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언덕 위 빌라 꼭대기층
집 주인이 퇴거를 요청했다. 가구마다 빨간 딱지가 붙었을때도 어찌어찌 지켜낸 집이었는데, 집주인의 퇴거요청엔 버틸 재간이 없다.
당장 돈 천만원도 없는 일곱식구가 길바닥에 내 앉아야한다는 말에 언니는 온갖 대출을 끌어다 높은 언덕 위의 빌라, 꼭대기층에 있는 집을 마련해줬다. 미련하게도 부모의 이름으로.
당장 길바닥에 내 앉을 뻔했으니 달동네 빌라의 꼭대기층이라고 아쉬울게 뭐가 있을까.
그래도 꼭대기라 해가 드니까, 옥상이 가까워서 빨래 널기 수월하니까 나름 괜찮다 싶기까지했다.
무엇보다 우리집이니까. 언제 쫓겨날지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되니까.
그 집에서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직을 했다. 3교대 대기업공장의 정규직이었다. 고등학교 진학전부터 내가 바라던, 아니 바란다고 믿었던 일이었다(내가 초등학교 저학년일때부터 할머니는 나에게 네가 일찍 돈을 벌어 동생들 대학보내야한다고 누차 말했었다). 지방에 있는 공장이라 기숙사가 주어졌고, 평생 가져본 적 없는 내 방이 생겼다.
가족과 떨어져 온전한 독립, 경제력까지 생겼으니 진짜 이제 내 삶을 살 수 있겠구나 기대했다. 월급은 최저임금이었지만, 주휴수당도 없이 알바를 하던 나에겐 미래를 꿈꾸기에 충분한 돈이었다. 악착같이 돈을 아꼈다. 1년이면 얼마, 2년이면 얼마, 3년만 딱 돈 모아서 그만두고 대학에 가야지. 기숙사의 의류함을 돌며 깨끗한 옷과 신발을 주워왔다. 집에 오고 가는 휴무에는 4000원짜리 시외버스를 타는게 아까워서 회사 통근버스를 타려고 3시간을 기다리기도, 5시간 전부터 집을 나서기도 했다. 마트를 가려면 시내에 나가야하는데, 택시비 8천원이 아까워서 회사버스를 탔다. 쉬는날 밥 한끼라도 아끼려고 새벽일이 끝나고 퇴근할때는 아침식사를 포장해서 가져와서 끼니를 때웠다. 통장엔 돈이 차곡차곡 쌓였고, 그걸 보는게 재밌었다.
직업계고(당시엔 실업계, 전문계, 정보고 등으로도 불렸던 것 같다)에서의 취업은 졸업 이전에 이루어진다.
나는 2학기가 시작할 무렵인 9월에 입사했다. OT를 하고, 부서와 업무를 배정받고, 동기들과 야식을 시켜먹으며 선배들의 텃새를 견디고 있었다. 첫 월급을 받은 즈음이었고, 밤샘 근무를 하던 날이었다. 잠시 쉬는 시간에 작업대에서 나와 휴대폰을 보니 엄마의 부재중 전화가 있다. 타지에 나와있는 딸에게 이 시간에 전화한 게 맘에 걸려 바로 전화를 걸었다. 돈 좀 보내줄 수 있니. 엄마가 너무 힘들다. 엄마의 지친 목소리를 들으니 화도 나지 않았다. 엄마가 안쓰러워 알겠다고 하고 다시 일을 하러 들어왔다. 내 못난 성격에 뒤늦게 울분이 터졌는지 다시 일하러 들어와서는 내내 울었다. 작업복이 얼굴까지 다 가리는 옷이라 다행이었고, 엄마한테 돈을 보낼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100만원 남짓한 월급에서 30만원을 보냈다. 이상은 안된다고, 월급 얼마 안된다고. 다달이 30을 보냈고, 돈을 더 아꼈고, 친구들과 먹던 야식을 두번에서 한번으로, 나중엔 아예 안 먹는 것으로 줄여나갔다.
막막했다. 일은 적성에 맞지 않았고, 수면장애와 소화장애는 일상이었다. 밤낮을 바꾸는 일은 사람몸이 감당하기 그리 쉬운일이 아니었다. 처음엔 정신이 못견디겠더니 점점 몸이 못 견뎌했다. 사막에 내 던져도 살 애라고, 독하다고들 했는데.. 남들 다 가고싶다는 대기업에 와놓고 왜 못 견뎌할까. 스스로가 미워서 더 이 악물고 버텨보려했지만 쉽지 않았다. 모아놓은 돈으로 입학금과 첫 학기 등록금은 충분할 것 같았다. 그래, 차라리 더 늦기 전에 대학을 가자. 지금부터하면 올해 수능은 볼 수 있을거야. 왜그랬는지 그만두는게 너무 죄스러웠다. 차마 상사의 얼굴을 보기가 무서워 도망치듯 나왔다. 기숙사 짐을 빼서 집으로 와있는데, 출근날에 출근을 하지 않으니 상사로부터 전화가 온다. 나한테뿐만 아니라 부모에게까지 왔나보다. 부친이 버럭 화를 내며 그만두더라도 사직서를 쓰고 오라고 호통을 쳤다. 언덕위 꼭대기집에서의 가장 강렬한 기억이다. 이렇게 책임감이 강한사람이 유독 가족에게만 이렇게 무책임한게 곱씹을수록 화가 나지만, 스무살이던 나는 뭔가 큰 죄를 지었다는 생각만 들었다.
수능을 준비해본적이 없는 직업계고 학생에게 수능은 너무 생소한 것이었다. 우리학교만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다항식까지가 내가 배운 수학이었다. 영어는 비즈니스영어라고해서 수출문에 쓸법한 문장 몇개를 외워서 시험본게 다였다. 그런상태로 고3이던 동생이 학교 선생에게서 얻어다준 교사용 문제집과 EBS 무료 동영상으로 수능을 준비했다. ∑를 어떻게 읽어야하는지 몰라서 "천사 왼쪽날개같은거!"라고 물어가며, 첫학기 등록금에 손대지 않기 위해 학원도 안다니며 악착같이 공부했다. 매일 도시락을 싸서 다녔고, 2500원짜리 지하에서 파는 백반이 너무 먹고 싶어서 생일에 사먹겠다고 마음을 다잡곤 했었다. 버스비가 아까워 도보로 40분거리의 공공도서관을 걸어다니면서도 아껴서 대학가는거라 생각하면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5월쯤이었나. 도서관이 쉬어서 집에서 공부를 하는데 엄마가 점심을 먹으러 집에 들렀다. 엄마가 대뜸 묻는다. 300만원만 빌려줄수있니. 엄마 내가 돈이 어딨어, 지금도 독서실 갈돈 없어서 집에서 공부하는거 안보여? 알겠다.. 엄마는 보란듯이 내 앞에서 이모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 300만원만 빌려줘. 알겠어 내가 빌려줄게!! 엄마에게 800만원이 남아있던 통장의 출금카드와 비밀번호를 넘겨줬다. 이모에게 빌리느니 내가 빌려주고 말지, 하는 마음이었다. 나 그거 대학 입학금이야, 그 전엔 갚아야돼. 알겠어. 갚기는 커녕 다음달엔 500만원을 빌려달라고했다. 통장에 남은돈이 500만원인걸 알고 그랬구나. 지나고나니 우연은 아니었던 것 같다. 입학 전엔 갚는다고했지만 말뿐이었다. 운이 좋게 대학에 합격하고 입학금을 낼땐 학자금대출을 받았다. 부친 덕에 함께 빚쟁이에 시달려야했던 나는, 절대 빚은 지지 않겠다고 했는데 결국 사회생활을 시작함과 동시에 빚을 지고 말았다. 은행에서 무수한 서류에 서명을 하고 간신히 입학금을 치룬 날, 나는 펑펑 울었다. 대학합격소식을 안고 처음으로 간 할머니댁에선 "대학은 무슨 돈으로 갈라고?" 소리나 들어야 했다. 대학 갈 돈을 가져간 부친은 "대출받아야죠 뭐"라고 태연히 대답했다. 당신 자식이 내 입학금까지 말아먹었소, 라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돌아보니 하나도 좋은 기억이라곤 없는 집을, 끝까지 안 좋은 기억으로 나와야했다. 부친은 딸이 빚을내어 마련해준 집을 담보로 또 빚을 냈고, 역시나 말아먹었다. 집은 경매로 넘어갔고, 우린 또 쫓겨나듯 보증금 500에 월세 30만원짜리 집으로 이사했다. 엄마는 "경매받은 사람들이 이사비하라고 100만원이나 줬다"며 신이난건지 해탈한건지 자랑을 했고, 부친은 도어락 값으로 10만원을 더 받았다며 뿌듯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