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brace. 이 단어는 몇 해 전 내가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놓친 영화 제목이다. 그 뒤로 인터넷을 뒤졌지만 우리나라에서, 현 시점에 볼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페미니즘 관점을 담은 영상물로 여성이 각자의 몸을 ‘embrace’하는 과정과 인터뷰 등이 담긴 것으로 알고 있다. 당시 나는, 상태가 어떻든 자기 몸을 긍정한다는 시각이 마음에 들어 이 영화를 보고 싶었다. 내가 평생 할 수 없었던 일이기도 하고, 앞으로도 가능할 것 같지 않은 일을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이뤄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우리말로 하면 ‘받아들이다’, ‘포용하다’ 정도가 될 것 같다. 이것 나름대로 뜻이 좋지만 어감이 왠지 ‘임브레이스’ 하면 내가 나를 껴안는 이미지가 떠올라 마음이 말랑말랑해진다. 좋아하는 영어 단어 중 하나이고, 또 어떤 면에서는 평생 화두인 단어이기도 하다.
내가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나의 몸뿐만이 아니다. 나는 내 성품이나 페르소나, 나 자신의 사회적 위치, 나아가 자식들의 현재까지 수용하지 못하고 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건 어릴 때 경험과 맞닿아 있는 것 같다. 인생에서 한 번도 존재 그 자체로 받아들여진 경험이 없는 사람이 자신의 불완전함을 괜찮게 받아들이는 게 가능할까. ‘나만 왜 이 모양일까’ 하는 푸념은 아니다. 아마 다른 사람들의 인생이 고달픈 이유도 대개 이런 이유에서일 거다. 모르긴 몰라도 스스로의 불완전함과 모순을 포용할 수만 있다면 사람들의 스트레스 지수는 현저히 내려갈 것이다.
나는 매일 아침 눈을 뜨면서부터 자기 전까지 이 단어를 주문처럼 떠올려야 하는 상황에 맞닥뜨린다. 아이를 데려다주고 돌아오는 차안에서 무례한 다른 차량 운전자들을 향해 경적을 울려대다가 흠칫 한다. 아, 내가 또 다른 사람의 서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구나. 아마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이리라. 그때마다 나 자신의 하찮음과 이기심을 무엇으로, 어떻게 날려 보내야 할지 정신이 아득해진다. 매순간 그런 식으로 투쟁하는 것이 지겹고, 힘겹다. 그렇게 나 몰라라 눈 감아버린 관계는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진 채 삐걱거리고 복구는 점점 더 어려워진다. 피하고 싶다.
문득 궁금해진다. 다른 사람들도 이렇게 매순간 피곤하게 살아가는 걸까. 얘기를 들어보면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는 것 같다. 마치 전설처럼 전해지는, 완벽하게 이기적이고 또 깨끗하게 후회가 없는 인간들. 적어도 내 주변엔 없다. 신기해서 한 번 만나보고 싶을 정도다.
그런 사람은 어떤 의미에선 자신을 완전히 ‘임브레이스’ 하고 있는 건 아닐까. 타인에게 폐를 끼치고도 전혀 미안해하지 않으면 자신은 살기 편할 것이고. 보통은 개념 없다 욕하지만. 그게 스스로를 ‘임브레이스’ 하는 행동일 가능성은?
저마다 각자의 사정이 있고 그 점을 고려한다 해도 우리는 조금씩 닮아갈 필요는 있는 것 같다. 대개는 자신의 모습과 태도와 사정을 수용하는 쪽으로. 또 개념 없는 ○○씨는 조금이나마 타인을 임브레이스 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