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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바다 Apr 02. 2024

정조의 건릉(健陵)과 사도세자의 융릉(隆陵) 탐방

수원 화성(水原 華城) 구석구석 (6)

건릉과 융릉 종합 안내도

   효원의 고장, 수원을 방문(2024.03.16., 토, 맑음, 10도)하여 수원화성, 화성행궁, 화령전, 행궁동 카페거리와 팔달문 일대의 시장들을 둘러보았다. 마침 그다음 주(2024.03.22~23., 토~일, 맑음, 15도) 수원에서 가족모임이 있어 일요일 아침 일찍 융릉과 건릉(경기도 화성시 안녕동)으로 출발했다. 수원에서 남쪽으로 버스 약 1시간 거리에 있다. 


   탐방후기를 미리 써 본다. 정조의 지극한 효심이 죽은 사도세자를 살렸다. 더욱이 수원화성이라는 거대한 성곽을 후세들에게 아름다운 선물로 남겨 주었다. 정조는 멋진 군주였다. 불취무귀(不醉無歸, 취하지 않으면 돌아가지 못한다)라는  따뜻한 인간미가 있는 매력이 넘치는 사나이였다. 수원 팔달문시장 앞에 앉아 있는 정조의 동상이 있다. 화성 축성 축하연에서 기술자들에게 술을 따라 주며 한 말(不醉無歸)이다.  군주로서 백성들의 풍요로운 삶과 세상을 아름답게 하자는 염원이 담겨 있다.


건릉과 융릉 탐방 경로는 다음과 같다. (굵은 선이 금회 설명분)

화서문> 장안문> 화홍문> 창룡문> 팔달문(수원남문시장)>서장대> 화서문(출발 및 복귀점 도착)>화성행궁>화령전>행궁동 카페거리 및 명소>건릉과 융릉(마지막)


   먼저 매표소 입구 식당에서 간단한 아침식사를 하였다. 이른 시간에도 손님이 많았다.

매표소(좌)와 건릉 융릉 출입구 / 역사문화관

   매표소에서 팸플릿을 받고 통과하여 좌측 역사문화관을 방문하였다. 역사문화관에서 건릉융릉 관련, 많은 참고 자료를 볼 수 있었다.

재실

재실

   건능과 융능을 위한 재실은

제관들이 미리 도착하여 몸과 마음을 정화하고 제례를 준비하던 곳이다. 평소에는 참봉(종 9품)등 관리가 상주하면서 능역을 돌봤다. 재실 외에 향을 보관하는 안향청, 제례를 주관하는 전사청. 제기를 보관하는 제기고, 행랑채등이 있었다. 단청은 하지 않았다. 우측 재실을 둘러본 후 건릉 쪽으로 올라갔다.

건릉

건릉

   정조(1752-1800, 재위 1776-1800)와 효의왕후(1753-1821) 김 씨가 묻힌 곳이다. 정조는 장조(사도세자)의 아들로 1759년 (영조 35년)에 세손에 책봉되었다. 1762년 사도세자가 비극의 죽음을 당하자 영조의 맏아들 효장 세자(추존)의 후사가 되어 왕통을 이었다. 1775년(영조 51년) 할아버지 영조를 대신하여 대리청정하였다. 영조가 승하하자 1776년에 왕위에 올랐다.


   정조는 아버지인 사도 세자가 당쟁에 희생되었기에 왕권을 강화하고 체제를 재정비하기 위하여 영조 이래의 기본 정책인 탕평책을 계승하여 당파와 신분에 상관없이 인재를 등용하였다. 왕실의 도서관인 규장각을 설치하여 학문진흥에 힘썼다. 친위부대인 장용영을 설치하여 군사력을 강화하였으며, 수원화성을 건축하는 업적을 남겼다. 문화적인 황금시대를 이루어 조선후기 문예부흥기를 이루었다.


   효의왕후 김 씨는 청원부원군 김시묵의 딸로 1762년 (영조 38년) 왕세손빈으로 책봉되었고, 정조가 즉위하자 왕비가 되었다. 정조와의 사이에서 자식을 낳지 못하였으며,  정조의 후궁 소생인 왕세자(순조)를 양자로 입양하여 왕위에 올렸다. 1800년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융릉 동쪽 언덕에 건릉을 조성하였다. 1821년(순조 21) 창경궁에서 승하하였다. 건릉에 함께 모시려고 하였으나 건릉의 원래 위치가 불길하다고 하여, 현재의 자리로 옮기고 합장릉으로 조성하였다.


   문인석과 무인석, 장명등, 망주석 등의 석물을 그대로 옮겨 사용하였다.  융릉과 달리 봉분은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다.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는 신도와 어도로 구분하였다. 정자각 그 아랫단 왼편까지 넓게 박석을 깔았다.

건릉의 홍살문과 정자각과 건릉(우측 멀리)

홍살문

   능. 원. 궁전. 관아등의 정면에 세우는 붉은 칠을 한 나무 문이다. 경의를 표하는 장소라는 의미가 있다.

건릉의 향로와 어로

향로와 어로

   향로는 제사  향과 축문을 들고 가는 길이다. 향로(박석 2줄)는 신과 관련 있는  엄숙한 길이므로 방문객들은 우측 어로(왕의 길, 박석 1줄)로 다닐 것을 안내하고 있다. 서울 종묘와 동일하다. 

정자각

정자각

   능앞에 지어진 丁(정) 자형의 제사 건물이다. 모양이 丁(정) 자를 닮아 정자각이라고 한다.


수복방

   정자각과 능역을 밤낮으로 지키는 사람들이 거처하는 곳이다. 아울러 수라간(간단한 제례 준비) 역할도 했으리라 짐작된다. 뒤편에 굴뚝이 있다.

수복방 / 수복방 측면(굴뚝이 보인다)
건릉 비각
건릉비각

비각

   내부에 건릉 비문이 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정조는 1752년 9월 22일 탄생, 1759년 왕세손에 책봉, 1775년 대리청정을 하였다, 1776년 왕위에 올라 1800년 6월 28일 승하했다. 재위는 24년, 나이는 49세였다. 11월 6일 융릉 동쪽 언덕에 장사 지냈다가, 1821년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효의 선황후(1752~1821 3월 9일)는 69세에 승하했다. 1821년 9월 13일에 합장하였다.

건릉(원거리 촬영, 약 1m 높이 우물 정자 낮은 울타리로 길게 막아 놓고, 왕릉에 접근 금지 표시가 있어 더 이상 올라가 볼 수 없었다)
들꽃 광장

들꽃광장

   건능과 융능의 사이에 있다. 봄이 되면 들꽃이 만발할 것 같다.

융릉

융릉

   제22대 정조의 아버지 장조(사도세자, 1735~1762)와 경왕후를 모신 융릉이다.

영조와 영빈 이 씨의 아들로 태어난 이듬해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15세 때 1749년(영조 25년) 영조를 대신해 정사를 돌보았다. 그러나 아버지 영조와 불화로 병을 얻었고, 노론세력과 대립하는 등 문제가 거듭된 끝에 1762년(영조 8년) 왕세자 신분에서 폐위되어 뒤주에 갇혀 세상을 떠났다. 영조는 아들의 신분을 회복시켜 사도세자라는 시호를 내렸다. 정조가 왕위에 오른 후 장헌세자라는 칭호를 올렸다. 대한제국 선포 후 1899년(광무 3) 장종대왕으로 추존되어 묘호를 장조라 하였다.


   헌경왕후 홍 씨(1735~1815, 혜경궁 홍씨)는 영풍부원군 홍봉한의 딸로 1744년(영조 20) 왕세자빈으로 책봉되었다. 남편 사도세자가 세상을 떠난 후 혜빈에 봉해졌고 , 아들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혜빈궁이 되었다. 남편의 죽음에 대한 회고록 한중록을 직접 썼다.


   1762년 장조(사도세자)가 세상을 떠나자 현 서울 서대문구 배봉산에 무덤을 만들고 수은묘(정조 즉위 후, 영우원)라 하였다. 1789년(정조 13년) 정조는 아버지 무덤을 현재의 자리인 화산으로 옮겨 현륭원으로 바꾸었다.


   현륭원은 정조의 명으로 특별히 격을 높여 조성하여 봉분에는 모란과 연꽃을 조각한 병풍석을 두르고 무인석을 설치하였다. 1815년(순조 15) 헌경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 현륭원에 합장하였고, 1899년(광무 3) 원을 능으로 높여 지금의 융릉이 되었다.


   사도세자의 죽음을 좀 더 펴본다. 경종은 후사가 없는 데다 신병이 많아 후계자가 혼미에 빠져 있었다. 이때 노론의 4인방으로 불리는 김창집, 이건명, 이이명, 조태채 등의 주장에 따라 영조가 세제로 책봉된다. 그러자 소론 측에서는 시기상조론을 들고일어나 노론의 4 대신을 4흉(四兇)으로 몰아 처형했다. 이것이 잘 알려진 신임사화다. 생명의 위협 속에서 겨우 헤어난 영조는 왕위에 올라 자신을 왕으로 만들었던 노론의 의리를 정당화하고 소론을 쫓아냈다. 이것이 신임의리다. 정치적 평정을 이루려고 탕평책을 쓰기도 했지만 영조는 노론의 편이 아닐 수 없었다.


   문제는 당대의 정황을 예의 주시한 사도세자가 영조의 정치가 옳지만은 않다는 생각을 키워가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사도세자는 노론 세력이 보기에 눈엣가시였다. 그런데 세자가 영조를 대신해 정무에 임하자 노론에 불똥이 떨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노론 측에서는 줄기차게 사도세자의 흠을 들추면서 이간질했고, 이들 배경에는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숙의 문 씨 등이 있었다. 이들은 세자를 제거하는 일이 간단하지 않자 사도세자가 몰래 왕궁을 빠져나가 문란한 행동을 일삼는다고 무고하기 이르렀다.


   자연스럽게 부자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고 불화가 중첩되자 세자는 급기야 정신 질환을 앓게 된다. 결국 사도세자는 영조의 명에 의해 뒤주에 갇혀 죽었다. 정조는 즉위 이후 당쟁을 없애기 위해 탕평책을 펼치며 신진 세력을 등용하는 한편 화성 건축을 통해 왕권의 강력함을 보여주려 했다. 또 아버지의 죽음에 억울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에 즉위 초부터 사도세자의 복권에 공을 들였다.


    사도세자의 능은 원래 경기도 양주군 남쪽 배봉산에 있었는데 정조가 즉위하면서 아버지의 존호를 장헌으로 올리고, 1789년 이곳으로 묘를 옮긴 후 능호를 융릉으로 바꾸었다.

융릉 홍살문

융릉의 홍살문

   융릉건릉의 건물 배치는 매우 흡사하다. 정조가 융릉을 지극한 효심을 가지고 조성하였으니, 건릉도 그 기준으로 맞추었을 것이다. 아래 융릉 관련 용어들은 건릉 설명 부분을 참고하셨으면 한다.

융릉 수복방

융능의 수복방  

(건능 설명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융릉 정자각

융능의 정자각

(건능 설명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융릉 비각(현륭원 표석과 융능 표석)

융릉 비각

   비각안에 표석이 2개 있다. 하나는 현륭원 표석이고 다른 하나는 융릉표석이다. 현륭원 표석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현륭원 표석

   사도세자(장현세자, 1735~1762 윤 5월 21, 28세 졸)는 1736년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1749년 대리청정을 명 받았다. 시호를 사도세자로 추증하였다. 7월 23일 양주 남중량포 배봉산(현 서울 동대문구 휘경동 배봉산)에 장사 지냈다. 정조가 왕위에 오른 해(1776년) 추존하여 장헌세자, 원호를 영우원이라 올렸다. 1789년 10월 7일 수원 화산으로 무덤을 옮기고, 원호를 현륭원으로 고쳤다.

현륭원 표석

융릉 표석

   이 표석은 정조가 직접 썼다. 1899년(광무 3) 10월 왕으로 추존하고 능호를 융릉으로 올렸다. 그해 11월 시호를 의황제, 묘호를 장조라 올렸다. 황후 홍 씨(1735~1815년 12월 15일, 81세)는 1744년 세자빈으로 책봉되고,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궁호를 혜빈의 칭호를 받았다.  고종은 1900년 원래의 표석 다음으로 표석을 추가로 세웠다.  

융릉 표석
융릉
곤신지

곤신지

   1789년(정조 13) 융릉(현륭원) 현 서울 동대문구 배봉산에서 현재의 자리로 옮긴 후 이듬해 조성한 원형의 연못이다. 원형으로 조성한 것은 용의 여의주의 형상이라고 한다. 이 연못은 남서 방향으로, 이 자리는 융릉의 생방(수지리 용어로 능에서 처음 보이는 물)이기 때문에 연못을 조성하였다.

정조 초장지

정조 초장지

   1800년 6월 정조가 승하하자 생전에 아버지 곁에 묻히고자 했던 정조의 뜻에 따라 융릉(현륭원) 근처 동쪽에 건릉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1821년 정조비 효의왕후가 승하하여 건릉에 합장하려고 할 때 건릉의 자리가 길지가 아니므로 옮겨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다. 실제로 파묘 시 물에 젖어 있었다고 한다. 정조가 생전 능자리로 염두에 두었던 여러 곳 가운데 수원향교 옛터에 정조와 효의 왕후를 합장하여 모시게 된 것이 현재의 건릉이다.


   정조의 처음 묻혔던 곳의 정확한 위치가 알려지지 다가 2011년과 2012년 이곳에서 왕릉 규모의 봉분 구역과 담장시설, 왕릉 부장품에 적합한 유물이 발굴되면서 이곳이 정조가 처음 묻힌 곳으로 알려졌다.


* 참고 자료

조선 왕릉의 기본 구성
조선 왕릉의 분포


출처 : 융능과 건능 팸플릿

         역사문화관    


   융릉과 건릉을 끝으로 수원화성과 화성행궁 시리즈를 마칩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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