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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마리 Feb 09. 2023

나를 데려가세요

(1)

남자는 내게 말했다.


"이젠 더이상 만날 일 없어."


나는 울음을 그쳤다.


그 뒤론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하얀 창문에 걸린 얇은 커텐 사이로 햇살이 내 이마 위로 쏟아지고 있었다.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잠옷엔 어제 점심으로 먹었던 토스트에 발린 잼이 묻어 있었다.

한숨을 쉬며 옷자락을 슬몃 비비다가 걸음을 옮긴다.


아래층으로 걸어내려갔다.

우리 집은 대개 일반 유럽 가정집처럼 인테리어가 온통 하얀색이다.

그가 하얀색 가구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이젠 모두 소용없지만.


그는 아이를 자기가 직접 키우고 싶어했다.

나보다 능력이 있으니 도맡겠다고 했던가....

부드러운 목소리에는 가시가 깔려 있었다.

자신의 일이니 넘어오지 말라던 무언의 압박.

아무렴 나는 흔쾌히 알겠다고 해버렸다.

나 혼자의 몸도 건사하기 어려운 판에, 아이까지 맡았다면 현실적으로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1층 화장실로 곧장 직행한다.

세면대 위에 위치한 붙박이장을 열어 빗을 꺼내 머리를 빗었다.

밝은 오렌지색 머리칼이 몇 가닥 떨어졌다.

나는 세면대에 물을 틀어 머리카락을 물과 함께 흘려보냈다.

나름의 청소인 것이다.


머리를 빗었더니 배가 고팠다.

문득, 어제 먹다 남은 토스트 한두 조각이 떠올라 부엌으로 향했다.


"딱딱해서 못 먹겠네...."


토스트를 엄지와 검지로 양말 집듯 집어보이니 웬걸, 벽돌과 같은 질감이 느껴졌다.

하는 수 없이 토스트를 내려놓고 멍하니 냉장고를 쳐다보았다.


내가 지금 배가 정말 고픈 것인가? 아니....

배쪽의 옷자락에 손을 대충 털고 정신을 차려 현관문을 향해 걸어나갔다.

오늘은 날씨가 참 좋겠지, 잠금 장치를 풀고 문을 열었다.


문을 여니 현관으로 올라오는 계단 두 칸을 제외한 나머지는 물바다에 잠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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