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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파란 Jul 27. 2023

복숭아 귀신도 맛없는 건 안 먹는다

맹맛 복숭아의 최후


천도복숭아를 좋아하는 40대 중후반 아빠

쫀득한 질감의 복숭아를 좋아하는 40대 초중반 엄마

속살이 하얀 딱복을 좋아하는 열세 살 아들

말랑한 황도를 좋아하는 열 살 아들


그야말로 '복숭아 귀신'으로 이루어진 4인 가족이다.


여름이면 각 구성원의 취향에 맞는 복숭아를 사다 나르는 것도 큰일인데, 더 큰일은 최근에 산 복숭아 3종이 짜기라도 한 듯 하나같이 니맛도 내 맛도 아닌 맹맛이 아닌가,


제 아무리 복숭아 귀신들이라도 맛없는 복숭아는 거들떠도 안 본다


후숙을 위해 베란다에도 내놨다, 식탁 위로 옮겼다, 그래도 여름인데 시원한 게 제일이지 냉장고에 넣어놨다 나름 당도 상승을 위해 별짓을 다 했건만, 단맛은 커녕 마이너스 당도가 의심되는 복숭아들을 째려보기만 하다 오늘 결국 황설탕 잔뜩 녹인 펄펄 끓는 이벤트탕으로 몰아넣었다.


황설탕 이벤트 탕에서 반신욕 중인 복숭아들


온천욕 후 냉장고 입성 직전


인터넷에서 후기를 뒤적이며 나름 신중하게 산 복숭아인데 그 배신감은 물론이고 적지 않은 복숭아값도 아까워서 잔뜩 독기 오른 눈으로 째려봤던 몇 날 며칠인데, 희한하게 복숭아 조림을 만들면서 스트레스는 날아가고 자존감이 차올랐다.


내가 왠지 살림꾼 같이 느껴지고, 고급진 핸드메이드 디저트를 뚝딱 만들어내는 '프로 엄마'로 등극한 느낌 말이다.


어차피 버릴 거,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힘을 빼면 어렵지 않다.

복숭아 조림, 복숭아 절임, 복숭아 통조림 등 이런 류의 레시피는 차고 넘치지만 그저 난 케케묵은 골칫거리를 해치우고자 했던 그 마음 그대로 대충하면 된다.


당도가 애매하면 어떤가, 애초에 물복숭아였던 것에 비하면 어찌됐든 맛있다.

끓이는 시간을 조절하지 못해 너무 물러버리면 어떤가, 냉장고에서 추위를 견디며 탄력을 되찾을 것이다.


단맛을 새로 얻고 찬기를 머금은 시원한 복숭아는 '여름 맛'이다.

복숭아를 씹는 순간, 머리 속을 가득 메우고 있던 고민 또한 함께 씹어 먹어 버렸다. 


심난할 때 일을 벌이면 소소한 기쁨이 샘솟는다!   



#날마다정신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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