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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현 Sep 21. 2023

휴가

요다가 아픈 뒤로 집에 안 들어 간 날이 엄마네서 잔 걸 빼면 서너 번 밖에 안 되고 그 서너 번도 2박을 넘긴 적이 없다. 진우나 나 둘 중 하나는 집에서 요다를 돌봐야 하는데, 진우가 명절에도 이틀 이상 쉴 수 없는 직장에 다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 여름 진우가 웬일로 휴가를 일주일이나 냈다. 그 일주일 동안 진우가 요다를 맡아 돌보고 나는 여행을 가기로 했다. 나의 일상과 화끈하게 다른 외국에 가고 싶었다. 그러나 휴가 날짜가 휴가 전 주에 정해져서 항공권을 구할 길이 없었다. 지방 사는 지인들을 만나며 돌아다니기로 했다. 울산 사는 시형에게 전화를 했다. 울산에 놀러가고 싶다고 했더니 시형은 그러지 말고 천안으로 오라고 했다. 천안에서 모텔을 하는 성구가 흑염소를 산다고 동창들 몇을 불렀는데 같이 가자는 거였다. 흑염소라고? 흑염소 같은 걸 먹고 싶었던 적은 없지만, 뭐든 안 해본 걸 하는 건 좋았다. 월요일 12시에 천안아산역에서 시형과 만나기로 했다. 


일요일 오후 5시에 엄마 집을 나섰다. 시형과의 약속 시간까지 17시간이 남아 있었다. 양수에서 천안까지 전철로 연결돼 있으니 중간에 내리고 싶은 역에 내려 동네 구경을 한 뒤 자고 다음 날 아침 천안에 가기로 했다. 

양수역에서 경의중앙선을 탔다. 등산복 차림의 행락객이 많았다. 열차가 철교를 지났다. 차창 너머 북한강은 열차 가득 행락객을 불러모으기에 충분히 아름다웠다. 철교 건너편의 운길산 역에서 내릴까? 그러나 강가라는 걸 빼면 엄마네 동네와 별 다르지 않을 텐데, 거기 펜션에서 잘 바에는 엄마네서 자는 게 나았다.


몇 달 전부터 엄마까지 건강이 나빠져 주말마다 엄마 집에 다닌다. 집에서 밥을 안 먹겠다고 요리조리 도망 다니는 요다를 붙잡아 강제급식을 하다가 주말엔 엄마한테 가서 엄마를 억지로 식탁에 앉혀 밥을 한 숟가락이라도 더 먹이려고 씨름하는 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요다가 신부전 진단을 받았을 때 의사는 한번 망가진 신장은 회복되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그때 몇 날 며칠을 먹지도 자지도 못한 채 웅크리고 있는 요다를 보면서 그런 시간을 견디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했다. 요다에게 그처럼 고통스러운 시간만 남아 있을 거라 여긴 것이다. 그러나 나의 예상과 달리 요다는 기력을 되찾았고 여러 제약이 있는 새로운 생활에 적응했다. 요다는 아픈 채로 잘 지낸다. 허구한 날 자는 게 일인데, 사람처럼 누워서 만세를 부르고 자는 모습이 얼마나 편안해 보이는지 모른다. 아픈 요다를 보며 죽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 한 건 나에 대한 걱정 때문이기도 했다. 요다에게 하루 세 번의 밥과 아홉 번의 약을 챙겨 먹이며 살아야 할 날들이 공포스러웠다. 그러나 나 역시 새로운 생활에 적응했다. 매일 구글 타이머를 맞춰 놓고 알람이 울릴 때마다 일어나 밥과 약을 먹인다. 그 참에 한번씩 자세를 바꾸는 건 나의 척추 건강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몇 달 전 엄마가 노쇠와 우울증에 약 부작용이 겹쳐 먹지도 않고 잠만 자다가 가끔 깨서는 죽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반복할 때도 그처럼 곤욕스럽게 사느니 차라리 엄마 바람대로 되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했다. 엄마의 나이가 너무 많아서 회복될 수 없으리라 여긴 것이다. 그런데 엄마는 약을 바꾸고 상태가 극적으로 좋아졌다. 입에 달고 살던 죽고 싶다는 말을 거짓말처럼 안 하게 됐고, 천안에서 잘 살고 있는 자기를 괜히 거기 데려다 놔서 바보가 됐다는 원망도 거기 와서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난 걸 보면 자기가 인복이 있다는 말로 바뀌었다. 좋은 사람들이란 요양보호사들을 가리킨다. 엄마가 혼자 생활을 못하게 되면서 요양보호사들이 요일별로 번갈아 온다. 엄마는 그들이 얼마나 음식을 정성스럽게 하고 자기한테 잘 하는지 모른다면서 아무리 돈 받고 하는 일이라지만 돈 준다고 그렇게 할 수 있겠냐고 그들을 천사라고 했다. 식욕이 돌아오면서 38킬로까지 내려갔던 몸무게가 41킬로로 늘어났고 손을 놨던 집안일도 하기 시작했다. 밥과 설거지는 안 해도 음식물 쓰레기는 꼭 자기가 가지고 나가는데, 음식물 쓰레기를 풀숲에 휙 던진 뒤 갈퀴로 마른 풀을 긁어 그 위를 덮는 일이 재밌다고 한다. 특히 손 빨래하길 좋아하는데, 햇빛 비치는 수도가에서 졸졸 흐르는 물에 빨래하는 게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고 한다.


열차는 같은 선로를 사용하는 다른 열차를 먼저 보내느라 역마다 몇 분씩 멈춰 서며 갔다. 나는 엄마가 빨아서 다려준 남방을 입고 있었다. 엄마는 내가 입고 간 티셔츠를 벗기고 자기 남방을 입히면서 옷 잘 입은 거지는 얻어먹어도 옷 못 입은 거지는 못 얻어먹는다고 나이 들수록 옷을 잘 입어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다. 기력이 돌아오며 잔소리도 같이 돌아온 것이다. 열차 안이 추워서 가방에 있던 티셔츠를 꺼내 팔을 덮었다. 


엄마를 간병하기 시작한 뒤로 문득문득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용원의 사촌누나. 7년 전 박근혜 탄핵 집회에서 우연히 만난 용원은 사촌누나와 같이 있었다. 집회가 끝나고 그녀와 헤어져 집에 가는 길에 용원이 그녀 얘길 했다. 용원의 큰어머니이자 그녀의 어머니가 뇌출혈로 쓰러져 의식만 있지 목 이하를 못 움직인 채 누워만 있다고 했다. 어머니가 쓰러진 게 그녀 대학 때인데 그녀가 그때부터 지금까지 혼자 집에서 어머니를 간병한다고, 그날도 몇 달 만에 외출한 거라고 했다. 나보다 한 살 많다는 그녀가 대학 때부터라면 대통령이 노태우에서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로 무려 5번이나 바뀔 시간이 아닌가. 나는 경악했고 그녀를 동정하는 동시에 그처럼 긴 시간 그런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녀가 답답했다. 그녀가 미련하고 무능하게 느껴졌고, 용원에게 그런 내색을 하는 말도 했다. 내 인생에는 그 비슷한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 자신하던 때라 남의 말을 쉽게 한 것인데, 돌이켜 생각하니 그 무지한 자신감에 실소가 났다.


전철이 남양주를 지나 구리로 접어들었다. 도농까지 도와 농이 섞여 있던 풍경은 구리에 이르자 빌딩숲이 됐다. 지상철로를 달릴 때면 전철이 지나는 곳에 내려보고 싶어진다. 버스에선 잘 안 그런데 전철에서 유독 그런 마음이 드는 건 방음벽 때문인 것 같다. 다 보여주는 것보다 가슴골을 살짝 드러내는 게 유혹적인 것처럼 방음벽 너머로 보이는 모습이 유혹적인 것이다. 구리역에선 언제나 많은 사람들이 타고 내리는데 그들이 어떤 곳에 사는지 한번쯤 내려서 둘러보고 싶었다. 방음벽 너머로 언뜻언뜻 보이는 풍경을 주의 깊게 살폈다. 아파트, 아파트, 아파트들. 동네 구경을 하기에 아파트 단지처럼 재미없는 곳이 없다. 나는 자리에 앉아 구리역에서 내리고 타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회기역에서 내려 천안 방면으로 가는 1호선으로 갈아탔다. 1호선 라인에서 가보고 싶은 곳은 평택. 어릴 적 신문에서 미군기지가 있는 동네의 사진관에 걸린 사진들을 본 적이 있다. 한국여성과 미군이 다정하게 포즈를 취한 사진들이었다. 외국인이 드물고 국제결혼은 더더욱 드물던 시절이라 그 이국적인 사진을 봤을 때부터 그곳이 궁금했다. 검색해 보니 평택과 송탄에 미군기지가 있었다. 평택은 역에서 내려 미군부대까지 또 버스를 갈아타고 가야 하는데, 송탄은 역 근처에 미군부대가 있고 바로 앞에 평택국제시장이라는 큰 시장도 있었다. 송탄에 내리기로 했다. 그러나 예상소요시간이 1시간 54분, 송탄에 도착하면 9시였다. 이미 한 시간을 차안에 있었는데, 두 시간이나 더 차를 탈 일이 한심했고, 그 시간에 도착하면 가게들이 문을 닫아 볼 것도 없을 게 분명했다. 나는 밤 늦게는 뭘 먹지 않고 술도 안 마시니 그 시간에 할 거라곤 여관에 들어가 자는 것밖에 없는데, 퀴퀴한 방에 들어가 남들이 쓰던 침구에 들어가 잘 일이 생각만 해도 찝찝했다. 


열차가 동대문에 가까워질 수록 거기 내려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 편안하게 집에서 자고 아침에 기차를 타고 천안에 가면 되는데, 왜 괜한 고생을 사서 한단 말인가. 그러나 그 기회를 놓치면 연달아 며칠을 집 밖에서 지낼 수 있는 기회는 상당기간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내게 허락된 날을 세 보았다. 6박 7일에서 1박을 엄마네서 썼으니 5박이 남았는데 그날 밤을 집에서 자면 4박뿐이 안 남았다. 나 어릴 땐 바나나가 귀해서 손님들이 사와야 바나나를 먹을 수 있었는데, 그나마도 내 몫은 한 두개뿐이어서 바나나를 배 터지게 먹는 게 소원이었다. 바람에 굴러다니는 비닐봉지처럼 지치도록 떠돌고 싶은 마음이 그때 그 마음처럼 간절했다. 동대문역에 내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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