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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란 Oct 11. 2023

1.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요?

첫 번째 샘플 편지

안녕하세요. ‘책방, 하리’의 책방지기 정란입니다. 아직 오픈을 한 것은 아니지만, 곧 그렇게 될 일이니 미리 책방지기가 되어 볼게요(웃음). 이미 오래전부터 그런 마음으로 지내왔거든요. 책방지기의 마음은 어떤 걸까요? 예전에는 내 눈에 들어오는 책들만 찾아 읽었는데, 이제는 다른 사람의 눈으로도 책을 고릅니다. 일곱 살 어린이의 마음으로 그림책을 들여다보고, 일흔 살 할머니의 눈으로 치매 예방에 좋은 컬러링북을 찾아봅니다. 서른의 눈으로 쉰을 상상하며 책의 세계를 탐방하기도 합니다. ‘책방, 하리’가 타깃으로 삼는 나이대가 어떻게 되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습니다. 제가 30대니까, 저와 비슷한 나이대의 분들이 방문한다면 더 즐거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여덟 살의 손님에게도, 여든 살의 손님에게도 친절한 공간이면 좋겠습니다. 거쳐온 유년 시절과 거쳐갈 중년, 노년의 세계를 놓치고 싶지 않거든요. 부단히, 부지런히 노력해야겠지요. 이런 때의 제게 희망이 되어주는 사실이 있습니다. 좋은 책은 나이를 가리지 않고 독자의 마음을 울린다는 것입니다. 그런 책들을 찾느라 눈이 뻑뻑하고 마음은 바쁘고, 몸은 피로한 날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편지에 책방지기의 그런 욕심이 묻어있다면, 너그러운 마음으로 모른 체해 주세요(웃음).


이번에 보내드리는 첫 편지는 조금 특별합니다. 제가 먼저 건네는 글이지만, 꼭 답장을 쓰는 것 같거든요. 네이버폼에 작성해 주신 소개글과 기대하는 바를 읽으며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저의 일상과 시선을 궁금해하는 분들도 계셨고, 위로와 응원을 바라는 분들도 계셨습니다. ‘내가 그걸 할 수 있을까’, ‘모두의 바람을 충족하는 편지를 쓸 수 있을까’ 대부분의 생각은 걱정을 동반했죠. 단 세 통의 편지라고 생각하니 마음은 더 조급해졌습니다. 편지 신청 접수를 받는 4일 내내 문득문득 턱을 괴고 고민하다가, 이런 답을 찾았습니다. 편지를 쓸 때면 언제나 그랬듯, 받는 이를 향한 진심을 놓치지 말자고요. 무엇을 해야 한다는 욕심을 내려두고, 할 수 있는 만큼은 반드시 해내자고요. 우리의 만남이 세 통의 편지에서 그치지 않을 거라고 믿기로 했습니다. 제 마음이 전해진다면 곧 그렇게 될 거니까요.


처음이니 공평하게 질문을 하나씩 나눠 가지는 건 어떨까요? 누군가에게는 쉬웠겠으나, 어떤 이에게는 도무지 답을 찾을 수 없어 어려웠을 질문.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요?’


저는 정란입니다. 다시 태어날 기회가 있다고 해도, 조지영이나 박하나로 태어날 마음은 없습니다. 언젠가 인터넷에서 ‘이름에 난초 란이 들어가면 외롭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저는 그 즉시 이름 제공자인 정성훈(가명, 아버지) 씨에게 전화를 걸었죠. “왜 내 이름을 란으로 지었어? 이름에 난초 란 쓰면 외롭다는데!” 한 번도 미워한 적 없었던, 오히려 사랑해 마지않던 이름인데 말입니다.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인터넷의 그 글은 애초에 얼토당토않은 것이었습니다. ‘음식에 설탕이 들어가면 달다’, ‘넘어지면 피가 나고 흉터가 생길 수 있다’ 그런 문장과 별다를 게 없으니까요. 우주가 생겨나고 외롭지 않은 인간이 어디 있었던가요. 수화기 너머로 정성훈 씨가 “그럼 이름 바꿔라, 왜!” 했을 때 삐죽 입은 내밀었지만, 이름을 바꾸고 싶은 마음 따위는 없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에게 반항하고 싶었던 걸까요, 나를 외롭게 만든 그 글에 반항하고 싶었던 걸까요, 외로움에 저항하고 싶었던 걸까요.


처음 ‘정란 씨’라고 불렸던 순간의 느낌을 잊을 수 없습니다. 대학교 1학년 때였고, 강의 시간이었습니다. 고등학생 때까지는 저를 그렇게 부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름 혹은 어떤 별명들로 불렸었지요. ‘정란 학생’까지는 별 느낌이 없었는데 ‘정란 씨’라니, 목뒤의 솜털들이 일제히 일어났습니다. 하나하나의 솜털들이 웅성거렸죠. ‘야, 들었어? 정란 씨래!’, ‘으악, 너무 징그러워!’, ‘낯설고 어색하고 이상하고 느끼해!’, ‘아, 제발 못 들은 걸로 할 테니 정란 씨라는 말은 얼른 좀 치워 주세요!’ 지금 생각하면 그건, 제 이름의 성인식이었습니다. 누군가 제 이름에 어른의 무게를 달아준 순간. 그 이름을 가진 저를 동등한 인격체로 호명하던 순간이었죠. 어른이 되는 순간은 왜 늘 그렇게 갑작스럽고 당황스러운 걸까요. 어른이 되었던 하나하나의 순간들을 선명히 기억할 수 있다면, 스스로를 더 아끼는 어른이 되었을 텐데 말이에요.


저는 정란입니다. 윤영이나 김은수는 아니죠. 때로는 내가 너무 자랑스러운, 때로는 내게 지나치게 실망하는 사람입니다. 어떤 날은 나를 하나 더 만들어 나를 꼭 끌어안아 주고 싶고, 어떤 날은 반쪽이 되어 아주 작아지고만 싶습니다. 하지만 내가 나라는 것은, 수많은 책이 생겨나고 읽히는 것만큼이나 희망적입니다. 누군가의 마음에 꼭 드는 한 권의 책이, 분명히 존재하는 것만큼이나 아름답습니다. 세상엔 책을 팔고 글을 쓰고 가르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정란이 팔 수 있는 책, 정란이 쓸 수 있는 글, 정란이 가르칠 수 있는 것은 정란만이 해낼 수 있다니. 그 사실이 퍽 아름답고 눈물겹습니다.


오늘은 주문했던 테이블과 의자가 도착합니다. 수요일이면 책장이 도착할 테고, 저는 틈틈이 입고 도서 목록을 정리할 것입니다. ‘세상엔 내가 모르는 좋은 책이 아주 많을 텐데’ ‘지금도 만들어지고 있을 텐데’ 생각하면 마음이 분주합니다. 그러나 침착하게, 내가 알고 있는 좋은 책부터, 나의 세계를 가꾸어 준 이야기부터 하나씩 쌓아 올리겠습니다. 도로에 나가기 전, ‘초보 인생’ 스티커를 붙일까 문 앞에서 고민합니다. 그러다 활짝 웃으며 ‘유일한 인생’을 고릅니다. 책방의 문이 열리는 날, 정란의 세계에 방문해 주세요. 한 분 한 분의 유일한 세계가 방문할 때마다, 다정한 마음으로 맞이하겠습니다.


-어제 아주 재미있는 일이 있었던 책방지기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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