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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바다 Mar 26. 2024

수원 화성(水原 華城) 구석구석 (4)

수원 화성행궁(水原 華城行宮)

화성행궁

   효의 고장, 수원을 방문(2024.03.16., 토, 맑음, 10도)했다.  수원화성 성곽을 한 바퀴(3시간 소요, 약 1만 5 천보) 돌아보았다. 그다음 화서문에서 화성행궁으로 이동했다. 창경궁에서 사도세자는 아버지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힌 채 8일 만에 더위(7월)와 굶주림으로 죽었다. 왕권을 물려받은 효자 정조는 사도세자의 무덤을 현재의 융릉으로 이장하였다. 당연히 능 근처의 관청과 민가는 현재의 수원 화성으로 이전하게 되었다. 이것이 수원화성이 탄생하게 된 배경이다. 또한 수원화성 안에 화성행궁을 건설하였다. 정조는 융릉행차 때 화성행궁을 총 12회 이용하였다.


   화성행궁 앞 하마비와 홍살문이 있는 넓은 광장에서 가족 연인들이 연날리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적어도 15개 이상의 각양 각색의 연들이 날고 있었다. 품격이 있는 도시다.


수원화성 및 내부 탐방 경로는 다음과 같다. (굵은 선이 금회 설명분, 화성행궁)

화서문>장안문>화홍문>창룡문>팔달문(수원남문시장)>서장대>화서문(출발 및 복귀점 도착)>화성행궁>화령전>행궁동 카페거리     

화성행궁

수원 화성행궁(水原 華城行宮)

   수원 화성행궁은 정조가 능원에 참배할 때 머물던 임시 처소였다. 평소에는 부사(府使) 또는 유수(留守)  집무하면서 관리하였다. 1789년(정조 13년) 수원 화성 건설 후,  1796년(정조 20)에 창건했다. 1789년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옮긴 후 1800년(정조 24년)까지 11년 간 12차례에 걸쳐 화성에 행차했고, 이때마다 화성행궁에 머물렀다.     

화성행행도 8편 중 일부 3편(화성성묘전배도 / 한강주교환어도 / 서장대성조도, 화서문 밖 광장에 위치)

   행궁은 용도에 따라서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전쟁과 같은 비상시를 대비하기 위하여 마련된 행궁으로는 강화행궁, 의주행궁, 남한산성행궁 등이 있다. 휴양을 목적으로 설치된 행궁으로는 온양행궁이 있다. 그리고 왕이 지방의 능원(陵園)에 참배할 때 머물던 행궁으로 화성행궁이 있다.     


   576칸으로 정궁(正宮) 형태를 이루며 국내 행궁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했지만 대한제국 시기에 경기도 관찰부, 수원 군청, 자혜의원, 학교 등이 자리하면서 용도 변경이 있었다. 1910년 8월 일제강점기 이후에는 낙남헌을 제외한 대부분 시설이 일제의 민족문화와 역사 말살 정책 및 병원과 학교 건물 증개축 등으로 파괴되었다. 1996년 복원공사가 시작되어 482칸을 1단계 복원 완료하였다. 2023년 현재 객사인 우화관과 별주, 장춘각을 비롯한 나머지 94칸에 대한 2단계 복원이 진행 중이다.

신풍루(경내)

신풍루(新豐樓)

   신풍루는 화성행궁의 정문이다. 1789년(정조 13년)에 누문 6칸을 세우고 진남루(鎭南樓)라 하였다. 1795년 혜경궁 홍 씨(정조의 어머니)의 회갑연을 열면서 이름을 신풍루로 바꿨다. 이때 신풍루에서 수원 주민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는 행사를 베풀었다. 건물은 2층의 누각 구조로 아래층은 출입문으로 쓰고, 위층에는 큰 북을 두어 군사들이 주변을 감시하고 신호를 보내는 용도로 사용했다. '신풍'이란 이름은 정조에게 있어 화성은 고향과 같은 고장이라는 의미로 편액을 걸었다. 가운데 문은 어도(御道)로, 임금만 지나갈 수 있었다.     

좌익문

좌익문(左翊門)

   정문인 신풍루를 통과하면 정면에 보인다.    

중양문

중양문(中陽門)

   중양문은 궁궐 건축의 삼문 설치 형식에 따라 행궁의 정전인 봉수당을 바로 앞에서 가로막아 굳게 지키는 역할을 하는 내삼문(內三門)이다.

봉수당

봉수당(奉壽堂)

   봉수당은 화성행궁의 정전이자, 화성유수부의 동헌 건물로 장남헌(壯南軒)이라고도 한다. 정조는 1795년에 혜경궁 홍 씨의 회갑연 '진찬례'를 이 건물에서 거행하였다. 혜경궁의 장수를 기원하며 '만년(萬年)의 수(壽)를 받들어 빈다'는 뜻으로 현판을 썼다.

봉수당 진찬례

   진찬례는 조선 최대의 궁중 행사 중 하나였다. 일제강점기에 병원 건물을 신축하면서 파괴된 봉수당은 1997년에 복원되었다.     

유여택

유여택(維與宅)

   유여택은 평소에 화성유수가 기거하다가 정조가 행차 시에 머물며 신하들을 접견하는 건물이었다.

유여택 내부 / 설명판 / 신하 접견 장면

   화성 유수를 임명하여 내려 보내는 곳이라는 의미다. 1795년 행차 때 정조는 유여택에서 신하들의 보고를 받고 과거 시험에 합격한 무사들에게 상을 내리기도 했다.

경룡관

경룡관(景龍館)

   경룡관은 장락당으로 들어가는 대문 상부에 지은 다락집이다. '경룡'이란 제왕을 상징하는 큰 용을 뜻한다. 정조는 이 건물에서 휴식을 취하며 조선의 태평성세를 구현하고자 하였다. 1794년(정조 18)에 2층 구조로 만들었다. 건물의 2층은 모두 마루를 깔았다. 1층은 지락문(至樂門)이라고 했다.     

장락당 (출처 : 수원문화재단)

장락당(長樂堂)

   장락당은 혜경궁의 침전이다. 정조가 혜경궁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며 편액을 직접 써서 걸었다.  1795년(정조 19) 을묘원행 시에 혜경궁은 여기 머물렀다.

장락당 내 (혜경궁 홍 씨)

    또한 임금이 화성에 내려오면 머무는 처소로도 사용되었다. 온돌방은 매 칸마다 겹겹이 문을 달아 아늑하게 만들었고, 문을 모두 열어젖히면 실내가 트이도록 했다. 어머니의 복을 기원하는 정조의 효심을 확인할 수 있다.

복내당

복내당(福內堂)

   복내당은 행궁의 내당으로 정조가 행차 시에 머물던 곳이었다. 좌우 건물 두 채로 이루어져 있다. 평시에는 수원읍 고을 수령과 가족이 거처하던 건물이었다. 조선 정조 18년(1794) 화성행궁에 장락당을 만들기 전까지는 왕의 숙소로도 쓰였다.   

낙남헌(출처 : 수원문화재단)

낙남헌(洛南軒)

   낙남헌은 일제 강점기에 화성행궁이 철거될 당시 훼손당하지 않고 그대로 남은 유일한 건축물이다. 낙남헌은 화성행궁에서 공식 행사나 연회를 열 때 사용하는 건물이다. 정조는 1795년 을묘원행 당시 낙남헌에서 수원의 백성들을 위해 잔치를 베풀고, 무과 시험을 치르고 상을 내리는 등 다양한 행사를 열었다. 월대로 오르는 계단 양 옆에는 구름무늬가 새겨져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수원군청으로 사용되었고, 신풍국민학교 교무실로도 사용되었다.

노래당(출처 : 수원문화재단)

노래당(老來堂)

    노래당은 낙남헌에 잇대어서 지은 화성행궁의 별당이다. 정조는 화성에서 노년을 보내기 위해 ‘늙음이 찾아온다’라는 뜻을 지닌 노래당을 짓었다. 노래당은 아들의 나이가 15세가 되면 왕위를 물려주고 화성에서 내려와 지내려 했던 정조(1776~1800, 49세)의 뜻이 담긴 건축물이다. 그러나 조선개혁을 꿈꾸던 그가 갑자기 승하했다.

득중정(출처 : 수원문화재단)

득중정(得中亭)

   득중정은 활을 쏘는 정자로서 조선 정조 14년(1790)에 지었다. ‘활을 쏘아 맞으면 제후가 될 수 있고, 맞지 않으면 제후가 될 수 없다射中 則得爲諸侯 射不中 則不得爲諸侯’라는 구절을 본떠서 이름을 지었다. 임금이 활을 쏘는 어사대를 특별히 마련했다. 정조는 수원에 올 때면 득중정에서 활을 쏘았다.

집사청(출처 : 수원문화재단)

집사청(執事廳)

   집사청은 관청에서 치르는 제사나 행사를 준비하는 집사들이 근무하는 건물로 조선 정조 14년(1790)에 건립되었다. 정조의 현륭원 행차를 비롯해서 왕이 화성에 내려와 진행하는 모든 행사를 준비했다. 평소에는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수령이 화성행궁의 객사인 우화관에서 올릴 의례를 준비하는 곳으로 쓰였다.

북군영(출처 : 수원문화재단)

북군영(北軍營)

   장용영 외영의 기마병이었던 친군위(親軍衛)가 좌, 우열(북군영, 남군영)로 각 각 100명씩 입직숙위하는 건물이다. 조선 정조 18년(1794) 화성행궁을 증축하며 정문인 신풍루 좌우에 군영을 지었는데 남쪽은 남군영, 북쪽은 북군영이라고 부른다.  <정리의궤>의 「행궁전도」에는 북군영이 ㄱ 자형으로 그려져 있다. 이에 2002년 복원 시의 발굴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북군영을 ㄱ 자형으로 복원했다.

남군영(출처 : 수원문화재단)


남군영(南軍營)

   남군영은 국왕 친위 부대인 장용영 외영(정조의 친위군사조직 중 화성을 지키는 부대) 군사들이 주둔하던 건물이었다. 장용영 군사는 왕이 화성에 내려올 때는 물론 평소에도 화성을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    

서리청(출처 : 수원문화재단)

서리청(書吏廳)

   서리청은 화성유수부 관청의 여러 사무를 담당하는 하급 관리들이 근무하는 건물이다. 행궁 안의 건물들이 보통 10칸 내외 규모인데 비해 서리청은 22칸이다. 서리청 마당 건너 남쪽에는 문서창고가 있었다.

비장청(출처 : 수원문화재단)

비장청(婢將廳)

   비장청은 고을 수령을 보좌하는 비장들이 근무하는 건물이다. 화성 유수는 정 2품 당상관이었기 때문에 여러 명의 비장을 두었다. 조선 정조 19년(1795)에 혜경궁 홍 씨의 회갑연을 치를 때 비장은 음식을 차리는 일을 비롯해서 행사의 모든 절차를 담당했다.  

미로한정

미로한정(未老閒亭)

   화성행궁 후원에 세운 소박한 정자이다. 조선 정조 13년(1789) 수원읍을 팔달산 아래로 이전한 이후에 지었다. ‘늙기 전에 한가로움을 얻어야 진정한 한가로움이다未老得閑方是閑’라는 시구를 인용한 것이다. 아들 순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수원에 내려와 한가하게 노년을 즐기고자 했다.

내포사(출처 : 수원문화재단)

내포사(內鋪舍)

   위급한 상황이 발생하면 행궁에 소식을 알리는 역할을 하던 군사 시설이다. 높고 탁 트인 곳에 있어서 사방을 관찰하기에 적절하다. 평상시에는 장교 1인과 군졸 3인이 근무하였지만 왕이 행궁에 머물면 장교 2인과 군졸 4인을 배치해 경비를 강화했다. 군사들이 머무를 수 있도록 후면 1칸에는 온돌을 설치했다.  

외정리소(출처 : 수원문화재단)

외정리소(外整理所)

   화성에서 거행되는 국왕의 행차나 행사에 드는 모든 비용 문제를 총괄하는 곳이다. 혜경궁 홍 씨의 회갑연을 화성에서 치를 때 행사준비를 담당한 임시기관으로 만들었다. 화성 성역이 끝난 후에는 행사준비뿐 아니라 화성행궁의 수리와 군사들의 식량과 말먹이까지 관장하였다. 주위에 행랑과 창고를 두었다.

뒤주
수라상
수라상 메뉴



출처 : 수원문화재단

         위키백과

         한국민족문화대사전

         수원화성과 화성행궁  팸플릿


다음 편에서는 화령전과 행궁동 카페거리를 보여드리겠습니다. 긴 글 읽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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