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quête de l'harmonie≫, Musée d'Orsay
파리에서의 일주일을 보내고 또 새로운 일주일의 시작이었던 오늘, Musée d'Orsay에서 드디어 ≪Aristide Maillol: La quête de l'harmonie≫을 관람했다. 벌써 세 번째 방문이었지만, 아직까지도 상설전의 절반도 관람을 못했던 터라 기획전시 관람은 조금 미루고 있었는데, 오늘에서야 1층의 작품들을 모두 관람한 김에 본 특별전도 함께 보게 된 것이다. 그리고, 난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입장했던 이 전시에서, 어쩌면 가장 애정 하는 작품일지도 모를, 조각들을 만난 순간을 경험한다.
아리스티드 마이욜(Aristide Maillol, 1861-1944)은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중반까지 태피스트리, 도예, 회화 등 다양한 예술적 시도를 거치고 궁극적으로는 로댕, 부르델과 함께 프랑스를 대표하는 모더니티 조각 예술가로서 미술사에 그 이름이 새겨질 만큼 활발한 활동을 이어왔다. "La quête de l'harmonie"(직역하자면 '조화의 추구' 정도)를 제목으로 하는 만큼, 이번 전시는 그의 예술사에 있어 '조화'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그의 예술세계를 구축했던 다양한 작업들을 시기별, 시도별로 구성하여 큐레이션 되어 있었다.
위와 같이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다양한 방식으로 제작된 작품들도 물론 충분히 매력적이었지만, 단연 그의 조각 작품들은 시선을 사로잡았다. 다채로운 예술적 시도를 거쳐 마이욜은 중년이 되어 19세기 말부터, 그리고 20세기 초반에서야 본격적으로 조각 예술가로서 활동했다. 그 때문일까, 그의 조각들은 모두 시작부터 확실히 그의 작품들로 보인다. 특히 가장 첫 번째로 인식하게 되는 시각적인 특징에 있어 연상되는 것은 고대 그리스의 조각이다. 단, 기원전 5세기 즈음 고전기의 그리스 조각처럼 비율과 조화가 필연적인 시각적 아름다움을 야기하는 형태보다는 그보다 1, 2세기 앞선 아르카익 시기의 우아한 아름다움이 매력적인, '쿠로스'와 '코레'의 그것과 유사했다. 물론 이 시기 여성상인 코레는 누드 작품이 없지만.
19세기 말부터 시작된 입체주의, 미래주의 등 독특하고 실험적인 기법의 다양한 미술사조들에 의한 새로운 형태가 어떻게 보면 당연하게 여겨졌을 당대에 마이욜의 작품들은 다른 의미로 독특한 위치를 자리했을지도 모르겠다. 신선하다, 라기보다는 익숙해 보일 수 있다. 같은 프랑스 출신이었던 마르셀 뒤샹이 다다이즘의 시초가 된 <샘 Fountain>을 발표한 것이 1917년, 콩스탕탱 브란쿠시의 추상조각 <공간 속의 새 L'Oiseau dans l'espace>의 오리지널 작업이 이루어진 것이 1923년이니 말이다. 어쩌면 그의 작품들은 모더니티를 찾아볼 수 없는, 시대와 동 떨어진 작품들과 예술세계로 받아들여졌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작품을 단순히 눈으로만 보았을 때, 외형의 특징들만 고려했을 때 판단할 수 있는 1차적인 결론이다.
이러한 일종의 제약을 최대한 거둬내기 위해 본인이 전시 관람 시 반드시 거치는 순서 규칙이 있는데,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작품을 볼 때, 첫째, 전체적인 외형의 이미지를 눈으로 한 번 보고, 둘째, 머리로 한 번 작품에 대해 스스로 곱씹으며 나름대로의 작품에 대한 추측과 상상을 거친 뒤, 셋째, 큐레이터가 정성 들여 기입한 캡션을 읽어본다. 그리고 캡션의 설명이 부족하거나(아무래도 모든 작품에 모두가 만족할만한 설명을 붙이는 것은 그 외의 다양한 업무들까지도 처리해야 하는 적은 수의 큐레이터에겐 과중한 작업일 테니) 다른 측면에서도 확인하고 싶다면 작품에 대한 작가의 인터뷰, 연구자료들을 서치해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절대 1번과 2번의 순서를 거치기 전까진 3번을 먼저 하지 않는 것이다. 저마다의 전시 관람 방법이 있겠지만, 역시 3번을 먼저 하게 되면, 더 깊은 생각이나 궁금증이 차단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모든 것에 정답이 있는, 그 외의 답은 오답이 되는 한국의 교육방식의 영향이리라).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면, 마이욜의 작품은 전혀 익숙하지 않다. 오히려 우리에게 어색하다. 그의 누드 조각은 조화와 균형이 중시된 그리스 시기의 조각상을 떠올리기엔 전혀 이상적인(수학적 비례가 완벽한 아카데미즘의 그 기준에서의 'ideal') 신체가 아니며, 자세 또한 생소하다. 이전까지 쉽게 찾아볼 수 없던, 신체가 아름다워 보이지 않을 자세다. 이를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는 사실은 마이욜의 누드 조각 속 여성들은 대상화되지 않은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가 조각해낸 여성들은 여성 그 자체다. 어떤 특정한 형상을 구현해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를 만들어내는 것. 그의 조각이 모더니티 작품인 이유이자, 로댕의 조각이 근대조각을 여는 작품인 이유와 같은 맥락이라고도 볼 수 있다.
게다가 작품의 주제에 있어서도, 마이욜의 조각은 신화나 성서 속의 인물들을 시각적으로 나타내기 위한 수단이 아닌 너머의 '관념'을 담아내고 있다고 평가받는다. 프랑스의 예술비평가 장 카소(Jean Cassou, 1897-1986)는 마이욜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1961년의 전시 ≪Hommage à Aristide Maillol≫의 도록에서 마이욜의 조각은 ‘관념’을 표현하는 방법이라고 설명한 것처럼. 본인 또한 마이욜의 조각들을 보며 그의 작품들 속 여성들이 파도, 바람, 젊음 그 자체로 느껴졌다. 이처럼 여성 인체로 ‘관념’이 표현된다는 것은 그를 통해 작가의 정신성과 주관성이 강조되며, 인간의 존재와 본질을 탐구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당대로서도 혁신적인 시도(박숙영, 2008)였다고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이처럼 마이욜은 이전의 것들을 모방하거나, 모사하는 대신 그 내면의 요소들을 스스로 탐구해나가며 새로운 방식의 조각 작업을 여성 누드를 통해 이루어나간 작가다. 결국 마이욜의 조각은 단순히 텍스트를 시각적으로 표현한 작업이 아닌, 우리가 보고 느낄 수 있는 현실의 요소에 관념을 담아 생명을 불어넣는 시도들인 것이다. 그리고 난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예술이라 생각한다.
- 참고문헌
박숙영, 「마이욜의 조각에 나타난 모더니티의 구현 방식」, 『한국조형교육학회』, 33(2009): 287-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