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에 친구를 만났는데 괜한 말을 해서 계속 찜찜한 거 있잖아. 앞으로 안 하는 게 나은 말은 하지 않기로 결심했어.”
내가 말했다.
“어떤 말을 했는지 말해줄 수 있어요?”
R이 물었다.
“친구가 만날 때마다 남편과의 관계에 대한 괴로움을 토로하는데, 내 보기엔 걔가 더 문제거든. 답답해서 몇 마디 했는데, 사실 말해 봐야 소용없잖아. 괜히 서운하기만 하지.”
내가 말하자 R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도 말해 놓고 후회할 때 있어?”
내가 물었다. 신중하고 사려 깊은 R도 나와 같은 문제로 고민할 때가 있는지 궁금했다.
“글쎄요. 기억나는 게 없네요.”
R은 한참 생각하더니 말했다.
“정말?”
내가 물었다.
“그냥 기억이 안나는 걸 거예요.”
“그런 일이 있었으면 기억이 안 날 순 없어. 후회는 뼈아픈 감정이거든.”
“아, 있어요. 고등학교 때 교회 다니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한테 신은 없다고 한 거.”
“어머. 나는 그런 후회를 다 모우면 산을 쌓을 수 있는데, 너는 10년 전 기억까지 뒤져야 그런 일을 하나 찾아낼 수 있네.”
“그때 말해 놓고 나서 후회했어요. 종교를 가진 사람한테 그런 말 하는 건 안 좋은 일 같아요.”
“근데 왜 그랬어?”
“신은 말로는 말이 안 되는 거니까 제가 말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 거 같아요. 그 친구가 대답을 잘못하니까 내가 이겼다는 승리감에 취했던 것도 같고.”
R이 말했다. 후회할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나 적게 하는 사람이나 그런 말을 하는 심리는 같은 것이다.
말을 하다 상대의 잘못이 보이면 그것을 지적하고 싶어진다. 잘못된 걸 바로잡고 싶어서라고 하지만
내가 옳다고 주장하고 싶고 잘난 체하고 싶고 상대를 눌러 이기고 싶은 것이다. 그건 눈앞의 케이크를 입에 넣고 싶은 것만큼이나 참기 힘든 충동이다. 다른 수고양이와 마주칠 때마다 몸을 부풀린 채 으르렁대는 수고양이들도 나와 같은 충동에 사로잡히는 것이리라. 충동은 이성을 마비시키고 나는 자기과시에 취해 떠들다가 또 물을 엎질렀다는 걸 깨닫곤 한다. 그런 일을 하도 반복하다 보니 말하기 전에 결과가 예측돼 말을 할지 말지 망설이게 되기도 한다. 그럴 땐 입을 다물어야 한다. 그런데 그게 잘 안 된다. 기어야 말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것이다. 먹을까 말까 망설이다 입에 넣은 케이크가 그렇듯 만족감은 잠깐이다. 입안에서 자극적 쾌감이 사라지기도 전에 명치가 답답해오듯 상대의 날 선 방어에 마음이 불편해지지만 일단 시작하면 먹는 걸 멈출 수 없는 것처럼 말을 시작하고 나면 물러날 수 없게 돼 버린다.
말 한마디 한마디를 신경 써서 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말은 많은 부분 습관과 무의식에 의해 저절로 나오고, 한번 뱉은 말은 주워담을 수 없다. 반면에 글은 저절로 써지지 않고 외국어처럼 의식을 거쳐서 나오며, 출력된 정보가 허공에 흩어지는 게 아니라 문자로 고정되기 때문에 그걸 보면서 쓰여진 내용을 숙고하게 된다. 그 결과 글을 쓰는 나는 R 못지 않게 신중하고 사려 깊어서 10년 전까지 과거를 뒤져도 후회할 말을 찾지 못한다.
그러나 글도 자기를 과시하려는 욕망에서 자유롭지 않다. 이성의 검열을 통과해 몇 번이고 다듬어질 기회를 가지기 때문에 그 욕망이 세련되고 교묘하게 드러나는 것뿐. 글을 쓰면서 글에 드러나는 나 자신이 손님이 오면 교양 있는 말투로 바뀌던 엄마처럼 가증스러울 적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