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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무 Aug 08. 2022

빨간 벽돌 빌라

02.옥상이 있는 집

나의 두번째 집은 5층짜리 다세대 연립주택이었다. 이번에도 역시 반지하가 우리집이었다. 나중에서야 알게되었지만 이 집은 부친이 사업적으로 알게된 사람의 집이 비어 얼마간(이라고하기엔 초-고등학교 시절을 살았으니 짧진 않은 기간이었다) 살게해줬던 것이고, 나중에는 집주인이 쓸일이 있다고해서 쫓겨났었다.


이 집은 좋은 기억이 하나도 없다. 앞집은 누가 살기는했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데, 우리집은 빌라의 복도까지 죄다 짐을 늘어놓고 살았다. 10평 중반쯤 됐으려나. 방은 세개지만 안방을 제외한 방은 두명이 겨우 잘 정도로 좁았고, 부친과 언니가 각각 방 하나씩을 가졌고, 거실과 맞닿아 문을 떼어 거실처럼 사용한 작은 방 하나를 나머지 다섯 자매와 엄마가 함께 썼다. 사실상 독립된 공간이 전혀 없던 나머지 자매들은 언니가 집을 비우는 동안 언니의 방에 몰래 들어가 문을 잠그고 자기만의 시간을 갖기도 했다. 그마저도 다른 자매들이 탐탁치 않아하니 오래 쓸 수도 없었거니와 언니가 알면 정말로 맞았기때문에도 자기만의 시간은 몰래, 잠깐, 조심스럽게 써야만했다.


반지하의 창문이 나있던 곳은 동네의 불량청소년들이 모여들던 곳이었다. 교복입은 학생들이 침을 뱉고 담배를 피우며 깔깔거리는 은신처같은 곳으로 나있던 창문은 더운 여름에도 거의 열지 못했다. 거기서 보이던 아이들은 대체로 우리 자매와 또래의 아이들이었고, 가끔은 아는 아이들도 있었다. 화장실쪽 창은 옆 빌라와 바로 붙어있어서 사람이 지나다닐 공간은 없었지만, 거미나 돈벌레 같은 다양한 벌레들이 드나들기엔 충분했다. 벌레를 소스라치게 무서워하는 언니는 화장실에서 씻다말고 벌레에 놀라 기절도 여러번했다.


집은 볕이 들지 않아 비가 오지 않으면 옥상에 빨래를 널었다. 엘레베이터가 없는 빌라의 꼭대기층까지 젖은 빨래를 플라스틱 빨래바구니에 넣어 낑낑대고 들고 올라갔다. 빨래는 항상 많고 무거웠으므로, 겨우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던 우리는 한층씩 번갈아 들거나, 양쪽 손잡이를 나눠들고 가파른 계단을 오르내려야했다. 빨래를 내려놓고 손바닥을 펼쳐보면 손가락 마디엔 빨간 줄이 선명하게 그어져있었다. 빨래를 이고 가는 길에 누군가 현관문을 열고 나오면 죄라도 지은양 화들짝 놀라 벽에 붙어 길을 피해주곤 했다. 빨래를 들고 낑낑대는 내 모습이 그 어린나이에 창피하게 느껴졌었다.


그나마도 옥상은 우리집에서 가장 쾌적한 공간이었다. 집이 좁고 식구가 많아 친구를 집으로 데려와서 노는 건 거의 불가능했는데, 내 기억에 딱 한 번 친구를 데려왔던 기억이있다. 물론 집으로 데려온 건 아니었고, 옥상으로 초대했었다. 초록 방수페인트가 발린 옥상에는 비가 오면 고르지 못한 바닥 곳곳에 물 웅덩이가 생겼다. 비가 많이 오는 날, 친구를 불러 옥상에서 우산을 쓰는 둥 마는 둥하며 빗 속에서 놀았던 기억이 집과 관련된 그나마의 좋은 기억이다. 학교 숙제를 위해 심은 옥수수가 하루하루 쑥쑥 자라고, 방울토마토도 자라던, 생동하던 여름의 기억은 옥상 덕분이었다.


빨간 벽돌 외관만큼이나 빨간 바퀴벌레가 우글거렸다. 집을 비우고 할머니댁에 갈때마다 사람도 죽지 않을까 싶을만큼 독한 바퀴약을 터트리고(정말 펑하고 터지는 약이었다)는 다녀와서 바퀴벌레사체를 치웠다. 약을 터트리면 이틀이 지나도 집은 매캐했지만, 그러고나면 한동안은 바퀴벌레의 수가 현저히 줄었다. 물론 그런 약들이 바퀴벌레의 번식력을 이기진 못했고, 그런 험난한 작업은 그 집에서 살던 내내 계속됐다.


지하라 비가 새진 않았지만 벽의 모서리마다 벽지에 곰팡이가 서렸다. 어떤 벽은 한쪽벽이 온통 곰팡이투성이었다. 집이 좁다보니 그런 벽에도 누군가는 붙어자야했고, 그벽에 얼굴을 대고 자는 날도 부지기수였다. 곰팡내를 맡으며 잤지만, 집 전체가 퀘퀘해서 딱히 불쾌감도 느끼지 못했다.


그집에서 초등학생이던 나는 고등학생이 되었고, 그 사이 컴퓨터라는 게 가정집에 보급되기 시작했고, 다섯 자매는 여섯자매가, 다시 여섯자매는 다섯자매가 되었고, 엄마는 노점에서 보험회사로 직장을 옮겼고(아니 직장이 생겼다고 해야겠다), 언니도 직장인이 되었고, 여전히 부친의 사업은 적자를 면치 못했고, 그덕에 우린 계속해서 가난했고, 우리 이름으로 된 전셋집 한 칸 얻지 못했다.


이쯤에서 고백컨대 우리엄마의 평생 소원은 내 이름으로 된 아파트 한 칸 갖는 것이다. 물론 지금까지도 이루지 못한 꿈이다. 나의 집에 대한 애착이 엄마한테 물려받은 건진 모르겠지만, 엄마는 언젠가 꼭 아파트에 살아보고 싶다고 자주 얘기했었다. 하지만 엄마가 아파트에 가는 일은 이모집에 가는 때 외에는 입구에 달고나나 얼린 음료수를 팔러 노점을 차릴때 뿐이었다. 그런 엄마에게서 받은 영향이 결코 작진 않았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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