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와 진리를 통한 아름다운 관계
사람들과의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것도 습득하여 훈련되어지는것.
내향인, 외향인 나는 지금껏 이렇게 구분지어 살아왔다. 내향인으로 태어나 외향인인 모습으로 살아야만
그나마 삶을 영위할 수 있기에 잠시 잠깐 그런 삶을 살고 또다시 동굴로 들어가 힘을 충전해오는 나름의
삶의 루틴을 만들어 살아가고 있었다.
그래서 늘 가슴 한쪽에 묵직한 통증이 있었다. 늘 관계를 진심으로만 하고 싶었고, 진심이 아니면
어떠한 말도 행동도 하고 싶지 않은 다소 이기적이고 어린 생각을 가지고 살았었다.
관심있는 분야가 아니라면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고 관심도 가지지 않는 교만한 인간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요즘들어 내 자신에 대해 자주 생각하게 된다. 시간을 쪼개어도 계속해서 해야만 하는 일들이 넘쳐나고
어떤 사람들은 참 열정적으로 모든일들을 해내는데 그에 비해 내 자신은 어떠한 일에도 의욕이 없고
그렇다고 일을 못하는것도 아니지만 마음에서 차오르는 힘이 없음을 느꼈다.
문제가 있었다. 나는 어떠한 생각을 하고 살아가는가?
몇가지 나의 문제점들을 직시하기 시작했다.
1. 관심이 없는 분야에서는 대화를 지속하지 못한다. 그런데 그 분야가 너무 많다.
2. 내가 맡고 있는 업무에 대해서는 수동적이어도 최선을 다하여 좋은 결과가 있지만
큰 업무를 바라보지 못한다.
3. 책임감 없고 지시로로 말하는 사람들을 불편해한다. 배려가 없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이다.
4. 쉼 없이 자기 자신의 이야기만 늘어놓는 사람이 불편하다.
나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건강하게 지속하기 위한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고 기피했다. 나야말로 "경청"의 자세가 필요한 사람이었다. 나는 경청을 잘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러나 정말로 경청을 잘 하는 사람은 단순히 사람의 이야기만 듣는것이 아니라 대화의 흐름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현재 주어진 그 사람과의 관계에 성실히 임하는 것이다. 무의미한 만남도 있겠지만 그 시간을 나에게 의미있는 시간으로 만드는건 대화의 주제나 환경이 아니라 나의 태도에 있다는것을 알게 되었다.
은혜와 진리가 함께 공존하는 대화가 필요하다. 상대방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태도가 필요하고 관계 안에서 비 진리적인 요소가 있다면, 혹은 내가 허용할 수 있는 일정한 기준을 넘어섰다면 은혜(배려,존중)을 기반으로 한 진리(직면)의 대화도 필요하다.
두번째 문제에 있어서는 나는 내 자신의 에너지를 비축한다는 명목하에 다른 부분에는 상당히 방어적이고
배타적인 태도를 보이며 살아왔다. 내가 맡은일. 내가 꼭 해야만 하는것들. 요즘들어 드는 생각은 꼭 주어진 업무가 아니라 나는 어떠한 사람인가. 하나님은 나를 어떠한 사람으로 성장시키기를 원하시는가에 대한 고찰이다.
정말 그 환경에서 내게 주어진 부분만 좁은 시야로 바라보는 모습을 원하실까 아니면 전체의 흐름을 적극적으로 파악하고 성실한 사람으로서 영향을 끼치기를 원하시는가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열렸다.
나는 나를 보호해야 한다는 "연민"때문에 어쩌면 정말 어떤 틀안에 나를 가두고 스스로 한계를 매기어 놓았는지도 모르겠다. 믿는자는 능치못할일이 없는데도 말이다.
세번째 퀘스천에 대한 통찰은 이러하다. 내가 그 배려를 원했기 때문이다. 나도 그들에게 그러한 배려를 원했고 말하지 않아도 배려해 주기를 원하는 이기적인 태도였다. 그러한 사람들을 볼떄 무의식적으로 ..
"나라면..그러지 않았을거야.."라는 생각을 했었던것 같다.
표현하지 않고 상대에 대한 선입견들을 쌓아가며 마음속으로 관계의 단절을 만들어갔었다.
상대할 필요 없는 사람. 무례한 사람. 등등 나만의 공식을 쌓아갔다.
하나님의 지혜는 나의 오만함을 부수어 뜨리기 시작했다. 내가 바라보지 못하는 나의 교만과 나역시 동일한 부분과 또 다른 부분의 가해자였음을 직시해 주셨다.
솔직한 사람이라는 태도로 마음속 깊이 사람들을 무시했던 모습. 비판적인 태도. 비슷한 모양새를 가진 사람들을 보면서 거울처럼 나 자신을 보게된다. 나에게는 은혜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면서도 다른이들에게는
아픈 진리로만 대했던 모습이 참 모순적이다.
이기적이고 사랑없고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릴수 없고 때로는 참 비참하다고 느껴질 만큼 수치스러운
죄인의 모습을 볼때면 하나님께 은혜의 옷을 구한다. 그리고 그 은혜의 옷을 입고 다시 일어나곤 한다.
000의 모습이 아니라 예수님의 피의 도장이 찍혀진 자격을 보고 하나님께서 괜찮다 나의 딸아..
라고 말씀해 주신다.
은혜의 옷을 입고 예수그리스도의 피의 도장을 받고 사는 내가 자꾸만 다른 사람들의 무례함을 본다.
마치 나는 본래에 의인이었던 것처럼. 그들에게도 주님의 은혜의 옷이 필요하다고 기도하게 된다.
죄를 직시하고 은혜의 옷을 입기를. 그리고 나는 그 하나님의 마음을 받아 은혜를 통해 새롭게 탄생한
존중의 대화를 시작해 무례하지 않게 직시하게 도와줄수 있는 불편한 진실을 말해주어야 한다.
비판과 정죄가 아닌 좋은 관계 개선을 위해 은혜와 진리가 동반된 대화이다.
마지막 유난히 에너지가 빨리고 힘든 사람은 가르치는 투의 말투로 쉼없이 자기 자신의 이야기만
늘어놓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 앞에서는 마치 나도 알고 있다라는 투로 이야기 하는것이
경솔하고 무례한 이야기 일까봐 하지 못했었다. 그리고 혹시나 정말 내가 모르는 어떤 부분을
말해줄수 있는 귀한 시간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 듣기만 4시간을 한적도 있다.
단순한 교제의 만남이었는데 좋은 이야기들이었지만 아무것도 마음에도 귀에도 남지 않고
지쳐서 집에 돌아간적이 많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연락은 받지 않는다.
나는 사실은 바로 "당신에게는 듣는 자세도 필요해요" 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더 역효과가 날것이란걸 알고 있기에 참는쪽을 선택했다.
"대화의 기술"이라는 책에는 대화 가운데 직면을 할때에는 상대에게 개선해야 할 점이 있다고
말하는것 보다는 나에게 필요한 것이 이러이러한 것이다라고 말해주어야 좋은 대화가 될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 당신은 좋은 이야기들을 많이 알고 있고 지혜로운 사람인것 같아요. 그런데 나는
당신과 편안하게 소통하는 대화를 하고 싶은데 지금 대화는 내가 강의를 듣고 있는 느낌이 들어서 불편하게 되네요. 너무나 맞는 말을 하고 계시고 귀한 나눔이지만 많은 이야기 속에는 이미 제가 알고 있는 부분도
많아서 제가 모를것이라고 생각하시고 하시는 말투는 이 자리를 어렵게 만드는것 같아요. "
은혜를 기반으로 상대를 존중해주고 직시할수 있는 이야기를 전달하되 상대가 아닌 "나"에게로
가져오고 어떠한 부분이 어떻게 되게 하는지.. 명확히 표현하고 정리해야 한다.
성향적으로 관계가 어려운것도 있지만 사실은 충분히 노력하고 공부하면 절대 사랑할 수 없을것
같은 관계가 주님의 은혜로 조금 더 부드러워지고 길이 열리어진다.
정말로 다짐과 생각만으로만 사랑해야지 했던것들이 실제로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은
소망이 보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