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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바다 Jan 27. 2024

경주(慶州)  구석구석 (4)

월성과 석빙고 그리고 동궁과 안압지(월지)

   

경주 관광 안내도


분황사와 황룡사지의 훼손된 모습에 장탄식을 했다. 하루빨리 옛날의 찬란했던 본래의 풍모를 재현하였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였다.  

월성 석빙고 동궁 월지

   버스정류장에서 다시 시외버스터미널방향으로 가는 16번을 타고, 월성동 행정복지센터에서 내려 길 안내표시대로 월성 방향으로 걸어갔다. 월성 동궁 박물관 계림 첨성대 구간 탐방은 꽤 발품을 팔았다.

월성

   구간 명소사이의 이동은 버스를 타기에는 좀 애매한 한 두 정거장 거리다. 걷고 또 걸었다. 역사의 장소를 직접 체험하고 싶었다.  


경주 월성 이야기

 

<주요 관람 코스> (아래 글 탐방 내용 : 굵은 선)

석굴암> 불국사> 분황사> 황룡사지> 월성(석빙고)>동궁과 안압지(월지)>경주 국립 박물관> 월성> 계림> 첨성대  

경주 월성 (좌측 푸른 연못 부분이 해자임)


월성의 내부, 북쪽 높은 성루에 석빙고가 있다. 


월성

   월성은 신라 궁궐이 있었던 도성이다. 성의 모양이 반달처럼 생겼다 하여 반월성, 신월성이라고 하였다. 왕이 계신 성이라고 하여 재성이라고도 하였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101년(파사왕 22년)에 성을 쌓고 금성에서 이곳으로 도성을 옮겼다고 전해진다.


   이성은 신라 역대 역대 왕들의 궁성이었으며, 문무왕 때는 동궁과 월지 임해전 첨성대 일대가 편입되어 성의 규모가 더욱 확장되었다. 성의 동서북쪽은 흙과 돌로 쌓았으며, 남쪽은 절벽인 자연 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였다. 성벽옆 땅을 깊이 파고 물을 가득 채운, 인공적 방어시설인 해자가 있었다. 동쪽에는 경주 동궁과 월지로 통했던 주 출입로였던 문 터가 남아 있다.   

발굴 중인 월성

   동쪽 문 터를 통해 월성에 올랐을 때 발굴 조사가 진행 중이어서, 석빙고와 관람데크, 파헤친 대지를 덮은 파란색 천막과 발굴조사 안내간판만 있었다. 월성 발굴조사 현장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관람 데크가 있다. 성벽을 비롯해 성을 보호하는 시설인 해자, 내부 건물지를 4 구역(A-D지구)으로 나누어 대대적인 발굴조사가 진행 중이다.     


   궁성을 이루는 주요 건물들이 모여 있었던 중앙 건물지인 C지구에서 정사각형 담장으로 둘러싸인 통일신라 후기 건물지 17동이 확인되었다. 공무 수행기록 등이 담긴 목간(문자를 기록한 나뭇조각), 벼루, 각종 토기와 토우, 동물 뼈와 식물의 씨앗 등 다양한 유물도 출토되었다.      


   월성 서쪽 성벽 기초층에서 인골 2구가 나왔다. 사람을 제물로 사용한 ‘제의’의 흔적이라고 한다. 에밀레종 전설 속의 공양된 아이가 떠올랐다. 중앙 건물지에서 출토된 벼루는 건물들이 관청이었음을 추정하는 근거가 되었다. 터어번을 쓴 토우는 서역인들과 교류를 했던 증거이다.      

석빙고 밖 / 안

석빙고

   석빙고는 얼음을 넣어두었던 창고로, 경주 월성 안 북쪽 성루 위에 남북 방향으로 자리하고 있다. 남쪽에 마련된 출입구로 들어가면 계단을 통하여 밑으로 내려가게 되어 있다. 안으로 들어 갈수록 바닥은 경사를 지어 물이 흘러 배수가 될 수 있게 설계되어 있다.

석빙고

   지붕은 반월형이며 3곳에 환기통을 마련하여 바깥공기와 통하게 하였다. 석비에는 1738년(조선 영조 14년) 부윤 조명겸이 나무로  빙고를 돌로 축조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석빙고 입구의 돌에는 3년 뒤인 1741년(조선 영조 17년)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서 고쳐지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규모나 기법면에서 뛰어난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월성과 석빙고 탐방 후, 서둘러 큰길 건너편에 있는 동궁과 안압지(월지)로 이동하였다. 동궁 건물들 옆에 있는 큰 연못이 안압지(월지)다.

동궁 / 안압지

안압지(월지)

   삼국 통일 후 674년(문무왕 14년)에 큰 연못을 파고 못 가운데 3개의 섬과 못의 북. 동쪽으로 12 봉우리의 산을 만들었다. 여기에는 아름다운 꽃과 나무를 심고 진귀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

동궁

동궁

   신라 왕궁의 별궁터이다.  안압지(월지)를 674년 완성한 후, 679년(문무왕 19년)에는 동궁을 지었다. 나라의 경사가 있을 때나 귀한 손님을 맞을 때 이곳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신라 경순왕이 견훤의 침입을 받은 뒤 왕건을 초청하여 위급한 상황을 호소하며 잔치를 베풀었던 곳이다.

동궁 석조 유구

   회랑지를 비롯하여 크고 작은 건물터 26곳이 확인되었다. 그중 1980년에 서쪽 못가에 있는 신라시대 건물터 5곳 중 3곳과 동궁과 안압지(월지)를 복원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그중에서 동궁 중 한 건물이었던  임해전 위치가 확인되었다. 벽돌에 '조로 2년'이라는 글자를 근거로 임해전이 문무왕 때(680년)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특히 동궁 안 임해전은 비중이 있는 건물이었다.  대접이나 접시도 많이 나왔는데, 실제 생활에 사용되었던 증거이다.

안압지(월지)

   저녁 시간에 임해전을 비롯한 복원 건물에 조명이 들어오면, 환상적이라고 한다. 매 분, 매 초 오만가지 빛깔이 동궁과 월지를 수놓는다고 한다. 아쉬움을 남기고 빠른 걸음으로 박물관으로 이동했다.


경주시 팸플릿


<참고 자료>

-. 경주 관광 홈페이지

-. 경주시 팸플릿(월성, 석빙고 그리고 동궁과 안압지(월성))


글이 길어져 경주 국립 박물관은 다음 편에 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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