸 버리는 게 말 안 되는 월권인 걸 모르지는 않는다. 어릴 적 엄마가 내 물건을 버리곤 했는데, 나 자신 그 일을 평생의 원한으로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진경은 내가 하는 짓을 어떻게 견디는 것일까? 그냥 놔두면 공간을 제멋대로 전유하는 데 사람만큼 적극적인 존재가 없다. 내가 미치는 영향은 음식에 꼬이는 벌레에 비할 바 아닌 것이다. 게다가 나의 활동은 집주인의 생활방식을 부정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진경은 버려진 물건을 제자리에 돌려 놓는 것 외에는 내가 뭘 하든 그냥 내버려뒀다. 


날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마당을 치웠지만 마당은 치운 티도 나지 않았다. 마당이 워낙 어지럽지도 했지만 내가 일을 잘 못했다. 마당 한 가운데 산을 이룬 장작을 제 자리로 옮겨 쌓는 일을 하는데, 장작을 수레로 나르자니 수레 무게에 발목이 아프고 손에 들고 나르자니 손목이 아팠다. 장작을 열 개씩 세서 수레로 나르는데 장흥에서 놀러 온 기석이 옆에서 지켜보고 있다가 “그렇게 코딱지만큼씩 담아서 언제 옮겨요?” 라면서 수레를 뺏더니 장작을 수레 가득 실어 날랐다. 그는 몇 번 만에 장작을 다 옮기고 나서 통나무를 팼다. 


나는 수레를 뺏기고 할 일이 없어져 마당을 돌아다니며 언 땅에 붙잡힌 채 땅 위로 머리만 삐죽이 내밀고 있는 비닐과 옷가지를 잡아당겨보았다. 언 땅이 그것들을 마주 잡아당기는 힘이 차츰 약해지고 있었다. 머지 않아 언 땅에 붙잡혀 있던 것들이 모두 풀려나 쓰레기봉지 속으로 들어가게 될 테고 마당은 깨끗해질 것이었다. 나는 조바심 치며 봄을 기다렸다. 


그러나 골짜기의 겨울은 호락호락 물러나지 않았다. 진경이 “아랫집 차에 커버를 씌워 놓은 걸 보니 눈이 올 건가 봐.” 라고 하더니 다음 날 눈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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