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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ind Jan 16. 2022

순자가 가져온 화투패의 맨 윗장은 왜 팔 피였을까?

-미나리(2021)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으니 영화를 감상 후에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순비기나무라는 식물이 있다. 해안가 부근에서 자라는 제주 토속식물인데 뿌리를 깊게 내려 모래를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폭풍이 몰아쳐 깊은 파도가 해변을 덮쳐도 땅이 유실되지 않는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어느 미국인은 순비기나무를 가져다 옮겨 심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다르게 순비기나무는 골칫거리가 되어버렸다. 모래를 잡아주긴 했지만 번식력이 너무 강해서 해변을 뒤덮었기 때문에 모두 뽑아버렸다.

순비기나무가 외국물을 먹더니 성장 속도가 빨라진 것일까? 아니다. 환경이 달라서였다. 제주도는 바람이 세고 많이 불어서 순비기나무가 해안으로 퍼지는 것을 억제할 수 있었지만 미국에선 그렇지 못했다. 바닷가라는 비슷한 곳에서 사는 것 같아 보여도 기후, 온도, 풍량 등 서식지의 환경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대륙을 넘어간다는 것은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다. 동식물도 그렇지만 사람 또한 마찬가지였다.

 

제이콥(스티븐 연)과 모니카(한예리)는 아메리칸드림을 꿈꾸고 건너간 전형적인 이민자 유형에 속한다. 성공이라는 부푼 꿈을 가지고 건너갔지만 현실은 어느 곳이나 팍팍했다. 그들의 생활을 들여다보면 그동안 축적된 상처를 은연중에 엿볼 수 있다.

제이콥은 우물을 팔 때 ‘한국 사람은 머리를 써’라며 혼자서 일을 처리하려고 한다. 모니카는 직장에서 한국말이 들린다는 반가움을 느끼며 한국 사람들이 다니는 교회를 찾으려고 하는 등 한국 사람들의 커뮤니티를 찾으려고 한다. 둘 다 타국에서 살려고 한국을 떠나왔지만 정작 한국적인 것을 찾는 이유는 일종의 방어적인 태도라고 볼 수 있다. 추측컨대 사람을 믿고 일을 시작했다가 사기를 당한 적이 있으며 다른 피부색과 언어를 사용한다는 이유로 대놓고는 아니더라도 교묘한 배척을 받았을 수도 있다.

어렴풋이 유추할 수 있었던 상처들은 교회에 갔을 때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필요 이상의 관심, 얼굴이 납작하냐는 둥, 여러 가지 언어를 말하고 어느 나라 사람인지 맞추라고 하는 행동에서 어디를 가든 이들이 겪었을 법한 일들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었다. 물론 다른 것들에 대해 호기심을 갖고 물어보는 것은 나쁘지는 않다. 하지만 물어보는 사람은 처음 겪는 일이지만 답하는 사람은 반복적일 수밖에 없는 지루한 일상이다. 이민자가 겪을 수밖에 없는 악의적이지 않지만 피로한 상황인 것이다. 그렇기에 모니카는 돌아오는 길에 교회에 가지 말자고 말한 것일 수도 있다.


내국인과 이민자의 관계를 다루는 장면은 이 교회 씬(Scene)이 끝이다. 보통 내국인과 이민자 사이에서 일어나는 어긋난 상황은 갈등을 이끌고 가기에 좋은 소재가 되며 극적인 장면을 연출할 수도 있다. 쉬운 길일 수도 있는 이분법적인 구도를 벗어나 이민가족 간에 느낄 수 있는 문화 차이라는 내적 관계에 주목했다.

할머니부터 손자까지 3대가 걸쳐있는 대가족의 모습과 동시에 이민 1세대부터 3세대의 모습을 한 집안에서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이들은 같은 피가 흐르고 있지만 각자 다른 문화권에 속해있다. 순자(윤여정)는 잠시 모니카의 요청으로 외국에 온 것이지만 나이대나 역할로 보아 1세대의 한국적 정서가 강하고 제이콥과 모니카 2세대로 한국과 미국이 반반 섞인 모습, 앤과 데이빗은 3세대로 미국에서 나고 자라 미국의 정서와 더 가깝다. 이들이 어떤 말을 사용하는지에 따라 구분할 수도 있다. 순자는 한국말이 우선이고 제이콥과 모니카는 상황에 따라 한국어와 영어를 섞어 쓰지만 한국어 중심으로 얘기를 한다. 그런데 데이빗(앨런.S.김)과 앤(노엘 조)은 스스럼없이 영어부터 나온다. 특히 순자와 데이빗에 대화 속에서 둘이서 느끼는 심리적 거리감은 상당히 멀다고 볼 수 있다. 순자는 데이빗과 같이 자는 것을 슬며시 걱정하고 데이빗은 순자에게 쿠키를 구울 줄 아냐고 물어본다. 서로에게 기대하고 있는 대상과 실재가 다른 것이다. 그중에서 순자가 데이빗에게 프리티 보이라고 하는 장면에서 잘 드러난다. 순자가 그런 얘기를 하자 데이빗은 자신은 예쁜 것이 아닌 잘생긴 것이라고 되받아친다. 이러한 오해는 단어의 뜻에서 갈린 것이다. 순자는 여느 한국 할머니들처럼 손주에게 우리 예쁜 손주 정도로 얘기했다. 실제로 예쁘다는 뜻이 아닌 어여쁜, 기특한, 귀여운의 복합적인 뜻일 것이다. 하지만 줄곧 미국에서 살아온 데이빗에게는 프리티는 말 그대로 pretty일 뿐이다. 직역을 한 것이 오역이 된 경우다. 한 가족이지만 살아온 방식이 다른 사람들이 같이 생활하면서 부딪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민자의 내외적인 면을 입체적으로 조명하고 있지만 이 부분이 이야기의 갈등 축에서 묘하게 비껴 나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왜냐하면 교회나 병원 외에는 장소를 옮기지 않아 의도적으로 바깥과의 접촉을 피하고 있고 순자가 등장해서 문화 차이를 보여주긴 하지만 소소한 것들이었다. 두 가지의 부분들이 핵심적인 갈등은 아니다. 이민자의 삶이 중심적 소재라기보다는 배경처럼 쓰이고 있다. 그렇다면 진정한 갈등은 무엇일까? 사실 영화 첫 장면을 유심히 살펴보면 알 수 있다.

미나리의 첫 장면은 이삿짐을 싣고 이사 오는 시점부터 시작한다. 새로운 곳으로 가는 길이었지만 인물들의 표정은 들뜨기보단 사뭇 진지하다. 도착한 후 제이콥은 밝은 표정이었고 모니카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심지어 모니카는 여기가 어디냐고 물었고 약속한 것과 다르다고 투정했고 못 미더운 표정을 내내 지었다. 여기서부터 두 사람의 갈등이 싹트고 있었다. 도로와 농장, 예쁜 집들을 지나 숲길로 들어서기까지 몇 번의 커브를 돌아 미로처럼 도착했다. 이사 오는 길 자체가 이들이 가진 얽히고설킨 이야기 속으로 관객을 초대하는 길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제이콥 가족의 깊은 이야기를 풀어낼 것이라고 암시하고 있다.

 

따사로운 햇살이 비추고 풀내음이 나는 넓은 정원이 있는 아름다운 집에서 자연과의 조화를 이루며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두 사람의 마음은 여전히 도시에 머물고 있었다. 모니카는 데이빗의 심장이 좋지 않아 언제든지 병원에 갈 수 있는 도시에서 머무기를 원했지만 제이콥의 꿈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온 것이다. 그렇다고 제이콥이 자연과 함께한 곳에서 살고 싶어 한 것이냐면 그것도 아니다. 제이콥의 꿈은 정원을 가꾸는 것이라고 했지만 실은 농장을 일궈서 대도시에 납품하는 것이었다. 자연에 살고 있지만 어떻게 보면 도시에 기생하는 형식의 삶인 것이다. 그래서 이 집은 바퀴가 달려있을 수밖에 없었다. 여차하면 언제든 떠날 준비를 마음속에 지니고 있었기에 부유했고 풀들처럼 뿌리내리지 못해 토네이도가 불어오자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부동산업자의 말대로 농장을 하는 이유는 둘 중 하나였다. 아주 크게 하거나 아예 안 하거나 말이다. 그렇다면 제이콥은 왜 큰돈을 벌 생각을 했던 것일까?

 

병아리 감별소는 단순해 보이지만 생과 사가 철저하게 구별되는 곳이다. 심지어 바닥에 떨어뜨리기만 해도 모두 폐기해야 되는 섬뜩한 곳이다. 이곳에서 제이콥은 10년 동안 일하면서 에이스로 통했다. 빠른 속도로 암수 구별을 할 수 있어 남들이 일할 동안 잠시 휴식을 가질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정도였다. 에이스로 각성한 것은 그가 하는 일에서 답을 찾은 것이었다. 데이빗에게 말했듯 수놈은 폐기된다. 암놈과 다르게 알도 못 낳고 맛이 없기 때문이다. 쓸모가 없으면 버려져야 되는 수컷의 삶, 더 나아가 이민자이기 때문에 철저하게 능력 말고는 기댈 것이 없어서다. 조니의 아빠가 말한 것처럼 책임은 전적으로 남자의 일인 것처럼 제이콥은 혼자서만 모든 것을 짊어지려고 했다. 10년의 동안 손에 각인된 암수 감별에 자신조차 길들여진 것이다. 모니카의 암수 감별 실력이 일취월장하고 있음에도 제이콥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제이콥의 농장은 돈에 대한 과도한 욕심이 서려있었다. 땅과 트랙터를 사는데 큰돈을 쓰고 폴까지 고용했다. 앤이 미국이니까 미국에서 자라는 식물을 심어야 되지 않냐는 질문에도 앞으로 한국 사람들이 이민 올 테니 그에 대한 수요를 파악하고 상추를 심었다. 상추를 심는 간격을 넓혀야 잘 자랄 수 있다는 폴의 말을 무시하고 최대한 가까이 심어서 수확량을 늘리려고 했다. 모든 준비가 끝난 것 같았지만 정작 문제는 사소하지만 중요한 곳에서 터졌다. 중요한 우물물을 파는 돈이 아까워 자신이 팠던 것이다. 수원이 풍부하지 않은 우물을 팠기 때문에 물이 금방 바닥나버렸다. 더 깊게 파보려고 노력은 했지만 물은 쉽게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숲으로 조금만 들어가면 냇물이 흐를 정도로 흔한 물이었지만 그쪽까지 눈을 돌리지 않았다. 대신 눈을 감고 수돗물을 끌어다 쓰기 시작했다. 어쩌면 비극의 시작은 이때부터였다. 하나의 물길로 농작물과 가족 중 하나는 시들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한 것이다.

 

화투를 하다 보면 피는 곧 껍데기로 통한다. 데이빗이 순자에게 받은 화투 갑을 처음 열었을 때 보인 것은 팔 피였다. 팔은 공(空)산이다.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는 죽은 땅이다. 물 하나 보이지 않는 텅 빈 공터인 제이콥의 농장처럼 말이다. 팔 피를 클로즈업하고 바로 농장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연속적으로 이미지를 배치했다. 수돗물이 끊기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순자의 건강은 나빠졌다. 그마저도 순자가 미나리 밭에서 떠온 물 덕분에 연명하며 살고 있었다. 순자는 갑자기 병이 난 것이 아니었다. 생명의 근원인 물이 말라가고 있었고 생명력이 꺼져가면 노인같이 약한 존재부터 티가 나게 되어있다.

 

병원이 있는 도시에 오자마자 모두들 갈증을 느꼈다. 잘 정돈된 시멘트와 콘크리트 바닥은 물기를 빠르게 하수구로 보내어 더욱더 마를 수밖에 없었다. 도시의 열기가 피어오르는 것처럼 제이콥과 모니카의 갈등도 극에 달해있었다. 둘은 데이빗을 걱정하는 마음은 같았지만 해결 방식은 양갈래로 뻗어있었고 마른땅처럼 갈라설 생각을 했다. 그런데 그들이 마주할 현실은 아칸소에 남는 것이었다. 데이빗이 서서히 치유되고 있다는 의사의 소견과 함께 새로운 거래처를 얻은 긍정적인 상황이 이어진 것이다. 하지만 어긋난 채로 멀리 떠난 두 사람은 되돌아가기에 너무나 지쳐 보였다. 그 순간 불이 났다.  


순자가 불을 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단지 모니카가 하던 것처럼 쓰레기를 태우다가 바람에 흩날려 불이 옮겨 붙은 것이다. 불씨를 잘 못 돌본 탓이 있지만 마를 대로 마른 곳에 불이 붙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불씨는 알게 모르게 제이콥에서 시작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농사를 지을 때만이 아닌 평소에도 줄곧 담배를 피웠는데 그 모습이 마치 심지를 입에 문 것 같았다. 그의 존재감이 꺼져갈 즈음 더 태울 것을 찾던 중 마른 것들에 옮겨 붙은 것이었다. 그러나 불이 일어날 일이었다고 생각한다면 파괴임과 동시에 창조의 시작이었다. 불이 나면서 애써 가꾼 농작물을 잃으며 피해를 본 것 같지만 오히려 갈등이 해소되었다. 수돗물로 키운 농작물은 두 사람이 틀어지게 된 씨앗이었다. 불을 끄는 과정에서 둘은 힘을 모았다. 결국 불을 끄진 못했지만 그들 사이에 일어났던 감정은 불타서 없어졌다. 멀고 먼 길을 돌아 원점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여건이 된 것이다. 화전민이 밭을 태우고 새롭게 시작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다시 시작한 일은 마르지 않도록 우물물부터 찾는 일이었다. 순자가 오고 나서 알게 된 생명의 소중함, 자연과의 삶을 깨달은 것이다.


순비기나무는 제주도의 바닷바람을 기억하고 있었고 그것을 찾으려 계속 뻗어나간 것인지도 모르겠다. 순비기나무를 하나의 생명으로 보지 않고 단지 해변의 모래를 잡기 위한 기능적인 면을 보고 옮겨 심었을 때 순비기나무는 이미 심기도 전에 내쫓길 운명이었을 것이다. 순비기나무가 맞았던 바람을 얼굴에 익혔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미국에도 제주도만큼 센 바람이 부는 곳은 없지 않을 테니 말이다. 그렇다면 타국이지만 순비기나무는 제주도의 바닷바람을 그리워하지 않고 맞춰가면서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순자가 찾은 좋은 자리처럼 여전히 미나리가 자라는 곳, 생명의 시작점이자 영원한 곳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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