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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바다 Jan 20. 2024

경주(慶州)  구석구석 (3)

경주 분황사와 경주 황룡사지, 신라 천년 고도(新羅 千年 古都)

경주 관광안내도

   불국사 탐방 후 주차장과 야외 각종 먹거리와 기념품 판매대를 지나 5분 정도 걸어서 내려왔다. 대로에서 그 길 건너편 버스정류장에서 11번을 타고 8번째 정류장(분황사/경고사거리)에서 내렸다. 분황사 표시석이 있는 주차장에서 바라보면 좌측에 분황사, 우측에 황룡사지터가 보인다.


<주요 관람 코스> (아래 글 탐방 내용 : 굵은 선)

석굴암> 불국사> 분황사> 황룡사지> 월성(석빙고)>동궁과 안압지(월지)>경주 국립 박물관> 월성> 계림> 첨성대  

분황사 법당복원 계획도 / 분황사 표시석

   특히 이곳에는 외세(당나라, 몽고, 왜란, 일제)가 할퀸 아픈 역사가 숨겨져 있다. 몽골 침입과 임진왜란으로 분황사와 황룡사의 사찰 건물이 불타고 파괴되었다. 그중에서 황룡사는 신라의 대사찰이었으나, 지금은 광활한 대지위에 받침돌만 몇 개 남아 그 위치와 흔적만 추측할 뿐이다. 그 이름도 그냥 황룡사지터다. 건축물이 없기 때문이다. 벌판 한가운데에 있었던 80m 높이 구층탑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겨울 북풍 찬바람만 휑하니 불고 있었다.


   일본서점 타츠야에서 우연히 고교생용 일본사 교재를 보게 되었는데, 신라해적이란 단어가 보였다. 신라해적들이 일본에 건너와 약탈을 자행했다는 내용이었다. 우리가 질색을 하는 왜구들처럼. 아이러니하게도, 그 단어가 만주를 호령 지배하던 광개토대왕의 위엄처럼 굉장히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우리 조상들에게도 그런 다이내믹한 면이 있었다니.


   아무튼, 여행 내내 황룡사의 처절하게 파괴된 모습이 나를 계속 따라다녔다.

분황사 입구 / 분황사 종합 안내

경주 분황사(慶州 芬皇寺)

   분황사는 634년(선덕여왕 3)에 지어졌다. 자장대사(590~658)와 원효대사의 흔적이 남아 있는 신라시대의 명찰이다. 특히 원효대사(617~686)는 불교를 좀 더 공부하기 위해 의상대사와 함께 당나라로 이동하던 중, 백제국 항구 근처 토굴 속에서 하루 밤을 묵게 되었다. 갈증으로 고여있는 물을 마시게 되었는데, 물맛이 달고 시원하였다. 아침에 깨어보니 토굴이 아니고 공동묘지였고, 물을 마신 그릇은 해골바가지였다. 이를 계기로 크게 깨달은 원효대사는 당나라 유학을 포기하고 신라로 되돌아왔다.

분황사 설명판 / 원효대사 구도의 길

   거지행세를 하며 거리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민중포교에 들어갔다. 원효대사가 창시한 독창적인 불교를 분황종 혹은 해동종이라고 불렀다. 분황사에서 화엄경을 지었다. 설총이 그의 아들이다. 분황사앞길(기림사~골굴사~분황사~월정교, 약 30km)을 '원효대사 구도의 길'이라고 부르고 있다.


   황룡사 못잖은 크기였고, 황룡사와 함께 국찰로 큰 역할을 했다. 몽골의 침입과 임진왜란으로 대부분의 사찰 건물이 불탔다. 현재 국보 제30호 분황사 모전석탑을 비롯해 원효대사의 업적을 기리고자 고려시대 세운 비석의 받침돌인 화쟁국사비부, 석정(우물) 등이 남아 있다. 분황사는 신라를 대표하는 화가 솔거의 관음보살상 벽화가 있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분황사 모전석탑

분황사 모전석탑(芬皇寺 模塼 石塔)

   분황사 모전석탑은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 올렸다. 신라 석탑가운데 가장 오래된 탑이다. 원래는 9층이었으나, 지금은 3층만 남아있다. 넓은 1단의 기단 위에 3층 탑신을 쌓아 올린 모습이다. 네 모서리에 사자상을 두었다. 1층은 면마다 화강암으로 문을 만들고, 문 양쪽에 금강역사상 2구씩 배치했다.  분황사 창건과 함께 건립되었다. 부드러우면서도 힘찬 모습의 금강역사 조각은 7세기 대표적인 신라양식이다. 1915년 일본인에 의해 수리된 이후 지금까지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수리 당시 2층과 3층사이에서 탑 안에서 돌 사리함과 구슬등 많은 유물이 발견되었다. 돌사리함에서 타이완 오키나와 서식 조개의 껍질도 포함되어 신라대외교역의 범위에 대한 단서가 되고 있다.

분황사 화쟁국사비부

화쟁국사비부(和諍 國師 碑趺)

   화쟁국사비부는 원효대사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비석의 받침돌이다. 고려 숙종(1101년)은 원효대사에게 '대성화쟁국사'라는 시호를 내리고 비석을 세웠다. 지금은 받침돌만 남아 흔적을 전해 주고 있다.

분황사 석정

분황사 석정 (芬皇寺 石井)   

   신라시대부터 사용했다고 전하는 분황사 석정 ‘삼룡변어정’이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이 우물에는 세 마리의 호국용이 살고 있었는데, 795년(원성왕) 당나라 사신이 주술을 써서 우물 속에 사는 용을 세 마리의 물고기로 변하게 한 뒤 가져갔다. 뒤를 쫓아 다시 가져왔고 우물에 놓아주자 물이 한 길이나 솟아오르고 용들이 기뻐하며 뛰었다.  이후 이 우물을 삼룡변어정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천 년이 지난 우물은 아직도 마르지 않고 물이 차오른다. 틀의 높이가 약 70cm이고 내부는 원형이다. 그러나 숭유배불의 조선시대에 분황사 경내의 모든 돌부처의 목을 잘라 이곳에 넣었다는 아픈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분황사 보광전 / 금동약사여래입상 설명판

보광전(寶光殿)

   보광전에 모셔져 있는 약사여래입상이 있다. 불상은 1609년 동(구리와 주석 합금) 5,360근으로 주조되었다.  불상 겉면에 흙을 발라 조각하고 금을 입힌 시기는 1774년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대종각

대종각(大鐘閣)

   일주문 입구에 대종각이 있다.

분황사 당간지주

구황동 당간지주(幢竿支柱)

   구황동 당간지주는 분황사 일주문 남쪽 50m 지점과 황룡사지 사이에 있다. 사찰에서 의례나 행사가 열릴 때 깃발을 높이 달아 알렸다. 그 깃발을 당, 깃대를 당간, 긴 당간이 흔들리지 않게 지탱해 주는 지지대를 당간지주라고 하며, 대개 사찰 입구에 세웠다. 양 기둥에는 상 중 하 3곳에 지름 15cm의 구멍이 있고, 당간을 받쳤던 거북모양의 당간받침돌이 남아 있다.    

경주 황룡사 배치도 (옛터)

경주 황룡사지(慶州 皇龍寺址)

   황룡사는 경주 중심부에 위치한 신라 최대의 사찰이었다. 삼국시대 조성한 9층 목탑이 있었다. 황룡사 가람 배치 때 중심 불탑(佛塔)으로 건립되었으나 몽골 침입과 임진왜란으로 철저히 파괴되어 현재는 텅 빈 옛터만이 남아 있다.     

경주 황룡사지

황룡사 구 층 목탑 (皇龍寺 九層 木塔)

   553년(진흥왕 14년) 월성 동북쪽에 궁궐을 조성하다가 황룡이 나타나자 사찰로 고쳐지었다고 한다. 645년(선덕여왕 14년)에 구 층 목탑을 건립 완성하였다. 93년에 걸친 대규모 국가사업으로 완성된 사찰이었다. 중문과 목탑, 금당, 강당이 남북으로 놓여 있었다. 인도의 아소카왕이 삼존불상을 만들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황금과 황철을 배에 실어 보냈는데, 이 재료로 금동삼존불을 만들었다고 한다. 643년(선덕여왕 12년) 당나라에서 돌아온 자장대사가 거대한 구 층 목탑을 만들어 외적의 침입을 막을 것을  건의하였다. 이에 따라 백제 기술자 아비지(阿非知)를 초청하였고, 200인을 거느리고 2년 만에 완공하였다.

경주 황룡사지

   구 층 목탑은 낙뢰사고가 일어날 때마다 다시 고쳐 지었는데, 1238년(고려 고종 25년) 몽골 침입 때 황룡사와 함께 소실되었다. 신라 3보(진평왕의 천사옥대-허리띠, 진흥왕 때의 황룡사 장육존상-성인의 2배 크기, 선덕여왕 때의 황룡사 구 층 목탑)중 2보가 황룡사에 있었다.  1976년부터 8년 동안 발굴조사 결과 4만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그중 182cm의 대형 치미(용마루 양끝에 높게 부착하던 장식 기와)가 웅장한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탑을 9층으로 한 것은 이웃나라의 시달림을 막기 위함으로 제1층은 일본, 제2층은 중화, 제3층은 오월(吳越), 제4층은 탁라(托羅), 제5층은 응유(鷹遊), 제6층은 말갈(靺鞨), 제7층은 단국(丹國), 제8층은 여적(女狄), 제9층은 예맥(濊貊)을 제압하는 것이다.  높이는 상륜부 42척(약 15m), 탑신부 183척(약 65m), 전체 225척(약 80m)의 대탑이었다.     


경주 황룡사지 / 버스노선표

   관람을 마친 후 폐허가 된 황룡사지의 아픔을 안고, 100번 버스를 타고 월성으로 이동하였다.

경주시 팸플릿


<참고 자료>

-. 경주 관광 홈페이지

-. 경주시 팸플릿(분황사 모전석탑, 황룡사지 )


글이 길어져 월성, 동궁과 월지(안압지), 석빙고는 다음 편에 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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