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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현 Aug 19. 2024

늦봄

“비 온다니까 창문 닫고 가.” 진우가 출근하며 소리쳤다. 현관문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다시 잠들었다가 눈을 뜨니 9시였다. 식물수업이 있는 날이었다. 늦지 않으려면 20분 안에 집을 나서야 했다. 벌떡 일어나 세수를 건너 뛰고 이만 닦았다. 봄날씨가 변덕스러워 옷을 어떻게 입을지 고민됐지만 길게 고민할 시간이 없었다. 입고 잔 티셔츠 위에 얇은 가디건을 입고 그 위에 홑겹 잠바를 걸쳤다. 현관에서 우산을 가져갈까 하다가 비가 안 오길래 그냥 나왔다.


부처님 오신 날이라 광화문에서 차가 막히는 바람에 겨우 시간에 맞춰 습지에 도착했다. 이른 봄에도 그곳에서 수업을 했다. 그때는 녹색이라곤 막 물이 오르기 시작한 버드나무 가지뿐이었는데 두 달 만에 짙은 녹색이 습지를 빈틈없이 뒤덮고 있었다. “밀림이예요. 밀림.” 강사가 커다란 잎사귀를 펼치고 경쟁적으로 키를 키우는 수풀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는 단풍잎돼지풀을 지나 몇 발작 가다 서서 젓가락나물을 관찰하고, 또 몇 발작 가다 서서는 참새귀리를 관찰했다. 한데서 오래 서있으니 추웠다. 한주 전에도 옷을 얇게 입은 걸 후회해놓고 이날은 옷을 더 얇게 입었는데, 그사이 여름에 일주일이나 가까워진 데다 바로 전날 날이 더워서 이날도 그럴 줄 안 것이다. 빨아서 장롱 깊이 넣어둔 겨울 옷을 꺼내 일을 만들고 싶지 않기도 했다. 세탁기 돌리는 게 뭐가 힘들다고. 나는 추위에 떨며 일행의 옷차림을 살폈다. 다들 나와 마찬가지로 접으면 손수건 하나 부피밖에 안 되는 얇은 홑 잠바 차림이었는데 강사만 두꺼운 고어텍스 잠바를 입고 있었다. 부러웠다. 정오가 지나면서 비가 오기 시작했다.


수업을 마치고 강사가 버스정류장까지 차로 데려다 줬다. “윤선 샘, 청바지 입은 게 얼마나 부러웠는지 몰라.” 강사가 운전하면서 말했다. “저는 샘 잠바가 부러웠어요.” 조수석의 윤선이 말했다. 내색은 안 했지만 다들 추웠던 것이다. 유리창을 때리는 빗방울이 점점 굵어지고 있었다.


버스가 광화문을 지나는데 진동벨이 울렸다. “언제 올 거야?” 엄마였다. 엄마는 부처님 오신 날이라 절에 와있었다. 절에 올 때는 요양보호사가 데려왔는데, 집에 갈 때는 내가 같이 가기로 했다. “가고 있어. 삼사십분쯤 걸릴 거야.” 내가 대답했다. 


절에 가는 길에 옷을 갈아입으려고 집에 들렀다. 집에 들어가자 마자 비에 젖은 잠바를 벗고 폴라폴리스 잠바로 갈아입었다. 구스 패딩을 입을까 잠깐 고민했지만 5월 중순에 구스는 아무래도 지나쳤다. 이를 닦으며 카카오택시를 신청했다. 7분 거리의 택시가 호출됐다. 엄마에게 곧 갈 테니 밖에 나와 있으라고 전화하고 나서 기모바지를 찾는데 바지가 보이지 않았다. 그 사이 카카오택시가 5분 거리에 와 있었다. 이를 헹구고 스카프를 찾는데 그것도 보이지 않았다. 카카오택시가 3분 거리에 와 있었다. 차안에만 있을 거니까 더 두껍게 입을 필요가 없을 거라고 생각하며 우산을 챙겨 집을 나섰다. 


도로변에서 배웅 나온 보살님이 씌워주는 우산을 쓰고 있던 엄마가 택시에 올랐다. 엄마는 봄나들이 나온 얇은 자켓 차림이었다. 만져보니 손이 찼다. “춥지?” 내가 물었다. “어제는 해가 나서 옷을 얇게 입고 왔는데 비가 온다고 하더니 정말 비가 오네.” 엄마가 말했다. 집까지 가서 엄마 옷 챙길 생각을 못하다니. 나는 잠바 안에 입은 가디건을 벗어 엄마에게 입혔다. “벌써 후끈하네.” 엄마는 가디건 소매에 팔을 끼면서 말했다. 그러나 몸을 따뜻하게 하기에 가디건은 너무 얇았다. 엄마에게 잠바를 벗어줘야 했지만 그러자니 나도 추웠다. 가디건을 벗은 어깨가 벌써 써늘했다. 


택시가 고대 앞을 지났다. “김호중이가.” 엄마가 말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가수가 김호중인데, 그 이름이 생각이 안 나가지고 한참을 생각했어. 아까 테레비에서 걔가 술 먹고 운전하다가 차를 치는 게 나왔는데 걔가 하얀 차를 두 대나 치고 도망을 쳤어. 내가 걔가 엄마도 없고 아빠도 없이 힘들게 자란 애라 불쌍해서 좋아했는데, 도망가면 안 잡힐 줄 알았을까?” 나는 듣기만 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회기역에서 내려 경의중앙선으로 갈아탔다. 이런 날씨에 왜 에어컨을 트는 것일까? 엄마와 나란히 앉아 있는데 천장에서 내뿜는 바람이 규칙적으로 얼굴을 때렸다. 열차 안에 에어컨 바람이 덜 미치는 곳이 없는지 살펴보았다. 천장에 두 줄로 이어지는 에어컨이 열차의 앞뒤 좌우를 빈틈없이 고르게 커버하고 있었다. 우산이라도 펼쳐 바람을 막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손바닥을 펼쳐 바람을 막으며 승객들의 옷차림을 살펴보았다. 아침에 내가 입었던 것 같은 홑 잠바 차림이 제일 많았고 반팔에 반바지 차림도 여럿이었다. 5월하고도 중순에 두꺼운 옷을 입기가 망설여지는 건 당연하다. 나는 나보다 열악한 그들의 옷차림을 살피면서 기껏 집에까지 가서 폴라폴리스 잠바를 하나 걸쳐 입고 나온 나의 선택을 합리화하는 데 골몰했다. 합리화에 성공한다 한들 추위가 가시는 건 아니었다. 점점 더 추웠다. 늙고 병약한 엄마는 나보다 더 추울 게 틀림없었다. “안 추워?” 나는 몇 번이나 물었는데 엄마는 그때마다 하나도 안 춥다고 대답했다. 그럴 리가 없었다. 마스크를 하면 얼굴을 때리는 바람이라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엄마 가방을 뒤졌지만 마스크는 없었다. 엄마가 고개를 돌려 나 하는 걸 참견하다가 내 옆에 앉은 중년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여자는 늘씬한 몸매에 망사로 장식된 검은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마스카라를 짙게 한 눈이 인상적이었다. “눈이 아주 예쁘시네요.” 엄마가 말했다. “고마워요.” 여자가 대답했다. 에어컨에서 바람이 뿜어져 나올 때마다 여자가 망사 아래 가는 팔과 허벅지를 손바닥으로 비볐다. 


양수역에 내려 택시로 갈아타고 엄마 집에 도착했다. “돈이 없어서 이렇게 얇은 걸 산 거야?” 엄마가 집에 들어가자마자 가디건을 벗어주면서 말했다. 그 집을 나오기 전에 엄마의 스웨터와 바지 내복을 입을까 하다가 그것들을 도로 가져갈 일이 귀찮아 관뒀다. 스카프를 할까 하다가 그것도 내 스타일이 아니라 안 했다. 


가디건을 입었으니 갈 때보다 덜 추울 줄 알았다. 어두워지며 기온이 떨어질 거라는 생각을 못 한 것이다. 열차는 역마다 한정없이 멈춰서 있었고 열린 문으로 찬바람이 사정없이 들어왔다. 열차 안은 그래도 나은 편이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한성대입구역을 나오자 한겨울 추위가 기다리고 있었다. 횡단보도에서 신호등이 바뀌길 기다리는데, 대형 파라솔 아래 반팔에 반바지 차림의 남자아이가 두 손으로 양팔을 감싸 안고 과장되게 몸을 떨고 있었다. 그 옆에는 아이의 부모가 또 다른 아이를 가운데 세우고 서로 꼭 껴안은 채 떨고 있었다. 추위로부터 도망치려면 어서 버스에 타야 했다. 그런데 길 건너 정류장에서 내가 타야 할 버스가 출발하고 있었다. 멀어져가는 버스의 뒤꽁무니를 바라보며 횡단보도를 건넜다. 버스도착안내 전광판을 보니 다음 버스가 차고지에 대기 중이었다. 비바람치는 정류장에 서서 추위를 견딜 자신이 없어 걷기 시작했다. 몸에 열을 내려고 최대한 빨리 걸었다. 한 정거장을 걸어가 전광판을 확인하니 버스도착예정시간이 7분 남아 있었다. 한 정거장을 더 걸었다. 예정시간이 3분 남아 있었다. 또 한 정거장을 걸었다. 그런데 예정시간이 도로 7분으로 늘어나 있었다. 의자에 앉았다. 전기가 끊긴 온열 의자는 돌덩이처럼 찼다. 벌떡 일어나 기사식당까지 걸었다. 그 앞에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주차요원이 방한모에 노스페이스 겨울 패딩과 기모바지를 입고 도로에 서 있었다. 나는 그의 완벽한 선택을 복잡한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버스가 길 모퉁이를 돌아 느릿느릿 다가오고 있었다. 


(2024. 5.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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