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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엽 Oct 06. 2024

교회에 가면 왜 형제님 자매님 하는걸까?

왜 처음 보는 사람에게 형제님 자매님 하는 걸까?

오늘 제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창세기에 여러 번

반복되는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는 말씀에 관한 것입니다


성경에서 반복이 된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거든요

귀한 양피지에 의미 없는 말을 쓸데없이 반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에 대하여 별 생각이 없으신 분들도 많을 것 같습니다

'그게 뭐 대수인가?'

그냥 보시기에 좋다는 말씀 아닐까?


그런데 제가 목사가 되고 나서

성경이라는 기록물을 공부를 하면 공부할수록

그렇게 단순하게 기록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한번 생각을 해봤습니다

이것저것 찾아보기도 하고

과연 이 '보시기에 좋았다'라는 말씀이

그저 '잘 만들어놨다', '만족스럽다' 

그런 뜻밖에 없을까? 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왜냐하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가

그저 하나님 보시기에 만족스럽게 만들었다 정도의 의미라면


그 말씀은 마치 어린아이가 장난감을 조립을 하다가

'내가 봐도 참 잘 만들었네...'

그 정도 의미로 밖에는 안 들리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단지 하나님의 장난감 수준의 피조물이 아닌데 말이죠


그래서 생각을 좀 더 해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성경 또한 '이 백성은 나를 위해지었나니...'라고 말씀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는 거죠


그런데...

거기까지는 맞는 것 같은데...

이게 자칫 눈 깜빡할 사이에 '하나님을 위한 신학'으로 흘러가는 거예요

물론 맞는 말이죠


그런데 이러한 생각은 자칫하면

인간이란 오직 하나님을 위해 존재한다..라는 데까지

이르게 됩니다


인류 역사상 문명이 있는 곳에는 항상 문화가 있고

종교가 있었습니다

모든 문화는 종교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구약 시대 당시에도 바알 숭배 신앙을 비롯하여

수많은 어떤 이방 종교와 문화가 있었는데

언제나 당시의 통치 지배 이데올로기와 연결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당시의 통치자는 항상

신적인 권위로서 백성들을 다스렸던 거죠

그것이 종교의 역할이었습니다


'신을 위한 것이다', '신을 섬겨라' 하면서

그 섬김은 그 사회의 지배자가 받는 것이죠

각종 토목 사업이라든지

백성들의 노동력을 요구하는 통치 행위를 할 때는

언제나 이렇게 신을 앞세웠던 것입니다


왕이 내리는 명령은 곧 신이 내린 명령이고

모든 노동력은 신을 위해서 하는 것으로 여겨졌던 것입니다


이것이 그 당시에 모든 지배 이데올로기와

종교와의 결합된 상태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구약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은 당시 이방 종교의 신과는 달랐습니다

노예처럼 취급받던 백성들을 구원해 내고 그들에게 안식을 주고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고자 했던 것이 바로 기독교의 신이었고

야훼, 곧 하나님의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런데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이 말씀은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자칫 잘못하면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이 당시 이방 종교의 신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섬김의 대상으로서의 신'으로 여겨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은 그저 신을 섬기기 위한 존재에 불과하며

기독교의 하나님은 당시의 숱한 이방 종교의 신과

별반 차이가 없어져 버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처음에는 이 말씀이 그럴듯했었는데

조금씩 각도가 틀어지게 되면

어느새 세상 이방 종교가 하나도 다를 바가 없는

그런 하나님이 되어 버리고 마는 거죠


'늘 깨어있어야 된다' 이 말이 의미를 가지려면

사실 이런 부분에서 깨어있어야 하는 겁니다


이 말이 뜻하는 바는

늘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뭔가가 다르지 않을까?'

'이방 종교의 가르침과는 뭔가 좀 다르지 않을까?'

이러한 문제 제기를 끊임없이 해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바로 깨어있는 거죠


서론이 엄청 길어졌는데

성경 속에서 '보시기에 좋았다'라는 말씀이

어떻게 쓰였는가 보게 되면


다 아시다시피 이 말은

성경 창세기의 창조 기사에 반복하여 등장합니다

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있었고

이 빛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는 것입니다

바로 창조의 첫째 날입니다


둘째 날에는 뭘 만드는지 혹시 아세요?

둘째 날에는 궁창을 만드십니다

요즘은 궁창이란 말을 잘 안 쓰죠

영어 성경에는 The Expense라고 쓰여 있습니다


좀 더 현대어로 번역한 NLT 같은 경우에는 Space라고 되어있죠

Space는 우주를 뜻하는 공간입니다


성경을 보면 이렇게 되어있어요

둘째 날에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에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라


그런데 자세히 보면

둘째 날에는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말씀이 없습니다

신학교 입학시험 문제에 자주 나왔던 문제라고 합니다


그리고 셋째 날에는 이렇게 나뉘게 된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 가운데

궁창 아래의 물에서 땅을 분리해

천하의 모든 물이 한 곳에 모이게 합니다

이렇게 물이 모인 곳을 '바다'라고 하고

뭍으로  드러난 곳은 '땅'이라고 하신 후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셋째 날에는 땅과 바다를 만드신 거예요


첫째 날에는 빛

두 번째 날에는 궁창을 통해서 물과 물을 나누게 하시고

셋째 날에는 땅과 물을 구분을 하시죠

이렇게 만들어진 땅에는 각종 씨 맺는 채소와 열매 맺는 나무를 만드시죠

그리고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십니다


그리고 넷째 날에는 광명체를 만드세요

낮을 주관하는 광명체와 밤을 주관하는 광명체 그리고 별들

즉 해와 달과 별들...

그리고 또한 보시기에 좋았더라

그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그리고 다섯째 날에는

셋째 날에 만들었던 바다에 물고기들을 만드시죠

그리고 비어있던 하늘에는 각종 날아다니는 짐승, 새들을 만들죠


이렇게 다섯째 날에 바다에 물고기와 하늘에 조류를 만드시고

또다시 '보시기에 좋았더라' 이렇게 말씀을 하시는 거죠


그리고 이제 대망의 여섯째 날이 왔습니다

하늘의 새, 바다의 물고기 이제 뭐가 없죠?

땅에 동물들이 없습니다


그래서 여섯째 날에 땅에 동물들을, 가축들을 만들죠

어떻게 만드시냐면 '그 종류대로' 만드셨다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말씀하시는 거죠


그 여섯째 날에 인간 또한 만드십니다

창세기 1장 27절과 28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들을 다스리라 하십니다


하나님의 창조기사의 백미인 인간의 창조입니다

그리하여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이 좋았더라'

라는 말씀으로 끝을 맺습니다


지금 이 창세기 1장에는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말씀이 여러 번 반복됩니다


이러한 반복은 과연 무엇을 말하기 위한 메시지였을까요?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이

'전능하신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 좋구나'

'내가 참 잘 만들었다'

'오로지 하나님을 세상이다'

이런 느낌에서 말씀하신 '보시기에 좋았더라' 였을까요?


제가 이 부분을 살펴보는 이유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창세기는 성경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창세기를

성경의 서문 정도로만 알고 있더라고요


창세기는 성경의 첫 장이고

성경의 결론은 마지막 장인 요한계시록에 담겨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당연한 말 아니냐고요?

아닙니다 당연하지 않습니다


창세기서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한 권의 책으로 모아져서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성경을 이룬 것은 역사적으로

얼마 되지 않은 일입니다


구약 시대만 하더라도 창세기는

창세기 한 권으로서의 성경이었습니다


모든 성경들이 그렇죠

각 권으로서의 성경입니다

출애굽기도 한 권의 성경이고

신명기도 한 권의 성경입니다


신약에 가면 더하죠

흔히들 로마서 한 권이 가장 완벽한 성경이라고 말하죠

성경 66권을 한 권으로 팍 줄이게 되면

로마서 한 권으로 압축될 수 있습니다


성경 각 권에는 성경의 DNA들이 다 숨어져 있어요

창세기도 창세기 한 권에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 즉

소위 말하는 '복음'이 숨겨져 있습니다


기독교를 복음의 종교라고 했을 때

그 복음은 성경 각 권마다 숨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창세기에도 복음이 있고

출애굽기에도 복음이 있고

심지어 레위기에도 복음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완성된 한 권의 성경으로서

창세기가 전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오로지 창세기만 봤을 때

이 책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전하시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입니다


기독교인이라면 성경을 읽을 때 항상

이런 태도와 마인드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니 좋은 말씀이겠지.. 이게 아니라

전체적으로 이 말씀을 통해서

나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가?

이런 질문을 가진 채 성경을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안 그러면 아멘 아멘 하고 넘어가거든요

그냥 아멘 할렐루야.. 하고 끝내버립니다


그래선 안됩니다


왜 이런 말씀을 드리냐면

우리는 지금 창세기라는 책을 너무나 손쉽게

편안하게 읽고 있지만


이 창세기가 기록되었을 당시를 한번 생각해 보면

창세기라는 책의 기록은 예삿일이 아닌 거예요

당시로 말하자면 유대 민족의 국가 프로젝트입니다

왜냐하면 창세기가 기록된 3500년 전에는

종이도 볼펜도 없었던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기록으로 뭔가를 남긴다는 것은 하나의 거대한 프로젝트입니다


그래서 신학교에서 성경 강의를 들을 때

가장 먼저 기본적으로 중요하게 다루는 게 뭐냐면

성경 각권이 기록된 시기와 저자를 밝히는 문제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 기록물이 어느 시기에 쓰였고,

어떤 역사적 배경에서 누가 썼는가

이런 것을 밝히는 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기록물의 내용은

그 시대적인 맥락과 저자가 처한 상황을 떠나서는

온전하게 파악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누가 어떤 배경에서 어떤 의도를 가지고

그 프로젝트를 시행했는가가

내용을 좌우합니다


그런데 그런 관점에서 창세기를 봤을 때

즉 창세기가 유대 민족의 국가적인 차원에서의 기록물이라면

그 기록물의 내용이 너무나 이해가 안 가는 거예요


창세기 1장부터 11장까지는

우주의 창조에 관한 거대한 이야기니까

기록으로 남길 만한 값어치가 있다고 해도

그 이후에 창세기 12장부터 50장 끝까지는

아브라함 한 일가의 일대기를 기록해 놓은 책이 창세기 내용입니다

12장에서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것으로 시작해서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과

이삭의 아들 야곱 그리고

야곱의 열 두 아들 가운데 열한 번째 아들인 요셉의 이야기가 전부입니다


그러니까 창세기라는 거대한 민족 프로젝트,

그렇게 힘들게 엄청난 예산을 들여서 기록한 이야기가

아브라함이라는 한 족장 일가의 이야기인데

그 이야기의 결론이

요셉이라는 한 인물의 일대기라는 것입니다


보통 책의 결론은 마지막 부분에 등장합니다

결론을 보면 결국 이걸 기록하기 위해서 이게 쓰였구나

이렇게 판단하는 거죠


그래서 어떤 결론인가를 봤는데

어라? 요셉이 형들에 의해 노예로 팔려가서

온갖 고생 끝에 성공한 이야기입니다

물론 감동스럽습니다


팔려가서 신앙을 버리지 않고 하나님을 높이고 순종한 결과

거대한 제국의 총리까지 되어서 자기 일가족을 모두 구한 이야기


아 그렇구나 결국 창세기의 주제는

요셉의 신앙을 본받으라는 이야기였어.. 할렐루야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과연 요셉의 신앙을 본받아라 하기 위해서

창세기라는 기록을 국가적 프로젝트로 남겼을까요?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요셉 정도의 성공 스토리..

요셉 정도의 그런 기승전결을 갖춘 감동스러운 이야기는

역사를 통해서 수억 번 반복되어 온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야기는 어디에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있고

미국에도 있고

각 나라마다 존재합니다


요셉보다 더한 역경을 딛고 일어나서

순교를 각오하고 반전을 이루어낸 스토리는 너무나도 많습니다


요셉 이전에는 없었을까요?

요셉 이전에도 무지하게 많았습니다


요컨대 단순히 한 인물의 성공스토리와 그의 신앙을 본받아라..

그런 결론을 맺기 위해서 창세기가 쓰이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상식적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창세기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던져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질문 앞에서 우리는 항상

성경은 어떤 책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성경이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구원에 관한 이라고 했을 때

창세기 또한 한 권의 완성된 성경으로서 

구원에 대한 약속이 담겨있는 책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결론 부분을 보니까 요셉이 등장합니다

그것도 요셉이 행한 일을 아주 자세하게 기록해 놓은 책이

창세기의 핵심적인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요셉이 형들한테 미움을 받아서

애굽(이집트)으로 팔려가서

종살이하고 감옥살이하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결국에는 총리로 출세하는 이야기가

아주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 것이

창세기의 결론 부분의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를 통해서 창세기는 우리에게

구원에 관한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자 하고 있는가?

생각해 본다면


어차피 신학은 해석의 문제니까

저의 해석으로는...


우리는 보통 요셉 하면 굉장히 본받아야 될 신앙의 표본,

어떤 훌륭한 인격체로 추앙합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아브라함, 모세, 요셉, 다윗 이런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정작 성경은 이 사람들을 그리 완벽한 인간처럼 그리고 있지 않습니다


아브라함도 마찬가지고

모세도 마찬가지고

그냥 평범한 범부로 그리고 있는 것이 성경입니다


요셉 또한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보통 기독교 집안에서 아들을 낳으면 요셉이라는 이름을

많이 선호한다고 하는데 그만큼 닮고 싶은 인물이라는 뜻일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이란 인간이 그만큼 닮고 싶은 인간인가? 했을 때

그렇지 않다는 게 성경의 기록입니다


요셉은 10명의 형들한테 미움을 받아서

애국으로 팔려갑니다


그게 형들이 못 돼서 그런 게 아니거든요

오죽했으면 10명의 형들이 단 한 명의 반대도 없이

동생에게 그렇게 했겠습니까?


'저 놈 저거 또 우리 감시하러 온다'

'저거 저 놈 아버지 사랑 혼자 독차지하더니만

'우리가 양치고 있는데 노는지 안 노는지 감시하려고

또 아버지한테 고자질하려고 오는구나'


보기만 해도 이가 갈리는 인간이었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그래서 팔려간 겁니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팔려 나갔습니다

그러나 애굽으로 팔려간 요셉은

우여곡절 끝에 애굽의 시위대장 집의 가정총무로까지

인정받고 나름의 출세를 하게 됩니다


성경에서 보이는 요셉의 캐릭터는 굉장히 눈치는 없지만

자기 주관은 뚜렷한 그런 캐릭터인 것 같습니다

형들이 자기를 시기하건 말건 자기가 생각한 바를

거침없이 이야기하고

거침없이 행동하는 그런 성격인 것 같습니다


그런 우직한 성격이 애굽에서 노예생활 할 때는

오히려 장점으로 작용하여

애굽 시위대장 집에서 아주 충실하게 업무를 수행한 결과

주인 보디발의 눈에 들어 집안의 모든 노예들을 감독하는

가정 총무가 된 것입니다

한마디로 요셉은 굉장히 성실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사실 성경에서 요셉을 굉장히 중요하게

다루는 이유 중에 하나가 뭐냐면

요셉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 때문입니다


요셉이 자기 아버지 야곱으로부터 가장 사랑을 많이 받았다는 것은

야곱과 가장 많이 친밀하게 지냈다는 뜻일 것입니다


형들이 그냥 양이나 치고 돌아다녔을 때

아버지 야곱은 요셉이 17살이 될 때까지 옆에 두고 뭘 했겠습니까?

17살이면 지적으로 완전히 자란 상태거든요

늘 야곱 자신의 신앙 이야기를 했겠죠

야곱이 경험한 하나님에 대해서 요셉에게 전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야곱의 신앙이 가장 순수하게 잘 전달되고

또한 잘 흡수한 사람이 요셉이라는 것입니다


비록 눈치 없고 융통성 없는 신앙일지는 몰라도

요셉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정말

순수한 신앙 그 자체였습니다


요셉은 자기에게 닥친 모든 일이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을 받아들입니다


자기가 노예 생활을 하게 된 것도

보디발의 집에서 가정총무를 하게 된 것도

이 모든 사건 속에서

오직 하나님과 자기와의 관계를 확인하게 된 것이죠

신실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으로부터

자기를 지킬 수 있었던 이유 또한

자기 안에 간직하고 있던 하나님에 대한 신앙

그 신앙의 힘으로 자기를 지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요셉은 자기가 선택한 행동에 대한 결과를 충분히 감내합니다

비록 보디발의 집에서 가정 총무로서 위세 당당한 신분에서

하루아침에 죄인, 죄수의 신분으로 바뀌었지만

좌절하거나 비탄에 빠지지 않고 자기의 신앙대로 살아갑니다

그것이 바로 요셉이 가진 신앙의 힘입니다

그것이 또한 우리의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구약 시대의 신들은 인간을 도구로, 노예로 밖에는 생각 안 했습니다

애굽의 신들이 대표적이죠


피라미드는 신의 무덤 아닙니까?

왕을 신으로 섬기고 왕의 무덤을 만들기 위해서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노예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을 신을 위한 도구로써 여겼던 것이

너무나도 당연했던 그 시기에


요셉의 하나님은

야곱의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그런 신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을 노예로 부리는 신이 아니라

인간을 사랑하는 신이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을 사랑하는 신..


그것이 바로 히브리인의 신, 헤브라이즘의 신인 것입니다

서양 문명을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으로 나눈다면

간단히 말해서

헬레니즘은 이원론 사상이고

헤브라이즘은 일원론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천국과 지옥, 하나님과 우리, 남자와 여자, 선과 악

이렇게 구분되는 거 아니야?

하며 이원론 사상으로 오해합니다


아닙니다

오늘날 현대 기독교에서 가장 크게

오해되고 있는 부분이 바로 그 부분입니다

기독교 사상은 헤브라이즘입니다

나뉨이 아닌 '하나'를 강조합니다


헤브라이즘에서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자기의 모양과 형상대로 만들고

인간을 위해서 세상을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모든 걸 다 창조하고 난 이후에 맨 마지막에

모든 걸 세팅한 이후에

이 모든 것을 즐길...

이 모든 것을 누릴...


그러한 존재를 창조하신 분이 바로

여호와, 야훼, 기독교의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하나님께서

첫째 날부터 말씀하신 '보시기에 좋았더라'

라는 그 말씀이 과연 어떤 의미였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 내가 보니까 잘 만들어놨네'

하나님을 위한 보시기에 좋았더라였을까요?


아니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이 보기에 좋도록 만들어 놓은 세상이었다는 뜻일까요?


저는 후자라는 생각이 듭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 이 말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가 아니라


우리 인간이 보기에 좋은 그런 모습으로

인간이 가장 살기 좋은


인간이 가장 행복하게 누릴 수 있는

그런 환경을 만들어 놓으시고


내가 너네들 보기에 참 좋게 만들어 놨다


그런 의미에서 '보시기에 좋았더라'

라는 말씀이 아닐까라고 생각을 해봤다는 거죠


요셉의 구원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요셉의 구원이 어떻게 막을 내리냐면


그 당시에 온갖 기근과 흉년으로 인해서

인간이 살기에 엉망이 된 세상 속에서


파라오의 꿈을 해석하는 요셉은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에 의한 것임을 깨닫습니다


7년 동안 먼저 풍년이 들게 한 이후에

7년 동안 흉년이 오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에 의한 것을 안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자신의 꿈 해석을 요구하는 파라오에게

7년간 대풍년이 들었을 때

이를 잘 거두어 나머지 흉년 기간 동안에

견디어 낼 수 있는 실무적인 아이디어를 보고합니다


이러한 요셉의 아이디어를 듣고

애굽의 파라오가 요셉에게 총리직을 준 것이지

단지 꿈 하나 해석했다고

애굽의 왕이 총리직을 맡기진 않았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바꿔 말하면 성경에서 말하는 요셉은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실제적으로, 행정적으로, 제도적으로 꾸려나간

대표적인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결국은 창세기라는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어느 날 노예가 갑자기 총리가 되고

하늘에서 뭐가 막 떨어지는

그런 기적 같은 이야기나

뜬 구름 잡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인간이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이 땅을

어떻게 잘 효율적으로 보존하고 유지하고 관리하며

살아가는가에 관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라는 성경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만들어 놓으신 이 세상 만물을

잘 유지, 보수, 관리하라는 명령이라는 말씀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땅 가운데 행복을 누리며

잘 살게 하기 위해서 이 세상 만물을 만들었으니

그 가운데서 정말 행복하게 잘 살아라

하는 메시지를 주신 것입니다


인간이 행복하게 잘 사는 것은

그저 교회 나가서 기도만 하고

하나님 사랑해요.. 이런다고 잘 살아지지 않습니다


인간이 행복하게 잘 살기 위해서는

먹거리, 입을거리, 의식주가 충족하게 해결되어야 됩니다


그것을 해결해 주신 게 창세기의 창조 기사입니다

인간이 거주할 땅을 만드시고

먹을거리를 주시기 위해서 그 땅에서

씨 맺는 채소와 열매 맺는 나무들을 만드셨다고

성경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요셉은 사람들을 그냥 구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었습니다

가나안 땅에 기근 들어서 굶고 있는 형들,

자기를 노예로 팔아먹은 그 형들을

애굽 땅으로 모셔와서 살 집을 마련해 주고

옷을 입히고 양식을 주고 정착을 하게 하고


야곱의 70명의 가족이 200만 명이 될 때까지

그 터전을 마련한 사람이 바로 요셉이라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요셉이 한 일입니다

즉 창세기에서 요셉은 구원 사역을 한 겁니다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자기의 일생 동안에

이 땅 가운데서 실현시킨 사람이

바로 요셉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창세기라는 성경책을 통해서

우리의 구원이 어떠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너무나 오해가 심한 것이

우리의 구원관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단지 예수님을 잘 믿다가 죽어서

우리의 영혼이 육신을 빠져나와서

천국에 올라가서 예수님과 함께 행동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


이것이 구원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구원의 한 부분이고 일면입니다

물론 구원에는 그런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의 구원의 참모습이 아닙니다

그러한 설명은 당시 구약 백성들에게

그렇게밖에 구원을 설명할 수밖에 없었던

그 상황 속에서 나온 하나의 설명일 뿐이고


신약이 오게 되면 예수님께서

구원을 다시 설명해 주십니다


죽어서 가는 천국..

단지 그렇게 피상적으로 이해하고 있던 유대인들에게

그게 아니라 천국은 가까이 온다

가는 천국이 아니라 우리에게 오는 천국

죽은 다음에 가는 천국이 아니라

지금 당장 누리는 천국을 가르치신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원래부터 구약에 있었던 가르침인데

이 가르침이 하도 많이 오해되고 있으니

그것을 다시금 깨닫게 해 주신 것에 불과합니다


구약의 안식일법을

백성들이 그 안식일법의 참된 뜻을 모르고 있으니까

일부러 안식일을 어겨가면서까지

참된 의미를 가르쳐 주신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창세기를 비롯한 모든 성경책은

우리의 구원에 관해서 말씀합니다


우리가 이 땅 가운데 구원을 누리지 못하면

죽어서도 구원을 못 누립니다


그것이 성경의 메시지입니다


이 땅에서 되는대로  막살다가

죽기 직전에 회개하고 죽으면

천국에 짠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땅 가운데

하나님과의 관계를 잘 쌓아서

하나님의 뜻을 다 헤아려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가운데

그 말할 수 없는 그 기쁨과 행복함과 그 평안함

복음을 누리는 사람이

죽어서도 고스란히 연결되어서

천국의 삶을 누리는 것이지


이 땅에서는 별짓을 다 하다가

죽기 직전에 하나님 믿습니다 하기만 하면

천국으로 순간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는 게

바로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성경에는 온통 이러한 메시지들로 넘쳐납니다

이 말씀들이 창세기 1장뿐만이 아니라 2장에도 있고

3장에도 있습니다


창세기도 있고 출애굽기에도 있습니다

온통 성경은 그 얘기만을 하고 있습니다


결국에는 이 모든 성경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어디까지 가야 하냐면

나와 남의 구분이 사라지는 데까지 가야 되는 겁니다


나와 남의 구분이 사라지는 것

그것을 신약에서 예수님께서는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라는 가르침으로

가르치십니다


남을 나처럼 여기는 그 마음

이웃을 나처럼 여기는 그 마음


내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처럼 창조되었듯이

저 이웃 또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창조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마치 한 부모에게서 나온 형제자매가

서로 다른 개체이고

다른 사람처럼 보일지는 모르지만


한 부모로부터 나온

같은 DNA를 지니고 있는

그 개체가 바로 형제이고 자매지 않습니까?


아무리 못된 짓을 하더라도

형제자매는 쉽게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우리의 이웃을

형제요 자매처럼 여기라 여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형제님 자매님 부르는 거예요


형제님 자매님이 무슨 호칭이 아니라

그냥 형 누나인 겁니다


모든 사람이 형 누나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단 한 가지 신경을 써야 할 것이 있다면

우리의 구원에 관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구원은

멀리 있는 것도 아니고

어려운 것도 아니고


우리가 하나님 안에 하나님이 내 안에...

예수님이 내 안에 우리가 예수님 안에...

그렇게 정말 하나가 된 그런 삶을

이 땅 가운데서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 회복이 가장 먼저 우리의 마음속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그것이 나를 통해서 우리 가정에게 전달되고

그렇게 회복된 가정들이 모여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게 교회인 겁니다

그 교회가 모인 것이

그게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게 하나님 나라예요


하나님 나라를 다른 말로 뭐라고 합니다?

천국 그게 천국입니다


천국 가는 게 구원이라면

그런 의미에서 천국이 구원이라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는 말씀은

결국 하나님을 신처럼 모시라는 소리가 아니라


우리를 정말 자녀처럼 사랑하신

하나님의 마음이 담긴 그런 말씀이었다는 것이

오늘 제가 함께 나누고자 하는 메시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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