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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삶의 연대기

『이름 없는 여자의 여덟 가지 인생』을 읽고

by 오지

여기 이름 없는 여자가 있다. 아니, 실은 이름이 여러 개다. 이름이 많다는 건 그중 어떤 것도 자기 이름이 아니라는 의미다. 살인자, 노예, 스파이, 연인 등. 삶의 전환점마다 여자는 다른 이름을 썼다.

이미리내 작가의 『이름 없는 여자의 여덟 가지 인생』은 한국 현대사에서 겪을 수 있는 가장 험악한 일을 모조리 거친 한 여성의 이야기를 담았다. 이 책에서 다룬 한국 현대사란 태평양전쟁, 한국전쟁을 말하는데 전쟁에서 여성이 겪을 수 있는 일이란 예상 가능한, 가혹한 일이다. 전쟁은 여성과 약자에게 가장 잔인하다.


아버지를 독살하고 가족과 떨어진 주인공은 일본군의 성노예가 되고, 우연히 살아남았다. 한국전쟁에서도 여성의 위치란 마찬가지로 취약하기에, 소년으로 위장해 미군들의 위안소인 ‘멍키 하우스’에서 허드렛일을 한다. 그 후 벌어진 일로 남한에서 쫓기는 몸이 되고 이후 스파이, 연인, 엄마로서의 삶을 살게 된다. 그 여성, 묵미란이라는 이름으로 최종 등장하는 90대 할머니의 삶은 미스테리를 남긴 채 자살로 끝난다.

이 책은 한국계 작가가 영어로 썼고 번역되어 한국에서 출판됐다. 그래서인지 문장이 거칠다. 작가가 처음 쓴 소설이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어떤 단락은 유려한데 어떤 단락은 거칠다는 느낌이 가장 먼저 들었다.

여러 매체의 호평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 소재로 쓰인 서사는 한국인에게는 익숙한 이야기다. 위안부, 양공주, 탈북 여성 등 한 사람이 연속으로 같은 일을 겪게 된다는 건 상상하기 어렵지만 생존을 전제로 한다면 그럴 법한 얘기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도 거대한 서사를 한 파트씩 잠깐 건드리고 가는 건 영리한 선택은 아니었다 싶다. 한 사람의 인생이 이럴 수도 있나 싶다가도, 그렇게 깔고 갈 수 있는 단편적인 서사는 아니라는 마음 때문이다.

다만 구성을 통해 비판을 피해 간 지점은 인정한다. 이 책은 묵미란 할머니의 세 번째 인생에서 시작해 시간을 섞어서 독자에게 펼쳐 보여준다. 아마도 시간순으로 구성했으면 신뢰감에 타격을 줬을 거라는 느낌을 받았다.


내가 이 책에서 주목한 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비밀 혹은 거짓말을 어디까지 감당하고 안고 갈 수 있나’하는 문제였다. 주인공이 마침내 안전함을 찾을 수 있었던 데에는 남성의 조력이 있었다. 자기 신분을 숨긴 여성을 사랑하게 된 남자는 거짓말을 한다는 걸 알지만 혼자 감당한다. 여성의 비밀을 자기가 떠안은 것이다.

오랜 기다림 끝에 마침내 만나게 됐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그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 남자는 운다. 자기 마음을 정리할 시간을 가진 것처럼 언급되지만 과연 그게 가능할까 싶었다. 그 여성이 왜 이전의 아내 노릇을 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이미 사랑하게 되었다면 다른 사람이라는 걸 인정하고 그 사람이 누군지 궁금해 할 것이다. 상대가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그렇게 금방 사랑하는 게 가능할까. 서로의 마음이 단단하다면 얼마든지 비밀을 드러낼 수도 있지 않을까.

묵미란 할머니는 평생 네 명의 남자를 죽였다. 그런데 죄책감은 없다. 할머니의 성격 탓이라고 해도 생의 마지막까지 그러기는 쉽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이 여성의 당당함이 설득력을 갖는 것은 전쟁이라는 상황에서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건 생존이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엄마와 자신을 위해 아버지를 독살한 것도 생존하기 위해서였으니까. 자기가 살기 위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극단이 자기를 죽이려는 사람을 먼저 죽이는 것이니. 할머니는 그에 대해 죄책감을 갖지 않을 수 있는 것이라 받아들였다.


마지막에 할머니는 자신의 기록을 넘기고 나서 딸과 사위가 방문할 시점에 자살을 한다. 왜일까. 모든 것이 안정되고 곧 가장 사랑하는 자기 손주(아람)와 같이 살게 될지도 모르는 시점에 죽는다는 것은. 책에 이유를 알 수 있을 만한 단서는 없다. 다만 짐작할 뿐이다.

가끔 생각을 해본다. 내가 구십 나이 정도 되어 눈도 제대로 안 보이고 소일거리로 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이 여의치 않게 되었을 때, 몸은 쇠약한데 정신은 말짱하다면. 그런 자의 일상은 어떨지 말이다.

우리 집안에도 그런 분이 계셨다. 94세에 돌아가신 왕할머니. 할머니는 아들들의 지극한 효심을 거절할 수 없어 그들의 수발을 받으셨는데 네 명의 아들이 간병을 오는 날에는 물도 제대로 안 드셨다. 아들이 기저귀를 갈거나 화장실에서 뒤처리를 해야 한다는 걸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나로서는 그 감정을 수치심이라 할지, 미안함이라 할지 알 길이 없다. 그저 볼일 볼 여지를 아예 없애려는 의도만 감지했다. 딸들이 그걸 알고, 굳이 간병하겠다는 효심 깊은 오빠들을 말렸다. 간병인을 들이면서 문제가 일단락 됐지만, 나는 몸이 쇠약해지는 노화를 받아들이는 게 생각보다 힘들 거라는 점을 그때 알았다.

견디기 힘들 것이다. 영화 <스틸 앨리스>에서 앨리스가 정신을 잃기 전에 자살을 하려는 이유를 왜 모르겠나. 묵미란 할머니도 같은 이유에서 자살을 한 건 아니었을지 짐작해 본다. 내게도 그런 선택의 순간이 반드시 올 것이다. 과연 나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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