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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루와, 이 영화 좋게 본 사람!

영화 <28년 후> 리뷰

by 오지

개인적으로 성장 서사를 좋아할 나이는 아니다. 좀비 영화와 성장 서사라니. 이 뜬금없는 조합에 살짝 놀랐다가 성년의 통과의례로 좀비 사냥을 택했음을 깨닫고 차츰 수그러든다. 전체적으로 좀비가 주가 아니라 성장 영화에 좀비를 수단으로 등장시킨 느낌이 없지 않다. 그래서인지 이 영화를 잔뜩 기대했던(23년 동안 기다린) 사람들의 혹평이 훨씬 많은 것 같다.

예고편을 지나치게 잘 만들어도 문제다. 다들 ‘낚였다’라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예고편에서 음산하고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만들었던 키플링의 시 ‘군화’의 오디오가 영화에서 더욱 진가를 발휘한다 해도 말이다. 배경으로 시가 흐르고, 화면에서는 좀비들, 과거에 있었던 모든 전쟁 장면이 나오는 동안 불쾌함이 극에 달했다. 감독은 무려 ‘스타일리스트’ 대니 보일 아닌가. 오랜 기간 잊고 있었다. 대니 보일이 얼마나 사운드를 잘 쓰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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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좀비 영화가 산뜻한 느낌을 주면 실패 아닐까. ‘알파’로 진화한 좀비가 말 그대로 사람 머리통을 뽑아 버리고 척추까지 딸려 온 머리통을 무기로 휘두르는 장면에서는 뭐랄까, 할 말을 잃었다. 나도 영화 좀 본 사람인데 생경하다. 신선함과 불쾌함이 동시에 느껴진다.

좀비물에서 죽음을 다루고, 생명을 다루는 건 뭐, 예상 가능한 얘기다. 그래도 좀비가 애 낳는 장면을 보게 될 줄은 상상을 못했다(이 장면에서 나가는 사람을 봤다). ‘생명 탄생의 위대함’을 나타내기 위해 출산 장면을 넣는 경우도 꽤 있지만 그 의도에 좀처럼 동의하기 어렵다. 출산은 엄연히 동물적인 과정이고 아름답거나 위대하기만 한 장면이 아니다. 임신부 좀비와 아일라가 출산을 위해 손을 잡는 장면에서 ‘자매애’가 살짝 느껴져 감동할 뻔했는데 바로 좀비 본성이 발동해 달려들다 죽임을 당했으니.


좀비 영화에서 으레 기대하기 마련인 장면들이 덜 등장한다는 점에서 혹평을 하는 거라면, 이해한다. 대니 보일이라면 누구보다 그런 장면을 스타일리시하게 만들어 냈을 테니 기대가 무산된 심정이랄까. 그 스타일에 압도되는 경험을 못한 건 조금 서운하지만 장르 영화에 색다른 시도를 한 점은 인정해 주고 싶다. 누가 뭐래도 모골이 송연한 사운드를 만들어 냈고, ‘슬로우 로우’나 ‘알파’와 같은 좀비 캐릭터를 만들어 낸 점이 반가웠다. 23년 전에 만들어진 <28일 후>가 좀비 영화의 원형(原型)이 된 것처럼 진화했거나 퇴보한 좀비 캐릭터가 어떤 결과를 만들어 낼지 모를 일이다.

개인적으로 대니 보일이 나이가 좀 들었나 했다. 어쩐지 이 사람은 영화 장면 만드는 거 보면 영원히 나이가 안 들 것 같은 사람이란 느낌이 있었는데. 이번 영화에서 여러 가지 주제를 담아내는 걸 보며 좀 변했나 싶었다. 근데 마지막에 ‘지미 일당’이 나오는 장면의 B급 감성을 보면서 ‘아, 아니구나’ 했다. 나이와 별개로 B급 감성에 가슴 떨리는 사람으로서 이 작품이 트릴로지로 제작된다는데 누가 뭐래도 그 종결을 꼭 지켜볼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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