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서경 : 버들 북 꾀꼬리》2023.9.7 - 12.31
2023년의 겨울의 마침표를 찍기에 좋은 공간을 추천드립니다.
흰색 로툰다가 함께하는, 가족, 연인, 외국인까지 모두 발걸음 하는 겨울과 잘 어울리는 이곳은 리움미술관입니다.
지금 리움미술관에서는 《강서경 : 버들 북 꾀꼬리》 전이 열리고 있습니다.
전시는 내일, 2023년 12월 31일까지입니다.
이번 전시의 제목은 《강서경 : 버들 북 꾀꼬리》입니다.
전시 제목과도 참 잘 어울리는 구절이 반투명한 네모 창 안에 쓰여있었는데요.
꾀꼬리 소리도, 진짜 산이 넘어가는 시골의 자연 풍경 없이도,
시를 짜듯 버드나무 사이를 날아가는 꾀꼬리의 움직임과 소리가 저절로 연상되는 평화로운 풍경이 연상되었습니다.
앉아서 가만히 눈이 오는 바깥 풍경과 전시장 풍경을 번갈아 보면, 이내 옛 산수화의 섬세하고도 장엄한 풍경 속에 들어와 앉아있는 느낌이 듭니다.
이번 전시의 성취는 관객을 풍경의 일부로 초대했다는 겁니다.
로비에 들어서면 관객의 '자리'가 기다리고 있죠.
좌대 위에 올라가 전경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오디오 속에는 이번 전시와 연계된 창작 시가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유희경)
흔들린다 버들 사이,
날아든다 꾀꼬리가
북이 된 듯 넘나들고
펼쳐 놓고 엮어둔다
구십 일의 봄볕 같은
한 폭 크기 시름이다
한여름의 녹빛과는
다르구나 너무 짧아
쏟아질 듯 흔들린다
먼 길처럼 아득하고
가득하다 우리의 봄
a poem by Hee-kyoung Yoo,
translated by Eun-Gwi Chung
It’s shaking, between willows,
it is flying in, an oriole,
gliding like becoming a drum,
spreading and weaving together.
It is sorrow, the size of a span,
like ninety days of spring sunshine,
different from the green hues
of mid-summer, So brief,
it’s shaking, about to gush out.
Far and full like a long journey,
Our spring
조선 15세기 세종대왕이 한글과 함께 창안한 유랑악보인 '정간보(井間譜)'의 기호는 <정> 연작의 근간이 되는데요. 작가는 바둑판처럼 생긴 '우물 정(井)'자 모양의 사각 칸(間)' 안에 음의 길이와 높이를 표기하는 정간을 소리와 움직임을 담아내는 틀이자 시간과 서사의 작동방식을 제시하는 개념적 구조로 바라봅니다. 흔히 평면을 인식되는 회화를 공간적으로 확장하거나 사회라는 틀 안에서 허락되는 개인의 영역을 고찰하는 기제로 활용하기도 합니다.
'간'으로 구성된 한국전통건축의 기본 요소인 격자는 바깥과 안을 연결하는 창틀과도 유사한 형상은 아름다운 자연의 풍경을 건축물 내부로 들여오는 '차경'의 미학과도 연계됩니다.
격자 형태의 변주를 준 <정> 연작은 우리의 시선을 사각 형태 안으로 집중시키는데요. 한편, 시야의 한계를 지시하여 그 경계선 너머의 경치도 바라보게 하며, 공간을 나누고 구획하는 기본적 틀로도 작동합니다.
지하 1층에서는 우리가 평소 전시장에서 작품 가까이 다가가 옆으로 시선을 옮겨야지만 볼 수 있던 회화의 옆면이 층층이 쌓여 탑을 형성한 <모라> 연작을 만나볼 수 있었습니다.
<모라와 검은자리(Moras on the Black Mat)>는 작가가 5년여간 작업한 모라 27점을 '검은자리'에 탑처럼 쌓아 올려 탄생했습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완성된 회화의 전면 대신 옆면에 축적된 여러 층의 흘러내린 물감의 흔적은 작가의 삶을 이루는 보이지 않는 시간의 축적이자 시공간으로 확장하는 회화의 가능성을 확인하게 하는 지점이며, 동시에 매일매일 멈추지 않는 작가의 예술적 실천과 노력이 담긴 결과물입니다.
작가의 삶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던 할머니의 말년의 모습이 담긴 작업 <그랜드마더타워>에는 마지막 순간을 얼마 남기지 않은 그의 할머니의 누군가에게 기대야만 했던 모습이 금속 골조와 실, 가죽 등을 이용한 조각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작가는 구부정할지언정 무너지지 않고 버티게 해주는 힘의 근원에 매료되어, 그 힘의 축을 찾아 가냘픈 뼈대를 쌓아 올렸습니다.
작가는 혼자서만은 살아갈 수 없으며, 궁극에는 관계 맺음으로 귀결되는 인간의 삶을 사유하며 가느다란 골조 위에 색색의 실을 촘촘히 감아, 인간의 연약함 속 강인함을 기리듯 반복적이고도 수행적인 손길로 작품의 구석구석을 매만집니다.
미끄러지기 십상인 금속 골조들이 표면을 감싸고 있는 실의 마찰로 서로 지탱하며 균형을 유지하는 모습은 어려움 속에서도 관계에 기대어 삶을 이어나가는 우리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사회 속 개인에게 허락된 공간과 한계를 탐구하는 강서경은 자신이 강담할 수 있는, 직접 이동과 배치가 가능한 무게와 크기의 작업을 만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크지 않은 인간의 형상을 지닌 이 작품들은 전시장 곳곳에 배치가 되어 있었는데요. 동그란 나무 바퀴발은 어디로든 움직일 것만 같으며, 원통형의 몸통은 꼭 안아보고 싶기도 합니다.
<따뜻한 무게>라는 연작을 차용한 <좁은 초원>의 머리 부분은 구멍이 뚫린 차가운 금속을 털실로 감싼 모양을 하고 있어 냉철한 듯 하지만 허점 투성이인 인간의 이성과 그 빈틈을 메꿔주는 감성이 공존하는 존재임을 암시하는 듯합니다.
<엷은 방랑>은 격자무늬로 이루어진 머리와 가냘픈 목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 개의 바퀴 달린 다리로 어디든 갈 것만 같지만 이내 제자리로 돌아올 것 같은 모습에서 작은 용기와, 엄청난 모험이 되지 못한 엷은 방랑을 하는 자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작가는 사회 속에서 개인의 영역과 주체성에 대해 고민하며, 많은 이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기 위한 부단한 노력과 방랑을 하는 우리의 모습과도 닮아있어 애틋하게 느껴집니다.
철, 금속체인, 실, 비단 등으로 구성된 <산> 연작은 딱딱함과 부드러움, 비움과 채움이 공존하는 강서경 조각의 특징을 드러내는 신작입니다. 작가는 학창 시절 동양화를 공부하면서 진경산수화에 매혹되었습니다. 진경산수화는 상상으로 이상적인 풍경을 그려낸 관념산수화와 달리 두 눈으로 직접 보고, 걸어보기도 한 실제 풍경을 담아낸 전통입니다. 사계절의 기운이 듬뿍 담긴 <산> 연작은 관람자가 사계의 시간과 풍경을 감각하며 유유히 산책하듯 전시장을 거닐 수 있도록 합니다.
알루미늄을 구부리고 표면을 두드려 만든 추상적 형상의 <산> 연작 또한 관람객과 함께 호흡하며 서로 간의 여백을 공명하는 시간을 선사합니다.
이번 전시에는 과거와 현재, 자연과 도시, 바깥과 안처럼 상반되는 개념들이 부딪히지 않고 함께 공명하며, 조화를 이루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관람자는 그 사이를 자유롭게 거닐며 작가가 만들어놓은 거대하고도 섬세한 산수화 풍경 속에 발을 담글 수 있었죠. 멋진 공간에서 한해의 뜻깊은 마무리를 할 수 있다니 참으로 좋을 것 같습니다. 내일은 리움미술관에서 산수화 속을 산책하듯 전시 관람해 보시면 어떨까요?
참고문헌
https://www.leeumhoam.org/qr/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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